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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하인천 오 동장 본문
하인천 오 동장
조계지 계단 끄트머리에서 고개를 들어보니 마치 에게해를 모조리 풀어놓은 듯 새파란 하늘이 눈에 찬다. 이제 입추라서 가을맞이 하는 양 한 달여 동안 그악스럽게 내렸던 비 그친 시원한 뒷 태를 보이나 보다. 눈앞에는 28년 전 혼인식을 올렸던 "한국회관" 대신 레스토랑[現:라파치아]으로 변한 낯섦이 다가온다. 세월의 흐름 속에 감수해야만 하는 공간의 변화이자 어색함일까?.
그 맞은편에 번듯한 3층 건물이 서 있는데, 예전에는 방금 지나간 사람에게 물어봐도 나무에 뒤덮여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건물이었다. 자유공원 관리와 장비를 두는 창고로 쓰는 건물로 이곳을 사택으로 쓰던 사람이 있었다. "신태범" 박사께서 쓴 "인천 한 세기"의 "청관" 중에 오 ** 동장과 하인천 일대를 돌아보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오 동장이 당시에 그 사택을 사용하고 있었다.
해안 천주교회 맞은편 “중국어마을 문화 체험관”이 당시에 내가 근무하던 동사무소 건물이고 그곳에서 처음 오 동장을 대면했는데 마치 산판의 십장 같은 모습으로 담배를 질겅거리며 두툼한 손을 내미는 첫인상이 매우 털털한 모습으로 각인되었으며 그 느낌은 오 동장께서 정년퇴직할 때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황해도 사람으로 내 아버지와 동년배며 동장 되기 전 선박사업을 하다 많은 손해를 보고 당시 내무부 장관의 후광으로 별정직 동장으로 임명되었다는데, 그때에는 별정직으로 임명되는 길이 여럿 있어 그렇게 허물이 안되던 시절이었다.
여하튼 함께 근무하면서 옆에서 수년간 지켜본 바 남에게 베푸는 게 천성인지 어려운 사람 앞에서 지갑을 여는 게 일상다반사라 집안 식구들의 호구지책은 동네 유지들의 차지가 되었고, 명색이 동장인데도 집도 절도 없어 보다 못한 인사의 주선으로 한국회관 앞 공원관리소를 임시사택으로 쓰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데, 사연 모르던 나는 온통 나무와 꽃으로 치장된 사택을 보는 순간 “ 아 ~ 동장쯤 되면 저런 멋진 집에 사는구나!” 하며 부러워하기까지 하였다.
예전 동사무소에는 사환이 있었다. 사무실 청소와 문서수발 등의 일을 하는 잡 무직이라서 집안 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을 주로 채용했는데 내가 근무할 당시에는 경성이라는 떠꺼머리가 그 일을 했다. 그리고 특이하게 정 씨 아저씨 (鄭 處松)라는 대필을 해 주시는 분이 계셨는데, 책상도 없이 그저 사무실 한편에서 신문도 보며 대가 없이 출생신고서나 혼인신고서 등의 대서를 해 주시는 분이었다.
오지랖 넓은 오 동장의 배려로 노년의 소일거리를 마련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70이 넘은 연세에도 키 작고 마른 체형에 카랑카랑한 말소리와 정갈한 매무새가 돋보인 분이었다. 선린동 1번지 조계지 계단 (청국 지계 방면)의 골목길에 사시면서 우리와 함께 정확한 출퇴근을 하며 간혹 동장이 사드리는 담배를 유일한 보수로 셈하셨으며, 긍정적이며 멋진 노후를 보내시던 분으로 기억된다. 지금까지 살아 계시면 백수를 넘기셨으리라.
토요일이건 일요일이건 새벽 출근하는 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출근과 무섭게 모닝커피로 일과를 시작하는 오 동장 덕분에 숙직을 도맡아 하던 젊은 직원 두 명은 매우 괴로운 아침을 맞이 해야만 했다. 간혹 사무장이 숙직을 하는 토요일이면 총각 직원인 나와 태성이는 사무장을 꼬여 밤을 새워 화투놀이를 했는데, 새벽녘이면 쪽문을 열어 보고는 “ 밤새 새마을 사업 하시나?” 면서 슬쩍 자리를 비키고 단골 다방에서 모닝커피를 시켜 주시고는 했다.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지마는 당시 새마을 사업에 매진하던 박 대통령 시절에 공직에 있는 사람이 노름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으니 커피까지 배달시켜 준 오 동장의 넉넉한 대인배의 풍모를 보며 결국 모두 화투놀이를 그치고 말았다.
오 동장과의 인연은 꽤 깊어 한참 뒤 두 번째 함께 근무를 하던 중, 80년 후반 여름이 지날 무렵 태풍으로 인해 꽤 많은 비가 쏟아져 이곳저곳에 수해를 입고 있어 전 직원이 비상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지금의 “한중문화관” 뒤쪽 축대가 무너져 내린 일이 있었는데, 밤 12시경까지 순찰을 돌고 난 후 잠시 잠을 청하던 새벽 두 시경! 잠시 퇴근했던 오 동장이 꿈결에 나타나 빨리 축대로 가 보라 하였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멍한 가운데도 묘한 느낌이 들어 이미 대피령을 내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축대 밑에 가보니 한 곳에 불 빛이 새어 나오고 았는 것이었다. 한 달만에 돌아온 그 집 아들이 술 취한 채 자고 있어 황망스럽게 데리고 나와 횡액을 면하게 한 일이 있었다. 나 역시 그 해 휴가 중에 술로 인해 한탄강에 빠져 물귀신이 될 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목숨을 주고 받게 된 묘한 계기 속에 꿈결에 오 동장께서 나타났으니 참으로 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근무지를 옮긴 후! 신접살림을 만석동 “한국중공업“ 사택에서 시작했는데 바로 아래 마을의 쪽방촌에 오동장의 집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적어도 동장이라는 분이 그곳에서 거처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그분의 성품상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셔서 몇몇 직원만 알고 지내고 말았다,
나와 두 번째 근무를 함께 하고 난 몇 년뒤! 명예롭게 떠나시는 정년 퇴임식장에서 뵙고는 소식을 모른 채 이십 년이 지나 간 지금까지 잊고 지내고 있다가 옛날 사진 속에서 추억을 회상하며 그분을 다시 그려 보고 있다. 터부룩한 수염과, 공초 오 상순 못지않게 뿜어 내는 담배 연기 속에 가족보다도 어려운 이웃을 더 애틋해하는 따뜻한 정을 품고, 늘 점퍼 차림으로 동네를 살피던 오 동장의 소탈한 면면이 세상의 소금이 되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2011 - 8 - 7
정년퇴직하는 오 동장님 [오른쪽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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