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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죽어버린 말을 호출하는 것 본문

사람들의 사는이야기

오래전에 죽어버린 말을 호출하는 것

김현관- 그루터기 2025. 1. 31. 00:56

오래전에 죽어버린 말을 호출하는 것

한강 저,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11)  - 박민정

언어를 주고받으려는 행위가 일종의 핑퐁게임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간혹 나의 말을 저쪽 테이블로 쳐 보내면, 그것은 답을 다 알고 있지만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나 아닌 것들에게 던지는 모든 말이 결국 질문으로 돌아올 뿐이다.

소통이라는 단단한 어휘, 거기 깃들어 있는 투철함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이 소설의 독자 모두를 감히 우리라 칭할 수 있다면)는 왜, 이토록 소통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할까, 소통이라는 어휘 자체가 그것을 곧 완성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소통이라는 어휘를 어지간히도 남발한다. 희랍어 시간의 화자는 몇 번이고 강조해서 '한다. 그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간혹 우리는 과신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상과 인식 사이에, 결국 세계와 나 사이에 온전히 통역 가능한 매개가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실은, 아무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끝없는 폐쇄 경험만을 누적하며 일방통행으로 헤엄치는 수족관 속 물고기들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 말조차도 이른바 문명인의 공통 감각에 기반한, 어느 정도까지는 전부 특정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는 기호들 투성이다. 그런 기호들이 심장과 심장을 만나게 해줄 수 있을까, 결국 우리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심연, 언어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경우에 한정지어. 언어가 어떻게 온전한 소통을 담지 해준다는 것일까. ’희랍어 시간을 읽는 동안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 희랍어일까, 그것은 화자의 말을 빌려 "오래전에 죽은 말, 구어로 소통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소설의 제목 희랍어 시간은 소통에 대한 천진한 낙관을 아프게 부정하는 시간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는 실명 직전이고,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는 실어증에 걸렸다. 빛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다. 희랍 철학 학위는 살아가는 데 전혀 무용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가족들을 타국에 두고 돌아와 점차 꺼져가는 눈으로 버티는 남자. 양육권 소송에서 패해 아이를 잃고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말까지 잃고 살아가는 여자, 인간이란 본디 그렇게 나약한 물질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양, 한 때는 분명히 존재했던 감각을 상실한 채 그들은 강의실에서 만난다.

한때 존재했으나 이제는 죽어버린 언어 희랍어를 사이에 두고, 희랍어 시간은 희랍철학에 대한 쓸쓸한 부연으로도 채워지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이제 모두가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수난의 시간", 그러나 그 시간을 앞둔 철학자들은 패배의 미래를 감지하지 못한 채 달려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말에는 없는 중간태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어려운 언어였다면 기꺼이 그것을 선택했으리라는 여자의 생각처럼, 희랍어는 불가해한 언어다.

여자가 자신의 모든 저술 활동을 작파하고 입을 다문 상태에서 희랍어를 배우는 까닭은, 그것이 낯선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처가 지나치게 가혹해서, 그런 상처를 주는 삶이 차라리 불가해했기 때문에 "언어가 세계와 결합되는 회로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어에 사로잡혔고, "그 매혹은 세계에 대해 가져온 위태롭다는 느낌과 무의식적으로 유사한 것이었다.

여자에게 언어란 세계를 온전하게 번역해주는 도구도 아니었고, 그 자체로 완벽한 소통의 매개도 아니었을 듯 하다. 언어가 그토록 온전한 것이었다면, 언어를 통해 발생하는 그 가혹한 폭력, 그 불통은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남자는 '희랍식 논증'을 호출한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 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남자의 기억 속에서 언제나 현재와 같이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당신은 과거 이렇게 말했다.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그는 점차 없어지는 시력을 의식하며 자신의 존재를 '성립 불가능한 오류'로 지워간다.

여자는 이제 서류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자신과 멀어질 아이를 생각하며, 자신의 정신병력을 들먹이며 그 아이를 빼앗아간 전남편을 사무치게 떠올리며 고의로 침묵을 선택한다. 두 사람은 신체 감각이 소멸 해가는 분명한 절정의 지점에서 손을 잡는다. 그들의 심장과 입술을 맞닿지만 영원히 어긋난다. 그들은 어긋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물리적으로 완벽한 소통은 없을 것이라는 걸 그들은 오랜 원체험을 통해 애초부터 담담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이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 오직 이미지와 정념으로 남은 찰나의 순간, 순전히 언어 때문에 사무치던 상처를 생각한다. 나의 말이 누군가에게 비수가 되고, 누군가의 말이 나를 아프게 만들 때, 그와 내가 동일한 모국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서러워서 언어를 처음 배우던 순간을 호출하곤 했다. 아직 아무런 의미도, 즉 어떤 경험도 담지하지 않은 우리말의 자음과 모음, 활자나 소리만으로는 무엇도 추상할 수 없었던 순수한 언어와의 첫 경험이 그리웠다.

여자가 그러했 듯, 그때 내가 선택했던 것이 외국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낯선 문법 체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발음과 싸우며 말이 주는 공포를 잊으려고 했다. 언어는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사회의 재현이어서, 타국의 언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은 욕망에 다름없는 것이었다. 나의 경험으로 그것은 스스로를 이방인, 백치, 소수자의 입장에 놓는 것과도 같았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조리 언어화한다는 것이 이미 권력이었으므로, 반대로 언어 자체를 모조리 추상한다는 것 역시 권력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언어들 속에서 머문다는 것은 언어를 둘러싼 상처들로부터 좀처럼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

소설 역시 언어의 감옥이다. 그런 이유로 오직 이미지와 정념으로, 순수한 동물적 감각으로 남은 세계에서 두 사람의 기척이 만난다는 결말이 아프게 읽힌다. 작가는 언어가 주는 공포와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던 것일까, 언어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언어를 다뤄야 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가혹한가. 그러나 우리는 간과하지 않는다. 언어가 소멸한 세계, 빛이 소멸한 세계 역시 언어의 감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 소설에는 자신의 신체에 꼼꼼하 게 기록된 패배의 경험들과 싸우는 순간, 모든 너를 향하던 질문이 하나의 너를 향해 압축되는 순간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희랍어 시간은 우리를 아프게 내려쳤던 익숙한 말들, 모국어에 얽힌 모든 기억이 낯설어지는 시간이다.    朴珉貞 1985년 소설가

 

[희랍어 시간]  1-54P 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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