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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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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이야기

조동성-일본 가쓰라 자매 묘기시범 장안의 회제

김현관- 그루터기 2023. 4. 28. 00:35

조동성-일본 가쓰라 자매 묘기시범 장안의 회제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7:28

일본 가쓰라 자매 묘기시범 장안의 회제

1930년대부터 우리 당구계가 본격 개화기에 들었는데 바로 이 해 벽두에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일본의 당구명문 가쓰라가() 자매의 내한 시범경기였다. 이들의 한국 방문은 단순한 친선 목적 이상으로 이 땅 당구 보급의 일대 기폭제였고 또 외국 당구인으로서는 첫 손님인데다 남성 아닌 여성들이었다는 점에서 시대의 센세이션이 됐다.

이 여류 당구인은 언니 가쓰라 마사꼬(桂正子·당시 21)와 동생 노리꼬(典子·18)로 형부인 고오바시(高橋)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와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두 자매 당구인의 직접적인 내한 이유는 당시 경성에 있던 일인 경영 일승정당구장이 일본의 유명 당구대 메이커 스가누마(管沼) 제작회사의 국내 판매망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묘기시범을 통한 사세 확장이 우선적인 노림이었으나 이런 상술 목적 이상으로 스포츠 당구의 전통 진수를 보여 준 쾌거였다.

두 여류의 실력은 당시 일본내 최고봉. 그러나 이런 실력보다는 당구명가로서 가쓰라 집안의 명성이 오히려 더 높았다. 이 가쓰라가가 언제부터 당구를 계승해 온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여하튼 수대에 걸쳐 당구명가로서 이름을 떨쳐 왔고 이 명가를 기린 가쓰라배 쟁탈전은 오늘날에도 일본 아마추어 당구계의 최고 권위 대회가 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도쿄역 앞의 옛 본거지이던 가쓰라구락부가 지금은 종합 레크리에이션 클럽으로 현대화됐지만 여전히 전통 당구장의 명성을 자부하고 있다.

또 그 당시 두 처제를 인솔했던 고오바시씨는 한때 일본빌리아드협회의 이사로서 집안의 뼈대를 그대로 지켜 왔다.

여기서 두 자매 당구가족의 면모를 잠시 소개하면 언니인 마사꼬는 훗날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신의 대관식에 초청했을 만큼 세계적 명사가 됐으며 그때 모인 각국 선수들과의 친선경기에서 당당히 우승함으로써 일본 여성의 미와 기()를 한꺼번에 떨치게 되었다. 1940년에는 1만점을 한 큐에 끝낸 최초의 기록 보유자가 됐고, 이때 게임 소요시간은 2시간 40분으로 이 역시 기록적이었다. 이 외에도 일본 대표로서 세계 3쿠션 선수권 대회를 3차례씩이나 석권한 바 있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로는 언젠가 미국에서의 경기에서 미국 선수와 결승전 때였다. 자국 선수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연띤 분위기 속에서도 동양여인의 침착함을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게임을 리드해 나가자 참다 못한 한 열렬 청년이 일본 여성에게 지는 것은 미국의 수치라면서 일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동생 노리꼬도 실력면에서 언니와 한치 차 없는 맞수인데다 어린 귀여움에서 인기를 더했다. 전일본 선수권대회를 다년간 쟁패했으며 우리가 자랑하는 재일동포 당구왕 다까기(高木正治·한국명 尹春植)와도 1만점 게임 선수권을 번갈아 차지했을 정도다.

이들이 경성에서 가진 첫 번째 시범경기는 숙소였던 조선호텔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으나 당시 당구대 2대를 귀빈용으로 비치하고 있었다. 처음 마사꼬가 단큐에 15백점을 친 다음 3쿠션 15점을 13큐에 쳐내자 이어 등장한 동생 노리꼬가 똑같이 단 한 큐로 15백점을 치고 3쿠션은 10큐에 15점을 끝내 장내를 감탄시켰다.

이튿날은 장소를 옮겨 종로2가 중앙당구장에서 장안의 고점자들을 앞에 두고 묘기 중심으로 시범을 보였는데, 여기서도 두 자매는 15백점과 3구식 3백점을 단번에 끝내 초창기 우리 당구인들의 넋을 빼놓았다.

세 번째 시범은 일반관중을 위해 을지로2가의 황금구락부에서 열렸는데 이들의 재기(才技)를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로 전차길이 완전히 막혔고 급기야는 기마경찰들이 동원되는 소동을 벌였다.

이날 마지막 시범이 끝나고 국일관이 초청한 자리에서 한정식의 맛갈에 매료당한 두 자매는 주방장을 따로 불러내 여성답게 조리법을 메모한 것도 당시 한량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언니 마사꼬는 태평양전쟁 후 미 육군중령과 열애 끝에 결혼,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그간 전아메리칸 보크라인 선수권대회에서 몇 차례나 우승했다.

1989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간의 아시안 3쿠션 선수권대회장에도 참관, 필자와 만난 노리꼬 여사는 오랜만의 재회를 기뻐하면서 지금도 당구를 치고 있느냐는 질문에 당구는 남편 다음의 인생 반려자라면서 미국식 상업주의의 허슬러 당구 풍토를 개탄했었다. 이 가쓰라 집안 얘기를 하면서 나 개인적으로 꼭 한가지 전하고픈 것은 매사가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이다.

두 자매는 누구보다도 비극적 환경의 주인공들이었다. 조실부모한 탓에 어린 시절부터 형부인 고오바시가 양육을 전담했고 나이 어린 처제들에게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으로서 큐를 들게 했다고 한다.

기왕 시작한 것이면 철두철미, 완벽함을 기하는 게 일본인의 근성. 두 자매의 당구교습은 형벌이나 다름없게 혹독했다고 전한다. 한 예로 가준점수를 한 큐에 쳐내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았다는 고오바시의 실토다.

그 당시 두 자매의 라이벌로 아마다(天田章), 후지하라(藤原), 야마다(山田) 등 당구명인들이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이들과의 겨룸에서 나가떨어졌고 개중에는 대결을 기피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