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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아드 걸’ 미모가 흥행 좌우...순종 부부까지 빠진 경성 당구 열풍 본문
‘빌리아드 걸’ 미모가 흥행 좌우...순종 부부까지 빠진 경성 당구 열풍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상류층의 고급 오락 출발..중일 전쟁 후 퇴폐 온상으로 꼽혀
석영 안석주가 1928년10월17일자에 그린 만문만화 . 경성의 부자들이 당구에 빠진 풍경을 풍자했다.
양복에 넥타이차림 신사가 왼손에 당구 큐대를 들고 시가를 피우며 게임을 지켜본다. 뚱뚱한 남자는 당구대 위에 몸을 올려 놓고 두 발을 공중에 띄운 채 공을 조준하고 있다. 만문만화가 석영 안석주가 경성의 부자들이 당구를 즐기는 모습을 풍자한 그림이다.
‘이것에 심취한 뚱뚱보 대감 두 사람이 그 움직이기도 어려운 몸덩치로 ‘큐’를 들고서 빌리아드판 언저리를 빙빙 서로 엇갈려돌면서 붉은 옥돌, 흰 옥돌을 밀고 때리고 서로 맞추고 하다가 여송연을 문 입을 씰룩거리며 지절댄다. ‘이건 오마와시일세 그려?’ ‘오마와시든 무에든 오늘은 자네가 한 턱 내게 된 형편일세.’(조선일보 1928년10월17일자 아도짓뎅겜 열점만 남았습니다)
◇당구 마니아 순종, 하루 두차례 즐겨
당구는 1920년대 경성에 유행병처럼 번진 스포츠이자 오락이었다. 당시 ‘옥돌’(玉突)이라 불렀다. 당구대는 옥돌대, 당구장은 옥돌장식(式)이었다. 19세기 후반 인천 개항장을 통해 들어온 당구는 처음엔 상류층이 즐겼다.
순종(1874~1926)은 당구 마니아였다. 순종은 1912년3월 일본 당구재료 판매상 닛쇼테이(日勝亭)에 당구대 2대를 주문, 창덕궁의 인정전 동행각에 설치했다. 당시 ‘매일신보’(1912년3월7일)는 순종이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을 당구하는 날로 정했는데, 이외에도 추가로 당구장에 들른다고 소개했다. 나라 뺏긴 군주는 당구로 소일하는 신세였다.
당구에 재미가 붙은 순종은 하루에 두 차례 당구장에 들를 정도가 됐다. 조선일보 1922년 12월21일자에 소개한 순종의 하루 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오전 9시 또는 9시20분 기상, 주치의 진찰과 세수, 한약 탕제를 들고, 낮12시 아침 수라를 마친 뒤 오후2시까지 업무.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인정전 옥돌장으로 가시어 유쾌하게 공을 치시며’, 오후 4시 다과와 목욕을 마친 후 책과 잡지를 읽는다. 오후7시 저녁 수라를 마친 뒤 산보 겸 ‘옥돌장으로 가시와 친히 공을 치시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배종하였던 신하에게 명하시와 어람도 하시고’, 이후 신문을 일일이 읽고 밤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당구 즐긴 신여성 순종황후
순종 아내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1894~1966)는 당구를 즐긴 신여성이었다. 매일신보 1914년 7월4일자는 ‘왕비께서도 더위를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매일 오전 10시에 내인들을 대동해 인정전에서 옥돌로 소요하시다가 오후5시가 되면 돌아가셨다’ 는 소식을 전했다. 조선일보도 1922년 12월21일자에서 순정효황후는 오후4시쯤 간단한 다과를 들고 목욕을 한 뒤, ‘옥돌장으로 가서 공을 치신다’고 소개했다. 부부가 함께 당구장을 찾아 오락을 즐기는 시대는 아니었든지 순종과 시간차를 두고 당구장을 찾았다.
하지만 순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시대일보 1926년 5월4일자는 ‘순종이 애용하시던 옥돌대’라며 인정전 당구대 사진을 싣고 이렇게 소개했다. ‘순종 황제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이 계시면서 세상일을 억지로 잊으시고 적막하실 때에는 근친, 종척과 함께, 또 어떤 때는 대비 전하와도 같이 ‘옥돌’을 치심으로써 일시의 소견으로 삼으셨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애통을 새롭게 할 옛일이 되어 누구라도 인정전 안의 옥돌대 사진을 보면 감회가 깊을 것이다.’
◇당구장 영업은 빌리아드 걸에 달렸다
당구는 당시 은행이나 회사, 공공기관에서도 권장하는 오락이자 운동이었다. 1922년 경성부의원에 당구대와 탁구대를 갖춘 오락실이 들어섰고, 1937년 지금의 서울시의회 옆자리인 태평로 1가에 들어선 조선체신사업회관 4층에도 도서열람실과 함께 당구장, 오락실이 들어섰다. 1930년대 경성에 경쟁하듯 들어선 아파트 1층에도 당구장이 자리했다. 아파트 임대업체는 입주자 뿐 아니라 외부인에게도 당구장을 이용하게 하고 부수입을 챙겼다.
‘빌리아드 걸’은 이 와중에 등장한 신종 직업이다. 손님과 함께 당구를 치거나 점수판을 들고 서서 점수를 세는 역할을 했던 여성들을 말한다. ‘헬로 걸’ ‘가솔린 걸’ ‘데파트 걸’ ‘매니큐어 걸’처럼 근대 이후 등장한 새 직업군 여성들을 ‘OO걸’로 부르며 주목하던 시대였다.
시인 백석이 초창기 편집을 맡았던 월간지 ‘여성’ 1937년 11월호엔 ‘빌리아드 걸’이 있는 풍경을 취재한 ‘당구장’이 실렸다. ‘백촉은 됨직한 눈부시는 전광아래 파ㅡ란 천을 깐 옥돌대위에는 새빨간 돌공이 두 알, 하얀 공이 두알 이것을 무서운 눈으로 쏘며 견주는 신사가 있다. 공은 큐를 받아 옆 것을 치고 이리 저리 구르다가 다른 알을 또 건드리고 명랑한 음향을 내며 정지하면 옥돌대 옆 계산대에 앉은 게임 세는 여자가 있어가지고 ‘나나쯔 게임’ ‘고고노쯔 게임’하고 크게 외인다.’
빌리아드 걸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옥돌장의 인기는 계산대에 있는 여자가 예쁘고 미운데 있는 것이라 한다. 그 목소리가 이뻐야 하고 좋은 인상을 주어야 된다. 그리하야 가끔 옥돌장 이 계산대에 있는 여자와 손님 사이엔 곧잘 일생을 같이 하는 인연이 맺어지는 수도 있다 한다.’(앞의 ‘당구장’ 기사)
국문학자 소래섭 울산대 교수는 ‘당구장 사업의 성패는 빌리어드 걸의 외모에 달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므로 업주들은 예쁘고 인상 좋고 목소리 좋은 여성을 채용하려고 애썼다’(‘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2011)고 적었다. 빌리어드 걸의 보수는 월15원 정도로 ‘데파트 걸’의 20~30원보다는 적었지만, 고객인 남성들의 희롱이 잦았다고 한다. 당구장 손님들이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손목을 만지고 몸을 스치는 등 별별 추태를 다 부리는 바람에 남자란 흉측하고 더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신동아 1932년12월호.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에서 재인용)는 빌리어드 걸이 겪은 성희롱 실태를 보여준다.
◇퇴폐로 비난받은 ‘빌리아드’
일부 당구장은 퇴폐와 도박의 온상으로 알려져 사회적 물의를 빚고 단속대상이 됐다. 조선일보 1937년11월4일자는 개성의 남문상가에 위치한 당구장은 표면만 당구장일뿐 내부는 이미 도박장으로 바뀐지 오래됐다고 비판했다. 일정한 직업이 없는 룸펜과 청소년, 상점 수금원, 농촌 청소년들로 당구장에는 늘 1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행심 때문에 모여든다고 전한다.
‘인천부내에 있는 아홉 군데 당구장에도 요즘 중등학교 생도들이 몰려들어 일반의 풍기상 가장 재미롭지 못한 일이 적지 않다. 그중에도 심한 생도들은 책보를 낀 채로 당구장에 들어와서 정모·정복에 담배까지 피워물고 ‘게임’보는 여자들에게 농담까지 해가며 유희를 한다하여 인천서에는 매일같이 투서가 들어오므로…'(1940년2월9일) 고급 사교 오락이자 건전한 스포츠로 주목받던 당구는 중일전쟁 발발 후 당국으로부터 퇴폐와 향락의 근거지로 비난받았다. 전쟁의 시대에 오락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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