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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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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이야기

조동성-귀족풍에서 서민풍으로 옮겨 온 당구

김현관- 그루터기 2023. 4. 28. 00:39

조동성-귀족풍에서 서민풍으로 옮겨 온 당구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9:32

귀족풍에서 서민풍으로 옮겨 온 당구

우리 당구가 황실의 궁중놀이로서 시작됐음은 그것이 정도(正道)의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원래 빌리아드는 전통 신사도 정신의 실내 스포츠이다. 이 귀족형 사교정신이야말로 당구가 지닌 남다른 매력이자 근본 바탕이기도 하다. 지금의 현대 당구장에서 느껴지는 일부 지나친 유희성 내지 그릇된 사행성과는 전혀 격조를 달리했다.

이를 위해 잠시 빌리아드의 기원을 더듬어 보는 것도 좋겠다. 당구가 언제부터 생겨났는가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당구인은 물론이고 사학자들간에도 많은 설전을 벌였다. 혹자는 BC 6세기까지 거슬러올라 스키치아의 철학자 아나칼시스가 그리스를 여행했을 때 유사한 경기를 봤다는 기록을 남겨 그 기원을 어림잡는가 하면, 또다른 견해 중에는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시민경기에서 유래를 찾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설도 확실한 증빙자료가 없고 보니 모두 추측론에 불과하다. 뿐더러 이 같은 고대사회의 기원설에 대해 1885년 프랑스의 역사가 자크 본홈은 신랄한 풍자로서 그 허구성을 추궁해 항간을 웃기게 했다.

만약 빌리아드가 로마 시대의 산물이라면 호레이스 같은 대시인이 이를 읊조리지 않았을리 없을 것이며, 이런 재미있는 게임이 있었다면 폭군 네로가 방화에서 즐거움을 찾았겠는가

당구가 보다 스포츠로서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는 이처럼 그 근원이 모호한 점도 한 원인일 것이다.

또 다른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문명의 근원국과 이에 질세라 오리엔트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 등이 저마다 당구 발상지의 영광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 국가적 영광 다툼은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나타나지 않아 아직까지 역시 안개속이다.

한때 어원적으로 을 뜻하는 Bille라는 말을 문제해결의 열쇠라고 보아 라틴어의 발원을 열심히 탐색했지만 어학자들만 골탕 먹인 채 끝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기원이 애매모호한 당구가 역사상의 확실한 문헌 속에 등장한 것은 1617세기 때였다.

1591년 에드먼드 스펜서의 저서에서 소개된 이래 1598년에 나온 문호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는 빌리아드 경기가 본격 인용됐고, 그 후 1637년 벤 존슨, 1755년 사무엘 존슨이 각각 사전 속에 빌리아드란 낱말을 정식으로 수록했다.

이 시기에서 당구가 상류 귀족사회의 절대 사랑을 받았음을 말해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1576년 스코틀랜드의 메어리 여왕이 강금 당했을 때의 기록이다.

이때 여왕은 자신의 애용물이던 당구대가 철거된 것을 몹시 슬퍼해 측근에게 이를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쪽의 문헌에는 1694년 부르군디공() 부인이 지금의 큐대와는 다소 모양이 다른 메이스로써 상아공을 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전해진다. 그러나 전성기는 17세기 중반 이후 루이 14세 때로 보여진다. 당시 유럽 최고의 봉건군주였던 그는 절대 권력자답게 유흥면에서도 호화의 극치를 치달렸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그가 이 고급 놀이를 등한시할 리 없었을 것이며 거의 매일 만찬 후에는 귀족들과 어울려 큐대를 잡았다고 한다.

이상으로 미루어 당초부터 당구는 서민층보다 귀족의식에서 발전됐고 그런 기품이 당연히 지켜지는 데서 빌리아드의 아름다움이 깃든다. 유럽권의 영국, 프랑스 등 전통 빌리아드국들은 이런 점이 흔들림 없이 계승돼 오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대중성격 분위기는 다시 언급하겠지만 다분히 미국풍의 영향 탓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상업당구장의 최초는 진고개거리의 일인 경영 파주정이 었으나 보다 일반보급의 선도역은 역시 일인 아하라(阿原捨次郞) 소유의 志賀之家(지하지가)구락부였다.

지금의 명동 2가 사보이호텔 부근에 자리했던 이 당구장은 파주정보다 한발 늦게 개장했으나 시설(당구대 3)이나 분위기 면에서 훨씬 서민적이었고 한국인들의 출입도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는 경영주인 아하라가 지식층 출신에 인간미도 풍부해 친근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인데 그는 8.15 해방까지 경성당구조합장으로 이 땅의 당구 보급에 또 다른 견인차였다.

이 밖에 순전히 일인들만의 출입장으로서 현 신세계백화점 뒤쪽에 아사히()구락부가 있었고 파주정」「지하지가와 함께 이들 세 당구장이 1920년대 초엽 초창기 당구를 엮었던 일선현장들이었다. 이때만 해도 영업장보다 순수사교장 성격이 짙었고 한국인들의 출입도 극소수 특권층이나 일부 신식 교육층에 국한됐었다.

간간이 종로통의 유명 포목점 양복점 요식업장 등 호상(豪商)들이 끼어들긴 했으나 별로 환영받는 고객이 못됐다니 당시 당구장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겠다.

정확하진 않으나 이때 초창기의 요금은 한 사람당 5전 정도였고 화폐가치로는 1전이면 성냥 3갑이나 굵은 엿 한 가락을 살 수 있었다니 상당히 비싼 폭이었다고 하겠다. 지금과 다른 점 가운데는 당구대마다 15세 전후의 소년이 붙어 게임 보기와 점수기록을 전담했으며 요금 계산식도 승자만을 제외하고 게임 참가자 전원이 균등 지불하게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