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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의 역사.. 그 흐름의 일부 본문

음악이야기/재즈

JAZZ 의 역사.. 그 흐름의 일부

김현관- 그루터기 2024. 5. 28. 10:36

 

루이 암스트롱

재즈 역사상 가장 스릴 넘치는 국면 전개

뉴 올리언즈의 빈민가에서 출생한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의 발명가'로 통한다. 스승으로 따르던 코넷 연주자 조킹 올리버(Joe King Olver)를 따라 시카고로 간 암스트롱은 킹 올리버 밴드와 플래처 핸더슨 악단 등을 오가며 천부적인 재능을 과시하였고, 이내 독립하여 소규모 캄보 밴드인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 '핫 세븐즈' 를 결성, 전성기를 누리며 1920년대 재즈계를 장악하게 된다.

암스트롱은 최초의 재즈형식을 완성한 즉흥연주자였는데, 처음에는 앙상블 중심의 뉴 올리언즈 스타일을 존중하면서도 서서히 그 스타일에서 벗어나 빅 밴드의 모든 동료들을 반주자로 한 솔로 주자로서의 위치를 개척해 가는 모습은 재즈의 역사를 통해서 가장 스릴있는 국면 전개였던 것이다.

또한 천부적인 박자감을 토대로한 즉흥적인 스캣(Scat) 보컬의 창조는 그를 최초의 재즈 보컬리스트로 기록되게 하였고, 모든 관악기 연주자들이 매끄러운 소리를 위해 슬러(Slur)와 레가토 주법을 사용했던 것에 비해 갑작스럽고 날카로운 첫 음(Attack)등 고음역대의 연주로 트럼펫의 연주영역을 확장시킨 점, 재즈에서 트럼펫 이전에 사용되던 악기인 코넷을 누구보다 먼저 트럼펫으로 대체하여 사용했던 점 등등, 객관적인 예를 들어 그 위대성을 말하기에는 끝이 없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모든 분야의 재즈 뮤지션들에게 계승한 '창조성'이야 말로 가장 커다란 공로일 것이다.

 

스윙 빅 밴드

30년대를 흔든 '스윙

1920년대 후반의 세계적인 경제공항이 회복의 기미를 보이면서부터 밝아진 사회 분위기와 사교의 바람에 동승해 새로운 형태의 재즈인 '스윙(Swing)'1930년 대 전체에 걸쳐 유행하게 된다. 스윙의 인기는 상상보다 대단했던 것으로 백인들 은 비로소 '재즈'가 아닌 '스윙'을 흑인의 것이 아닌, 미국의 음악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스윙음악은 대개 빠른 비트의 음악으로만 인식되고 있지만 30년대 당시의 스윙은 4박자 리듬의 명맥을 이어갔으며 초기 스윙 음악은 대부분 여유로운 슬로우 템포의 곡이었다. 음악사적으로 스윙시대가 남긴 의미는 작곡과 편곡에 대한 관점이 대두될 수 있었다는 점으로 최소 10명 이상의 빅 밴드(Big Band)가 주류를 이루었던 스윙악단들은 사운드의 효력을 위한 편곡과 집단 앙상블에 걸맞는 곡을 선택하는데 신경을 써야했다.

이렇게 스윙시대는 빅 밴드의 시대라 하겠으나 동시에 솔로 연주를 강조하였는데 이를 통해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스타 연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백인 스윙악단은 백인들로만 구성되었지만 차츰 뛰어난 흑인 솔로 연주자들을 기용하게 되면서 적어도 음악에서 만큼은 흑과 백이 동등하다는 인식을 쌓아가게 되는 것도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라 하겠다.

대표적인 연주자는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Benny Goodman), 트럼 본 연주자인 글렌 밀러(Glenn Miller)가 있었고 음악적으로도 높은 성과를 획득 했던 캔사스 출신의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악단과 뉴욕의 듀크 엘링턴 (Duke Ellington) 오케스트라가 한 발 앞서 명성을 쌓아놓고 있었다.

레스터 영

빅 밴드의 스타들

스윙음악은 솔로보다는 앙상블을 위주로한 것이었지만 쇼의 구성을 위해 간간히 등장하게 했던 솔로연주 때문에 악단의 지휘자보다도 더 유명한 솔리스트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 연주자를 보기 위해 공연을 찾게 되었다. 몇몇 스타 연주자들은 빅 밴드의 일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별개의 소형 그룹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뮤지션들끼리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그만큼 복잡한 계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훗날 모던재즈의 초석인 비밥(Bebop)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특히 캡 캘로웨이(Cap Galloway)악단에서 활동하던 트럼펫터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빌리 엑스타인(Billy Ecstain) 악단에서 활동했던 알토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존재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에는 뛰어난 솔로 연주자들이 포진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플래쳐 핸더슨 악단의 스타였던 콜맨 홉킨스(Coleman Hawpkins)와 함께 스윙 시대를 대표했던 색소포니스트 레스터 영(Lester Young)이 있었다. 사람들에 게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콜맨 홉킨스에 비해 존재 자체가 주목받지 못했던 레스터 영은 당시 모든 색소폰 주자들이 모방했던 홉킨스식의 강하고 거친 테크닉과 상반된, 여성적이고 멜로딕한 연주로 일관하였다. 그의 연주 스타일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여유롭게 스윙' 한다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과 만나면서부터였다. 레스터 영은 그로부터 20년 후인 1950년대 쿨 재즈(Cool Jazz) 뮤지션들에게 '쿨의 원조' 라는 평을 얻게된다.

모던재즈의 출발점 뉴욕 52번가

1940년대 뉴욕의 52번가는 비밥재즈(Bebop)를 잉태한 재즈사상 가장 중요한 장소로 기록되고 있다. 라이브 클럽들이 밀집되어 있어 매일 저녁 뜨거운 재즈의 열기로 채워졌던 이 지역은, 대부분 음악 그 자체보다는 백인들을 상대로 한 상업용 업소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중요한 일터이자 자신의 연주를 뽐낼 수 있는 격의없는 경연장이기도 했다. 특히 52번가에서 약간 윗동네에 위치한 '민튼즈 플레이 하우스(Minton's Play House)'는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매일 밤잼 세션의 경연을 펼친 비밥의 산실로서 뮤지션들 사이에서는 일단 52번가에서 일자리를 얻으려면 민튼즈 무대에서 연주자들에게 인정을 받아야한다는 게 당연시되고 있었다. 민튼즈의 뮤지션 중에서는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가 최고의 스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이 두사람은 마침내 피아니스트 셀로니우스 몽크(Thelonious Monk), 드러머 케니 클락(Kenny Clarke)등 음악적으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또 다른 뮤지션들과 의기투합하여 비밥의 혁명을 주도하게 된다.

MINTON'S PLAY HOUSE 민튼즈 플레이 하우스의 몽크(Monk)

 

부조화의 조화

민튼즈 플레이 하우스의 피아니스트였던 셀로니오스 몽크는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비밥의 탄생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동료 뮤지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을 정도로 이론에 해박했으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개척해 간 진정한 의미의 모던재즈 뮤지션이었다.

몽크가 구사하는 악상과 프레이즈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 자신만의 것이었으며 고전음악의 화성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몽크의 음악론은 재즈 그 자체의 내재적 접근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다만 그 음의 질서가 조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돌출적인 텐션코드, 어울리지 않는 대위화성등은 다른 뮤지션들에게는 이상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의 음의 미학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부조화의 미학'으로 발전해 온 현대 재즈의 포스트 경향으로 볼 때 몽크의 이러한 앞선 시도는 재즈화성의 표현범위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었고 이는 많은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물론, 조지 러셀(George Russell)과 같은 진보적인 편곡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재즈 뮤지션들에게 연주되고 있는 'Straight, No Chaser' ‘Off Minor’ 'Ruby, My Dear' 'Round Midnight' 등의 불멸의 명곡들을 그가 만들었다.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Charlie Parker & Dizzy Gillespie)

프레이즈의 발명가들

초기 재즈 연주자들이 한 곡에서 5~10개의 코드를 사용한 반면 민튼즈의 비밥 연주자들은 10~20개 이상의 많은 코드를 사용하여 빠르고 복잡한 연주를 하였고 그와 동시에 새로운 코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재즈에서 코드란 불변의 법칙이 아니고 새로운 효과를 위해 뮤지션들에 의해 창안되기도 하며, 심지어 우연한 실수가 좋은 반응을 얻어 연주자들에게 유행되기도 하였다. 특히 찰리 파커는 원곡과 다른 새로운 코드로 충격적인 효과를 준다든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감을 즉석에서 표현할 수 있는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테크닉은 새로운 것에 열광했던 젊은 뮤지션들 사이에 최고로 추앙받았으며 재즈가 비로소 댄스홀의 반주 음악이 아닌, '예술'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한편, 디지 길레스피는 최초로 자신의 곡에 '비밥(Bebop)'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

느리게 이야기하는 방식.

찰리 파커의 사이드맨이기도 했던 마일즈 데이비스는 줄리아드에서 수학한 영재였다. 그는 찰리 파커의 절대적 영향권내에 있었지만 비밥 이외에 현대음악의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관심으로 드뷔쉬의 제자였던 '클로드 손힐 악단'의 음악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 한편, 40년대 후반에 손힐 악단의 편곡을 도맡고 있었던 길 에반스(Gil Evans)는 찰리 파커의 앨범에 수록된 'Donna Lee' 라는 곡이 마일스 데이비스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악보를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일스와 처음 만나게 된다.

이 두사람의 만남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첫 번째 걸작이자 관악 9중주라는 전례 없는 재즈 클래식 <Birth of the Cool>을 합작하기에 이르렀고 이 앨범은 1950년대를 상징하는 쿨재즈의 초석으로 기록되게 된다. 쿨 재즈는 빠르고 복잡한 프레이즈 의 비밥과는 상반되는 차분한 음악이며 솔로주자의 애드립보다는 주선율과 대선율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앙상블 위주의 재즈였다.

마일스 이외에는 쿨 재즈를 했던 흑인 뮤지션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쿨은 백인재즈의 상징이었는데, 이것은 흑인의 비밥을 소화하기 어려웠던 백인 재즈 뮤지션들에게 리리시즘의 재즈라는 대안으로 선택 되어진 결과물이기도 했다.

쿨은 비밥에 비해 '느리게 이야기하는 방식' 이었다. 자기억제의 대가였던 마일스 데이비스는 음의 선택에 매우 신중했으며 조급한 사운드는 지양했다. “때로는 불지 않는 것이 부는 것보다 중요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던 그의 이러한 신중성은 때때로 듣는 이를 지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었지만 마일스 음악의 핵심은 '타이밍의 예술'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 어떻게 연주하는가의 차원보다는 '언제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대한 시간성의 부여와 사운드의 균형감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리 모건(Lee Morgan)

하드 밥 (Hard Bop)

1950년대에 미국 서부의 쿨 재즈와 함께 주류를 이룬 동부의 하드밥(Hard Bop)은 지극히 흑인적인 음악으로, 흑인의 그루브(Groove)와 즉흥감성이 확연히 드러난 재즈 스타일이다. 하드밥은 과거의 비밥에 비해 간결하게 정리된 사운드와 비교적 심플해진 코드 조직을 바탕으로 파퓰러한 힘을 갖고 있어서 쿨 재즈와 함께 모던재즈라 불리운다.

하드밥의 펑키한 성향 때문에 부수적인 장르로 파생된 소울재즈(Soul Jazz)는 블루스와 가스펠 음악의 요소를 특징으로 한 리드미컬한 사운드로 대중들에게 사랑 받게되면서 6~7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소울재즈와 하드밥은 시기적으로 비슷하여 마치 동류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으나 하드밥의 톤(tone)은 소울재즈에 비해 본질적으로 무거운 것이었다.

하드밥의 대표적인 뮤지션은 드러머 아트 블래키(Art Blakey)와 그의 그룹 재즈 메신저스, 트럼페터 프레디 허바드(Freddie Hubbard), 클리포드 브라운과 리 모건(Lee Morgan), 색소폰 주자 소니 롤린스 (Sonny Rollins) 등이었다.

그 중에서 리 모건은 하드밥과 소울재즈의 중간선에서 양방의 사운드를 독자적으로 개척해 간 뮤지션이다. 그는 소울 재즈의 클래식 넘버이자 불멸의 히트곡인 'Sidewinder' 와 라틴 필링을 담은 하드밥 넘버 'Ceora'를 만든 작곡가로도 유명했지만 1972년에 애인의 총에 맞고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출처 : Jazz it up 만화로 보는 재즈역사 100년 / 남 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