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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세계의 유명합창단 본문
세계의 유명합창단
1. Westminster Cathedral Choir(웨스턴민스터 대성당 합창단)
전통과 권위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합창단이 100년 넘게 전통을 만들어 나온 것은 고집과 집요함,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에 있다. 이러한 원동력을 꾸준히 이어왔기에 오늘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대성당과 합창단의 역사는 건축가인 벤틀리와 본 추기경, 첫 번째 오르가니스트이자 음악감독이었던 리처드 루치먼 테러 사이의 비현실적인 협력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895년 벤틀리에 의해서 비잔틴 양식의 공사가 시작되었고 1903년 건물의 외곽이 완성되었다. 현재 이성당의 음악감독인 제임스 오도넬은 “본 추기경의 의도는 성인 남자와 소년들로 구성된 전문합창단에 의해서 로마 카톨릭의 예전과도 부합되면서도 영국 교회의 합창 전통과 부합하는 합창 미사곡이 매일 연주되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건물이 완성되기 1년 전인 1902년에 첫 번째 합창단이 새로운 합창 학교에 입학해 훈련을 시작했다. 이들은 이 기간 동안 60개의 미사곡과 100개가 넘는 모테트를 레퍼토리로 준비했다. 따라서 이들은 예전(禮典)과 음악에서 미사나 성무일과에서 로마 카톨릭의 모든 예식을 따르는 대성당으로서의 중심 자리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연주 레퍼토리는 로마 카톨릭적이면서도 동시에 영국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명제가 있었다.
1924년 루치먼 테러가 은퇴하고 다소 능력이 떨어진 음악가들이 맡았다가 1947년 조지 말콤이 나타나 다시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1960년대는 콜린 모비가 음악감독을 맡았다. 현재의 음악감독은 오도넬이다. 그는 레퍼토리에서 스페인 포르투갈, 혹은 멕시코의 음악과 심지어 뒤프레, 뒤리플레, 풀랑크, 위도르, 비에른 등과 같은 20세기 프랑스 작곡가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은 때로는 던져 버리고 새로 만들어져 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서 오늘의 웨스트민스터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합창 소리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어른 카운터테너와 소년알토를 사용하는 것이다. 소년 성가대의 조직과 제도가 이 합창단의 시작과 함께 하는 것이다.
2. Robert Shaw(로버트 쇼 합창단)
흔히들 로버트 쇼 합창단을 미국 합창음악의 자존심으로 부르는데 있어 누구도 주저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95년 1월 25일 미국인들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 로버트 쇼를 잃었다.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글리 클럽의 단원으로 시작하여 미국 최고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합창에서 가장 미국적인 영역을 개척한 사람이었다. 영국이나 독일처럼 합창 전통이 세워져 있지 않은 곳에서 미국적인 합창 테크닉을 개발한 것이다.
로버트 쇼는 1916년 4월 30일 캘리포니아에서 복음주의적인 목회자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글리 클럽 지휘자로 성공하면서 직업음악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1941년 뉴욕에서 대학합창단을 구성했는데 그는 자신의 신념대로 인종을 구별하지 않고 단원으로 받아 들였다. 창단 2년 만에 로버트 쇼는 전미 작곡가와 지휘자 협회가 추천하는 미국 최고의 합창지휘자가 되었다.
이런 걸출한 지휘자가 탄생한 배경은 다름 아닌 2차 세계 대전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지휘자가 나타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마침 1937년 미국에 망명하여 머물고 있던 아르투르 토스카니니가 1940년대 중반에 뉴욕의 한 연주장 리허설에서 로버트 쇼를 발견하고는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이 찾던 합창지휘자라고 선언하게 된다.
1948년에 창단된 로버트 쇼 코랄은 이후 토스카니니의 모든 연주와 레코딩을 도맡게 된다. 1945년 9월 카네기 홀에서의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은 토스카니니와의 첫 연주였다. 이후 베르디의 <레퀴엠>은 전설적인 명반으로 남아 있다.
로버트 쇼는 1966년에 해산되었다. 그의 합창은 정확성, 정교함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 로버트 쇼는 생전에 음악계의 오스카 상으로 불리는 그래미상을 무려 14번이나 받았다. 그의 레퍼토리는 미국 성가의 영가에서부터 시마노프스키의 <스타바트 마테르>에 이르기 까지 매우 광범위 했다. 1950년대부터 오케스트라를 지휘, 1953년에는 샌디에고 심포니, 1967년에는 애틀란타 심포니를 지휘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는 애틀란타 심포니 코러스를 창단했다. 로버트 쇼의 삶은 한마디로 음악에의 전적인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세계로 누구든 데려 갈수 있었고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
3.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Amsterdam Baroque Choir)
세계 음악사에서 네덜란드의 벨기에가 차지하는 음악적 비중은 참으로 크다. 플랑드르 악파. 또는 네덜란드 악파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엔 '악파'란 말을 쓰지 않고 연대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지만 세계 음악사의 흐름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 악파인 것이다.
이같은 배경 탓인지 세계 음악계에서 우뚝 서있는 음악가 가운데는 네덜란드, 벨기에 등 플랑드르 지역 출신들이 많다. 특히 원전음악 분야에서 음악가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돈 쿠프만(Don Koopuman)은 기악 출신으로 자신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창단해서 세계적인 명문 앙상블을 만들었다.
쿠프만은 1944년 네덜란드의 즈블레에서 태어났다. 1954년 10세 때부터 클래식 음악의 기초를 공부한 그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음악을 공부했다. 그의 주된 음악적 관심은 고음악의 재창조, 즉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원전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되 역사학적, 음향학적 고증을 거친 방식으로 연주하는 '원전연주'에 관한 철저한 연구에 있다.
훌륭한 스승과 함께 음악의 이론적 기초를 닦은 그는 오르가니스트이자 하프시코드 연주 주자로 활동했다. 그리고는 1966년 29대 초반에 자신의 생애에 첫 바로크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훈련과 학습을 겸한 활동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했다. 1979년 그는 여러 나라 고음악 전문가들을 단원으로 영입하여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거점으로 40년을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연주, 지휘, 학문적 연구 등을 포함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1992년에는 암스테르담 바로크 합창단을 만들었다. 1992년 데뷔해 비버의 <레퀴엠>(15명)과 <저녁 기도>(32명)를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맨체스터 가디언과 공동으로 10년에 걸쳐 90장의 레코딩 프로젝트를 2004년에 완성했다.
그의 탁월한 역량이 바로크 음악의 연주와 레코딩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는 객원 지휘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건반, 합창, 실내악, 오케스트라에서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4. 볼쇼이 합창단(Bolshoi Chorus)
1928년 창단된 볼쇼이합창단은 러시아 합창의 거장 알레산드로 스베쉬니코프에 의해 창단되었다. 이 탁월한 합창단은 그 동안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홀, 뉴욕의 링컨 센터, 파리의 퐁피두 센터, 런던의 바지컨 센터 등 세계 유수의 극장에서 공연하여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활동 영역은 60여 개국 130여 개 도시에서 이루어졌고 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간 볼쇼이를 이끈 지휘자는 몇 차례 바뀌었다. 1935년부터 1950년까지는 쿠비킨이, 1950년부터 1983년 까지는 모스크바국립음악원 교수였던 클라우디 치자가, 그리고 1983년 이후 지금까지는 그의 제자였던 루드밀라 예르마코바가 이 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볼쇼이 합창단은 당초 창단 목적대로 러시아 민요와 고전음악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그들의 레퍼토리는 러시아 음악에만 한정되지 않고 고전음악,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에서부터 현대 레퍼토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대음악을 다루고 있다. 오라토리오, 칸타타, 아카펠라, 오페라 등 엄숙한 종교음악에서 대중적 감흥이 넘치는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수 천 곡을 불러왔다, 그들의 레퍼토리는 5천여 곡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들을 그들의 음성을 통해 최초로 소개되었는가 하면 러시아의 탁월한 지휘자 및 성악가들은 그들과 많은 공연을 갖기도 했다.
이를 테면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쉬게드린, 하차투리안 등 근대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들의 많은 작품들은 볼쇼이 합창단에 의해 초연된 것이 많으며 스베틀라노프 같은 거장은 볼쇼이 합창단을 기용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기 때문에 함께 공연하는 일이 잦았다.
또 니콜라이 겟다 등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성악가들도 볼쇼이 합창단과 공연해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도 볼쇼이합창단의 노래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볼쇼이합창단은 러시아 최고의 합창단이다. 이 뛰어난 음악가들과 동시대에서 일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생애 최고의 기쁨이자 영광이다”라고 찬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노래는 원초적이면서도 투박한 감성을 바탕으로 씌어진 민요조차도 격정적인 감정의 토로보다 격조 높은 형식으로 재현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예르마코바와 함께 1988년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에 초청되었고 1994년, 그리고 1999년 ‘서울국제음악제’에도 초청되어 내한 연주를 가는 등 우리와도 친숙한 합창단이다.
5. 레드아미 코러스(Red Star Red Army Chours)
레드아미 코러스는 러시아 3대 합창단 중의 하나로 불린다. 우리는 레드아미 코러스를 이미 CD나 영화를 통해서 여러 번 접해왔다. 냉전시대의 긴장을 재조명한 숀 코네리 주연의 영화 <붉은 10월>에서 잠수함이 웅장한 출항을 할 때 배경음악이었던 굵직하고 아련한 목소리는 레드스타 레드아미 코러스의 'Oh, My Field', 'Polyushka', 'Polye' 이다. 또한 군가하면 쉽게 떠오르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곡도 레드스타 레드아미 코러스가 불렀던 이 원곡이다.
레드스타 레드아미 코러스는 1977년, 로켓부대 소속으로 구 소련의 각 지역의 대중음악과 정열적인 군가 등을 통해 군인의 사기를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창단되었다. 소련의 붕괴 조짐이 시작된 1985년 이후부터는 러시아에서 벗어나 활동 무대를 프랑스, 스위스, 영국, 아일랜드, 벨기에는 물론 미국과 캐나다 등 아메리카 대륙과 중국,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등지로 넓히기 시작했다. 특히 1992년부터 2002년에는 미국에까지 진출하여 링컨 센터, 케네디 센터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가졌다. 1996년의 경우 미국에서만 20개의 주, 49개 도시의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음악회를 열었고, 1994년에는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 러시아 대통령 옐친의 만찬행사에 초청되었다. 그 이후로도 레드스타 레드아미 코러스는 러시아의 각 도시와 해외 공연을 포함하여 1년에 150여 회 이상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현역군인으로서 최고의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러시아 공훈 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러시아가 사랑하고 스탈린이 가장 아꼈다는 레드아미 코러스는 보드카처럼 뜨겁고 강렬하다. 때로는 대중적인 레퍼토리로 부드러운 음색을 선보인다. 그들이 공연했던 곳마다 하나같이 찬사를 받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선언 이후, 붉은 군대는 많은 수가 해체되었고 그 흐름을 따라 붉은 군대 합창단도 쇠퇴되어 갔다. 이제 러시아에 남아있는 유일한 레드스타 레드아미 코러스는 정통성과 현대적 감각의 적절한 균형으로 러시아의 깊이 있는 울림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총 예술감독 겸 지휘자는 우크라이나 출생의 아나톨리 바잘킨이고 합창 지휘자는 니콜라이 라보브스키이다,
6. 필리핀 마드리갈싱어즈(Philippine Madrigal Singers)
필리핀 마드리갈싱어즈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세계합창제에서다, 이들의 한국 연주는 합창계에 신선한 충격이었고 이들의 장기인 아카펠라로 인해 국내에서 아카펠라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0년 이들의 첫 한국 연주는 국내의 합창계에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으며 국내합창단의 질적 향상과 아카펠라 음악의 국내 붐을 일으키었다.
이들은 국내의 언론으로부터 “가장 음악적 호소력이 강한 합창단”, “마닐라에서 온 위대한 예술의 표본” 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우리들이 흔히 무시하는, 동남아시아의 미개발 국가라고 생각되던 필리핀의 작은 합창단에 대해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의 까다로운 평론가들의 입에서 “유럽 수준을 훨씬 넘어선 합창” 이라는 격찬을 흘러나오게 하는 이들의 저력은 무엇일까? 이들의 공연을 한번이라도 접해본 사람이라면, 또는 앞으로 이들의 노래를 접하게 될 사람이라면, 이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1963년, 당시 국립필리핀대학 성악과 교수였던 안드레아 베네라시온 교수에 의해서 창단된 필리핀 마드리갈싱어즈는 국립 필리핀대학의 재학생과 그 동문들로 구성된 합창단이다. 창단이후 필리핀 마드리갈싱어즈는 필리핀 내 합창 발전의 일등공신 역할을 감당해왔다. 이들 동문들을 통해 필리핀에 수백 개의 합창단이 탄생했으며 이들은 필리핀 합창 발전의 실제적인 젖줄이 되고 있다.
이 합창단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체 합창 페스티벌인 ‘The MADZ Et Al’.을 매년 개최하고 있고, 1996년에는 베네라시온 교수의 눈물겨운 노력과 헌신으로 필리핀 합창연합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 합창단이 높은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전 세계를 무대로 연주여행을 적극적으로 갖는 것 외에도 실력향상을 위한 노력과 홍보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합창 작곡가와 편곡자 군단을 대거 양성하고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군단을 통해 이들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다양하고 좋은 곡들을 합창으로 편곡하고 또 새로운 합창곡을 위임 받아 실제적인 연주와 더불어 출판함으로써 그들의 레퍼토리를 끊임없이 확장해나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상을 휩쓸었고 가장 훌륭한 합창단으로 칭송되는 것 자체만으로 독특한 이 합창단은 프랑스 투르에서 열린 ‘유럽 합창 경연대회’에서 영예의 그랑프리를 차지하였고,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유럽의 주요음악 단체 및 언론사 음악전문 기자단이 선정하는 ‘골든 디스크상’을 수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각종 합창대회에서 줄곧 모든 상을 거머쥐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들이 만드는 음악의 위대성으로 인하여 그들은 국제 합창계에서 최고의 합창단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전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과 올림픽의 기념음악제에 단골로 초청됨으로써 “합창으로 전 세계를 정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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