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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조동성-첫 영업장은 임정호가 개업한 「무궁헌」 본문

당구이야기

조동성-첫 영업장은 임정호가 개업한 「무궁헌」

김현관- 그루터기 2023. 4. 28. 00:38

조동성-첫 영업장은 임정호가 개업한 무궁헌

知識 ,知慧 ,生活/당구에 대하여 2009-08-27 15:18:53

첫 영업장은 임정호가 개업한 무궁헌

처음 궁궐내 어용놀이로서, 다음 일본인들의 사교구락부로 소개되기 시작한 당구대가 우리네 영업장으로 나타나기는 1924년 와세다 대학 출신의 인텔리겐차 임정호(林政鎬)씨가 현 조흥은행 맞은편 광교통거리에 세운 무궁헌(無窮軒)당구장이었다.

이 한국 최초의 우리 당구장은 허름한 목조 건물 2층에 당구대 2대의 빈약한 시설이었지만 기품과 격조에선 그때까지의 일인 당구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당시 식민 압제하의 억눌린 민족감정은 무엇 하나 왜놈들에게 처질 수가 없었고 이런 경쟁의식은 일종의 반항 컴플렉스였다고도 하겠다.

우선 무궁헌이란 이름부터 나라꽃을 상징해 자주의식을 담았던 것이다. 실제 이 무궁헌당구장은 암암리에 학생운동 연락처로서 이용됐다. 이미 말했듯이 초창기 당구인은 거의 모두가 상류층의 젊은 엘리트들이었고 당시 엘리트라면 전문학생이나 동경 유학생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이 당구장을 비밀 아지트로 삼게 됐음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당구장은 위락시설인만큼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운데다 그만큼 당국의 감시도 약했기 때문이다. 이때 무궁헌당구장에 자주 얼굴을 비쳤던 명사 중에는 윤치호, 유진오 두 분 선생도 끼어 있었다. 물론 당구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곳에 나타나는 동창이나 선후배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사실이 들통나서 연락책이었던 김효근씨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약 2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맘때쯤 서울에만 국한돼 그 숫자도 한두 개를 헤아리던 순수 우리 당구장이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무궁헌당구장이 개장된 지 1년 후인 1925년께부터였다. 주로 종로1, 2가를 중심으로 인사동, 낙원동 일대가 본거지를 이뤘는데 동아(2) 중앙(4) 테이라(1) 등이 선두 그룹이었다.

특기할 사실은 포켓 당구대가 동아에 맨처음 설치돼 인기를 모았던 점이다. 차츰 상업당구장이 안착됨에 따라 고객층도 다양화를 보여 사각모의 최고 지식층 외에도 포목상, 양복점, 요식업체 등 호상(豪商)들과 일제하 작위 집안의 귀족 자제들도 어울렸는데 이색 인물 중에는 이완용과 박영효의 손자도 끼어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두 귀공자는 실력도 만만치않아 150점대의 고점자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구한말 역사에 오점을 찍은 장본인으로 이른바을사오적(乙巳五賊)’의 으뜸 인물이다. 그의 후손이라면 상당한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만한데도 당자의 인품이 이를 용훼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고 오히려 그 세련된 매너가 주위의 선망을 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초기 보급단계 우리 당구장을 즐겨 찾고 게임 품격을 높였던 선배 당구인들의 모습을 꼽아 보면, 우선 당구가족이었던 음악가 홍난파씨 일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 난파 선생은 종로3가에서 바이얼린 강습소를 열고 있었고 그 옆에 종로당구장이 자리해 퇴근 후면 대포집을 찾기에 앞서 먼저 큐대부터 잡아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고 한다.

선생의 당구 실력은 120(오늘날의 300점대)으로 적수가 흔치 않았다고. 그런데 친조카인 두 형제가 그에 못지않은 당구팬들이었다. 이분들은 모두 의사로서 형 재유씨는 안과, 동생 사유씨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그 이후 재유씨가 제천에 옮겨 감으로써 형제가 떨어졌으나 당시는 모두 종로통의 명문 개업의였다. 숙부인 난파선생을 필두로 형제분이 똑같이 당구에 심취해 그야말로 당구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재유씨는 셋 중에서도 가장 열성파였던 것 같다. 얼마나 당구를 좋아했던지 아예 당구장에 살다시피 했고 이 때문에 급한 환자가 있을 때는 간호원이 달려와 밀쳐내야만 마지못해 큐대를 놓았다고 한다.

원로 영화감독 안종화씨와 그 시대의 최고 스크린 액터 나운규씨도 빼지 못할 당구인으로 실력은 각각 60(2백점)40점의 보통 수준이었다. 특히 나운규씨는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했는데, 당구대에서도 시종 침묵 일색이어서 그와 한번 상대한 사람은 그 엄숙함에 질려 다시 어울리기를 기피했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저명 당구인과는 달리 순수 당구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고점자들로는 서정원·김효근씨 등이 있었고 이들의 점수는 3백점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점이었다.

참고로 이때 국내 최고점자는 후구도꾸(福德) 무진회사 사원이던 일본인 다까끼(高木)로 그의 점수는 5백점이었다.

또 다른 고점자를 몇 사람 소개한다면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씨와 명월관 대표 이시우씨로 이들은 어떤 면에서 보이지 않게 우리 당구 발전의 간접 지원자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제력이 월등한 데서 이 고급 사교장의 재정적 후원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월관 대표 이시우씨의 당구 점수는 2백점대로 수준급 게임에는 으례 내기가 따르게 마련이고 이씨는 산해진미에다 기생까지 거느리고 보니 풍류한량들에게는 안성맞춤의 내기 상대였다. 여기에다 이씨 자신도 놀이판의 낭만이라면 녹록지 않은 품성이라 당구장 내의 그의 인기는 불문가지. 한판 승부에 명월관 파티로 이어졌음도 흔히 있는 일이었을 테니 그의 호방함이 이를 물리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기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간에 그는 이 선심 파티를 즐겨 감수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