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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클래식 & 크로스오버

도둑맞은 사진

김현관- 그루터기 2023. 3. 1. 08:24

도둑맞은 사진

 2012년 세계 음악계에서 '도둑맞은 사진'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논란의 대상은 작곡가 말러의 흑백사진입니다. 이 사진에는 말러 자신이 교향곡 2번 <부활>의 악보 일부를 자필로 적어놓아서 역사적 가치가 크지요. 말러가 191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 뉴욕으로 떠나기 직전에 후배 작곡가인 쇤베르크에게 우정의 징표로 이 사진을 선물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 사진이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최근 작곡가 알반 베르크 제자의 후손 집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스스로 대학생이자 응급실 요원이라고 밝힌 클리프 프레이저는 문제의 사진에 대해 "할아버지인 에이브러햄 프레이저가 알반 베르크의 제자에게 직접 선물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반면 쇤베르크의 후손들은 1980년대에 도둑맞은 사진이라면서 격분하고 있지요. 장물인지, 선물인지가 논란의 핵심입니다.

 이 논란이 흥미로운 건,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음악사의 변화가 사진의 행적에도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후기낭만주의의 고봉인 말러는 후배인 쇤베르크가 조성의 근간을 뒤흔드는 실험을 꿈꿀 때조차 말리기보다는 물심양면으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청년 시절 무명에 가까웠던 쇤베르크에게 작품 발표 기회를 준 것도 말러입니다. 쇤베르크 역시 말러를 '친애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존경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쇤베르크가 조성의 질서를 허물고 자필로 교향곡 악보 일부를 적어놓은 말러 사진. 무조음악으로 본격적으로 나가기 이전의 정화된 밤 같은 초기 작품에는 말러의 후기낭만주의적 정취가 흠씬 묻어나지요. 말러가 쇤베르크에게 선물했다고 하는 사진은 이들 선후배 간 따뜻한 우익의 징표인 셈입니다.

 이 사진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한 쇤베르크의 딸 누리아는 20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급진적 좌파 작곡가인 루이지 노노의 아내입니다. 누리아와 루이지 노노가 처음 만났던 곳도 쇤베르크 사후에 초연된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초연 현장이었지요. 장인을 추모하는 음악회에서 미래의 사위는 아내와 사랑을 꽃피운 셈입니다.

 한편 편지를 정당하게 입수했다고 주장하는 프레이저의 할아버지 역시 쇤베르크를 사사했던 알반 베르크의 제자에게 작곡을 배웠다고 합니다. 넓게 보아 쇤베르크의 후학인 셈입니다. 이 논쟁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쇤베르크가 20세기 음악사에 얼마나 길고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쇤베르크의 딸 누리아는 1980년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사진이 사라진 빈 액자를 발견한 뒤 도난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지요. 반면 프레이저의 후손은 할아버지가 알반 베르크의 제자에게 정당하게 선물받은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프레이저의 손자는 "나는 말러와 쇤베르크의 음악을 즐기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성공적이지 못했다. 나는 그들 음악의 팬은 아니다”라고 말해서 감정싸움으로도 번졌습니다.

 사진을 주고받았던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이들 주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20세기 서양음악사에서 말러와 쇤베르크가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이 사진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프레이저의 집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빈의 쇤베르크 기념관이 아닐까 합니다. '프레이저 집안 기증'이라는 작은 팻말이라도 사진에 붙여놓으면 양쪽 집안의 화해라는 점에서 더욱 멋질 것 같네요.  스마트 클래식 100 김 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