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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그해 여름 본문
그해 여름
오래전 뉴스에서 아주 희한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한 눈 팔며 건널목을 건너던 사람이 달리던 K.T.X. 와 부딪쳤는데 가벼운 찰과상만 입고 툭툭 털고 일어났다는 얘기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분은 이전에도 20 여 층의 빌딩에서 떨어졌어도 기적같이 살아났다는데, 전생에 아주 많은 은덕을 쌓아 놓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실재하지도 않는 운명이라는 존재를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준 소식이다.
이 뉴스는 그동안 잊고 지내던 87년 여름 내가 경험한 두 사건을 기억나게 해 주었다. 둘의 발단에는 공교롭게도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술이다. 당사자들이 술에 취해 이성이 마비되었고, 신체의 의지력을 훼손시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실수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 해 여름! 처 이모님 댁이 있는 철원 한탄강의 조그만 댐 주변으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인해 강물이 많이 불어 있었으나 일행은 수심이 얕은 곳의 강 언저리에 터를 잡고, 물놀이를 즐기며 준비한 음식과 술로 흥을 돋우었다. 처사촌 형님의 노련한 투망질로 실한 어치들이 바구니에 계속 넘치고, 어치를 굽는 연기가 한탄강변을 휘돌며 고소한 향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 시간 술에 얼큰히 취한 채 투망질 하는 형님에게 술을 권하러 가던 중 그만 발을 헛디디면서 물살이 빠른 강물로 빠져 순식간에 강 아래쪽으로 휩쓸려 내려갔다. 다행히 나를 발견한 구조대원이 아니었다면 그만 불귀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물에 빠진 순간 이미 나는 죽은 목숨이었다. 수영실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세차게 휘도는 물속에서 온 몸이 빙글빙글 돌고 있어 정신이 혼미해 가는 데다 투석전을 하는지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몸뚱이를 정신없이 두들겨 패고 있어 "아 ~ 이곳에서 나는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 해 그곳에서 5 명이 빠져 유일하게 나만이 살아서 구조된 아찔한 사건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살아 돌아온 그 달 말 엄청 난 폭우가 쏟아졌다. 방재업무를 담당하던 나는 저지대의 침수와 위험물 관리대상인 노후 건축물과 축대의 붕괴에 대비하느라 연일 귀가도 못한 채 관내를 순찰하였고, 당시 붕괴 위험이 매우 높아 대피령을 내린 항동 축대 밑 10 여호의 인가에 방문하여 집안 곳곳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자정경에 사무실로 돌아와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한탄강 물속에서 죽어가는 파리하고 하얀 얼굴의 사내 모습에 깜짝 놀라 깨어 보니 새벽 1시경이었다.
밖에는 그때까지도 쉼 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우레와 번개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자지러지듯 빛을 내뿜고 있었다. 동료들은 연일 밤샘 근무의 피곤함에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으나 꿈자리가 뒤숭숭한 나는 우의를 뒤집어쓰고 재차 순찰을 하며 축대 밑의 인가로 발길을 향했다. 그런데 세상에, 불과 1시간 전에 순찰을 마친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와 집으로 들어가 보니 지방에 날품 일을 다니던 그 집 아들이 한 달 만에 돌아와 술에 취해 랜턴을 켠 채 자고 있었다. 잠을 깨워 어르고 달래 간신히 인근 대피소로 안내를 한 지 두 어 시간만에 축대는 무너지고 사내가 자던 집과 양 옆의 세 집이 완전히 매몰되고 말았다.
그해 여름! 술로 인해 죽을뻔한 인생이 술로 인해 죽을 뻔한 다른 인생을 살렸다. 이후에 수많은 시간을 흘리며 사건을 접하고도 두 사건에 대해 연관을 두지 않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K.T.X. 에 부딪히고 살아난 남자의 뉴스를 접하고서야 새삼 떠 올리는 것은, 나를 구해준 구조대원과, 내가 구해준 그 사내가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어 만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게 하였다.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귀한 생명을 서로 살리던 그해 여름의 연결고리의 중심에 내가 있던 것은 예사롭지 않은 하나의 운명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구조대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못하였고, 나도 그 사내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지 못했다. 술은 이렇듯 운명의 존재 여부를 떠나 자신의 귀한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까지 최소한의 인사도 못하게 하고, 사람의 기본적인 윤리마저 잊게 만드는 독약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다.....
2010 - 02 -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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