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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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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편 지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3. 22:49

편 지

풋풋한 젊은 여름날! 방학이면 내려가 있던 외가댁에서 당시 사귀던 여학생의 편지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우체부로부터 오매불망 기다리던 편지를 받고서 왜 그리 가슴이 뛰던지. 그저 의례적인 안부와 만나기로 한 장소를 적은 편지였지만 그 편지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지금이야 초등학생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그 시절만 해도 편지 외에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으니, 보고 싶은 마음만 가슴에 품고, 방학 동안 한 달여를 헤어져 있어야 하는 애틋함을 연결하는 소중한 공간의 연결고리였기 때문이었다.

정성스레 고른 꽃무늬 편지지에 담긴 마음. 또박또박 힘준 태가 완연한 글씨체에서 수줍음도 엿볼 수 있고, 그 아이가 쓴 내 이름을 보며 나를 생각하는 이성의 아릿한 느낌이 모두 묻어 나옴을 알 수 있다. 그 친구와 헤어진 뒤, 두어 친구들과의 편지로 맺어진 교류가 있었지만 그립다거나 아릿한 감정이 울리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그저 사춘기 시절의 호기심이었을 뿐이리라.

그래도 스스로 연애편지라 내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내에게 써 주었던 몇 장의 편지밖에 없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친정에서 가져온 그 편지를 보니 젊은 날 아내에게 대한 뜨거운 열정에 뿌듯함을 느꼈지만 그 일면에 열정을 표현한 편지지의 무성의가 드러나 보이는 바람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머릿속에 아내 생각이 나기 무섭게 담배 은박지와 모조지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써 내려갔던 치기의 한 단면들 때문에 지금 챙겨 보자니 평범함(편지지)이 왜 그렇게 우러러 보이는지.

그나마 아내가 정성스럽게 보관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내가 쓴 편지를 볼 수 없을 뻔했다. 아내와 연애하기 시작하기 무섭게 어머니께서 내 책상 속에 있는 편지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그중에는 첫사랑이 보내온 편지들도 있었는데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한다 해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시절의 편지에 적힌 추억들을 한 번쯤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나이가 든 모양이다...

몇 년 전! 큰 애가 자대 배치를 받았을 무렵 처음으로 아비의 입장에서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군에 자식을 보낸 엄마의 가슴에 뜨거운 감정이 흐르며 울컥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바로 훈련소에서 보내온 아이의 옷가지를 받을 때이다. 큰 애의 옷가지가 담긴 소포를 받던 그날! 아내는 소포 꾸러미를 아예 열어 보지도 못하고 거실 한 귀퉁이에 놓아두고는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는 모습이 소포를 받고는 내쳐 울고 있던 모양새다.

그 후 며칠을 망설이던 아내가 아들 녀석에게 편지를 써 보냈으면 하고 내게 의중을 떠보는데, 자식에게 편지를 쓴다는 게 영 어색하여 핑계를 대며 몇 번은 빠져나갔지만 결국에는 참고 참던 분노를 무섭게 폭발시키는 아내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온 하룻밤을 새어 편지를 써 보낸 일이 있었다.

아무리 아내의 강요에 의해 썼다 하더라도 당연히 아비 된 입장에서 군에 가 있는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하는 심사를 담아 보냈지만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는지 우편 수취함을 풀방구리처럼 오가며 답장을 기다리는 어미의 심중은 아랑곳없이 기어코 녀석은 첫 휴가 때까지 답장을 안 보냈다. 나는 그저 아비의 도리를 했으니 되었다 하고 염두에 두지를 않아 그 사건은 그저 잊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우연한 기회에 큰 녀석에게 그때 왜 편지를 안 썼느냐 물어보았더니 " 뭐라 쓸 말이 없어서요" 아주 무덤덤하게 대답을 하는 녀석의 말을 듣고 부모 자식 간에도 이해의 방향이 이렇게 틀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쓸 말이 없어 보내지는 못해도 받는 편지는 굉장히 기다려지고 그려졌다니, 편지만큼 정과 그리움의 표현을 애틋하니 줄 수 있는 매체가 또 있을까?

아들 녀석이 군에 가 있는 동안 온갖 정성을 다 해 편지를 써 보내 주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편지의 양도 어마어마하였지만, 파격적인 디자인과 알뜰살뜰한 내용으로 녀석의 내무반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제대와 동시에 헤어졌는데 아직까지도 책꽂이 한 귀퉁이에 무심한 듯 꽂혀있는 한 권의 빨간색 편지 책자는 지극한 정성이 매 장마다 흠뻑 배어 두 연인의 추억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요즘은 그 소통의 방법이 너무 다양해서 낡은 머리로 쫓아가기 힘들다. 휴먼 네트워킹 전문가" 다이앤 달링"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아는 사람보다 누가 나를 아느냐 가 중요한 시대"라 하는데 이제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개인의 경쟁력을 가꾸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편지가 지닌 고유의 멋을 잃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아쉽다. 그 이유는 편지가 주는 情 의 표시 때문이다. 시간적이 제약이 거의 사라진 속도감 있는 소통만을 중시하다 보면 잔잔하게 느껴지는 그리움을 담은 정이 메말라, 살아가는 재미를 잃고 말 것이다. 또 하나, 말은 한 번 하면 흘러 가버리지만 편지는 기록으로 남겨지기 때문에 조심성 있고 정성스럽게 써야 한다. 아내에게 쓴 내 편지가 근 삼십 년 지나 지금의 내가 얼굴 붉히게 만드는 것도 편지가 주는 기록이라는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SNS가 발달될수록 진정한 삶의 보람과 정을 찾기 위해 편지를 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만이라도 친구와 가족 간에 서로의 정과 푸근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편지 한 장의 보석 같은 값어치를 실천하는 삶을 가꾸면 좋겠다..

2011 - 7 - 28

1975년도에 춘천 친구에게 받은 단 한 장 남은 편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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