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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성-1930년대엔 당구장은 전국으로 확산돼 본문
조동성-1930년대엔 당구장은 전국으로 확산돼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8:12
1930년대엔 당구장은 전국으로 확산돼
일제하에서 그들로부터 소개됐던 당구가 상류사회의 지식인층을 거쳐 급속도로 번져 가게 된 데는 당시 시대적 배경도 큰 원인이었다.
사람은 기본 의·식·주 외에도 생활의 윤활제로서 여흥, 즉 레크리에이션이 필요하다. 특히 그 시절은 주권을 탈취당했던 속민의 슬픔 속에 압제의 사슬까지 있고 보면 그 스트레스 강도는 극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욕구불만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문화시설은 거의 전무 상태나 다름 없었다. 기껏해서 동양극장의 눈물짜기 신파 연극이나, 이따금 찾아오는 곡마단의 재주 묘기 정도가 최고의 대중 오락이었다.
그러나 이런 공연장은 엄연히 주객이 따로 있어서 그야말로 구경일 뿐 직접 참여할 수는 없고 보니 호사꾼들에겐 한 말로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당시 부유층 사회에서 마작이 대유행을 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비록 안방놀음이긴 하나 스스로 참여하는 게임인데다 그 나름의 두뇌 회전이 주체성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당구의 출현은 안성맞춤의 쾌재였고 요즘 말로 화끈한 자극제였다.
게임의 건전성 외에도 고귀한 상아공을 굴린다는 멋까지 깃든데다 그 청아한 탁음은 고달픈 당시의 파열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학자·의사·예술가를 망라해 이른바 명사들이 주저없이 큐를 잡았는가 하면 유행에 민감한 멋쟁이 한량들도 이에 질세라 다투어 당구장을 찾았던 것이다.
1920년대 말께를 고비로 급작히 불어난 대중 당구장은 이윽고 30년대에 접어들자 본거지 종로통을 벗어나 4대문 쪽을 향해 곧장 세력을 펼쳐 갔고 그때까지 장안에만 국한됐던 것이 지방으로 전파됐다.
경성과 가장 가깝고 일인 왕래가 잦은 인천을 스타트로 항도 부산-대구-대전-청주-광주 등으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이 시기가 우리 당구사에선 가장 모범적인 한 세대였다.
스포츠로서 본연의 당구정신이 충만했으며 지도급 당구인들도 선도자로서 사명감을 다했던 시기였다.
이 30년대 초엽의 서울시내 이름난 당구장 몇 개를 꼽아 보면 한국인 경영 당구장으로는 반도구락부(당구장), 홍등, 자연장, 대경 등이고 진고개 일대의 일인 소유로는 낭화헌, 일승정, 어성, 기린, 동지 등으로 모두 20여 개소를 헤아렸다.
이들은 제각기 독특한 개성으로 단골 고객과 계층을 달리했는데, 우선 반도구락부는 영리보다 친목 클럽 성격에서 순수성이 빛났고 따라서 지식인 명사들이 주멤버였다.
홍등은 간판이 말하듯 다분히 유락장 분위기가 짙었는데 지금의 서린호텔 부근에 자리했으며 그 일대 다동, 서린동 등은 고급 요정들의 집결지구였고 따라서 화류가를 무대로 한 건달패들이 많이 출입했다.
대경은 그 주인의 명성이 오히려 더 높았던 당구장. 이 곳의 경영주인 임명선씨는 그 시대를 떨치던 쾌남아로 원래는 화가였으나 나중에 영화계로 진출해 상업미술 분야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서대문 근처 동양극장 맞은편에 있었던 자연장당구장은 그 당시 연예인들의 전용무대로 김승호, 남인수 등 연기자와 가수들의 공연시간 대기장소였다.
일인 당구장도 제각기 특색을 지니기는 마찬가지여서 일승정과 어성은 한국내 당구재료판매상들로 당구장 경영은 일종의 선전 창구였다.
따라서 한국의 당구 영업장들과 관계를 가졌고 거래상 한국인들의 출입이 많다 보니 사원 중에는 한국인도 많았는데 원로 당구인 박수복씨가 이 기업 당구장 출신이다.
명동2가 유네스코 자리에 위치했던 동지구락부는 일인촌의 최고 사교장으로 고점자들이 많이 애용했었다.
당시 국내 최고점자였던 다까끼(高木·5백점)와 변호사 하라(原·3백점)가 이 당구장의 양대 산맥이었다. 이들이 큐를 잡으면 이미 치고 있던 고객들도 일제히 게임을 중단한 채 관전에 몰두했었다고 한다.
당구장 분위기면에서 한국과 일인 영업장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당시 영업장은 대다수가 목조 건물로 똑같이 마루바닥이었으나 한국 쪽은 구두를 신은 채 출입한데 반해 일본인들은 실내화로 갈아신고 게임에 임했다.
이는 평소 양국민간의 관습상 차이겠으나 흙발보다는 구두를 벗는 쪽이 훨씬 깨끗하고 기품을 지녔다고 하겠다.
또 다른 상이점은 일인 당구장에선 게임 카운터로 미동(美童)을 고용한데 반해 한국 쪽은 16∼18세의 여자 계산원을 둬 당구장 내를 한층 부드럽게 했 다. 양가락 머리형에 복장은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여기다 버선발 고무신 차림은 이후 양장차림 ‘신식여자’의 첫 단계였던 것 같다.
이 당시 당구요금은 처음 7전보다 1전이 더 올라 8전. 요금 지불 방식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계가 필요없는 게임당 공동지불 방식이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4인 이내일 경우 7큐 내에 자기 점수를 완전히 쳤을 때 승자 한 사람을 제외하곤 나머지가 모두 똑같이 게임료를 내야 했다. 만약 5명 이상일 경우는 역시 7큐 내에 자기 점수를 치되 80%만 치면 완전히 자기 점수를 소화한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이 때도 승자 한 사람만 그냥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등수에 관계없이 규정된 게임료를 물어야 했다. 지금의 꼴지 한 사람에게만 부담시키는 요금 지불과는 엄청난 차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점자가 하점자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형태의 현재 방식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된다. 게임은 스스로 즐겨서 참여하는 것이니 마땅히 게임료도 스스로 즐긴 만큼 지불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남의 돈으로 즐거움을 사는 방식은 민주적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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