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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하늘색 창문 본문

내이야기

하늘색 창문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9. 19:50

하늘색 창문

새벽 댓바람부터 비지 장수의 느릿한 종소리가 골목을 깨우고, 이 집 저 집 부엌에서 달그락 부딪는 그릇 소리들로 대리석 공장 뒷골목의 하루가 시작된다. 낮에도 컴컴한 이 골목에서 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열 시부터 서 너시 경까지 채 여섯 시간을 넘기지 못하는데, 마치 강원도 산골짜기 가파른 계곡에서 해를 보는 시간과 다름없는 짧은 햇살이 주는 반가움마저 바쁜 삶 속에 묻어 버린다.

장마철이면 낮에도 컴컴하고 음습한 기운을 뿜어대는 이 골목에 처음 발을 딛는 사람들은 축축한 블록 담벼락에서 꾸물대는 노래기들로 인해 벽이 움직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당황하기도 한다. 대부분 흙벽돌로 벽을 쌓고 양회로 얇게 마감을 한 뒤 흙 손으로 양회를 튀겨 벽면을 거칠게 만들었고,, 몇 집은 수수대와 짚을 섞어 진흙으로 허술한 마감을 해 쥐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흉한 몰골을 드러낸다. 굵은 철망을 어설피 잘라 못을 구부려 창을 막아놓은 오래된 방범창들은 시뻘건 녹이 슬고 먼지가 켜켜이 쌓여 사람의 손길을 잊은 지 오래인데,, 유독 한 집만이 마름모꼴의 창살에 하늘색 페인트를 칠해 놓아 무채색의 골목에 환한 빛을 주고 있다.

타마-유[콜타르]로 까맣게 칠을 해 놓은 엉성한 판자문 안으로 집안이 다 보인다. 왼편 조그만 화단에는 채송화의 분홍빛 꽃잎과 짙은 초록색이 상큼함을 주는데, 좁은 툇마루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노파의 콜록거림이 거슬린다. 늘 한 손에 피 묻은 손수건을 들고 연신 입술을 닦는 지친 표정이 불쌍하다. 툇마루는 노파가 해바라기 하며 하염없이 놀리는 손 걸레질로 인해 햇살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인다. 집안을 통해 들어가는 또 하나의 대문을 열고 성큼 들어가면, 방금 지난 집과는 다른 차분한 느낌을 받는다.

대리석 공장에서 얻어온 破⽯[파석]들을 맵씨 있게 마당에 깔아놓고 대문 한편에 빛 잘 드는 장독대도 역시 대리석으로 단장을 해놓아 집주인의 정갈한 솜씨가 눈에 띈다, 장독대 옆으로 볼록을 쌓아 만들어 놓은 좁은 화장실에서는 여름 한 철 햇살을 받아 부화된 구더기들이 꾸물거리고 콧구멍이 뻥 뚫릴 정도의 역한 암모니아 냄새와 푸석이는 양회 종이를 잘라 만든 휴지들이 여늬 집과 마찬가지로 시절의 궁핍함을 보여준다.

오랜 기다림 끝에 너른 마당 한쪽에 이 골목에서 처음으로 두 칸짜리 스라브 집을 지었다. 종종 저녁 무렵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 산들바람에 새파랗게 자라는 배추들의 이파리 부딪는 사각이는 소리와 왕십리로 가는 기동차의 낮은 바퀴 구르는 소리에 스르륵 잠이 들며 입가에 작은 행복의 미소를 짓는다

안방을 들어서기 전 오른편에 놓여 있는 녹색의 작은 찬장 속에는 동회에서 배급받은 식은 좁쌀죽이 있다. 거슬거리며 고소한 그 맛이 입 안의 침샘을 자극한다. 쪽마루를 올라 안방으로 들어가면, 동양정밀의 O.P.C. 선풍기가 투명한 파란 날개를 자랑하며 소리 없이 돌고 , 제 몸집보다 큰 배터리를 노란 기저귀 고무줄로 칭칭 동여맨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이 미자의 구성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삐걱이며 열리는 대문 소리를 듣고 창호지 문에 붙여 놓은 쪽 유리에 한쪽 눈을 들이 대면 영락없는 승기 엄마의 툭 튀어나온 새빨간 입술부터 보인다.

부엌으로 들어서니 지붕을 뚫어 반 투명 비닐 스레트로 채광을 한 낯익은 어두움이 반기는데 30촉짜리 알전구만이 그 어두움의 손짓을 거둔다 한쪽 벽에 길게 누운 나무 선반 위에는 쓰지 않는 커다란 대소쿠리들과 삐삐선으로 만든 검은색 장바구니, 그리고 양재기들이 불 빛에 반짝이고, 비사표 성냥의 유황냄새를 기다리는 곤로의 옥색 몸통에 어느 날 연탄가스를 마시고 골방에서 비척이며 걸어 나오는 소년의 핼쑥한 얼굴이 투영[投影] 되어 안쓰러움을 준다.

동아 수련장 2권이면 가려지는 소년의 골방 작은 창문 안쪽은 거무스레해도 밖에는 반짝이는 하늘색 페인트 칠을 한 마름모꼴 창문이다.

2010.02.17

설날을 맞아 조카들과 처가댁 위쪽에 있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엘 들려보고 문득 옛날 살던 우리 집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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