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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은수저 본문

사람들의 사는이야기

은수저

김현관- 그루터기 2024. 2. 25. 00:14

은수저

생겨난 지 얼마 안 되면서도 빈번히 쓰이는 낱말이 있다.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이 그것이다. 계층적인 갈등을 은연중에 부추기거나 시사하는 듯한 혐의가 없지 않지만, 남의 것을 빌려오지 않고 우리가 만들어 쓰는 말이라 별 거부감은 없어 보인다. 본래 있던 '은수저에서 유추해 만들어낸 말인데 정작 은수저는 쓰이는 법이 거의 없다.

금을 보관해 두는 방식으로 금도끼나 금수저를 만들어 골방에 비장해 두었는지는 모르지만 금수저를 상에 놓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숟가락은 독극물을 밝혀내는 구실도 있고 해서 왕실을 비롯해 부잣집에서 애지중지하였다. 물론 있는 집에서는 평소에도 은수저를 어른들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린이의 경우엔 다르다. 큰 부자가 아닌 경우에는 아이들 생일날 같은 때 선물처럼 마련해두었다가 명일날 같은 때 상에 올려놓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래에 적은 김광균의 은수저는 돌날이나 생일날 마련해준 은수저를 통해서 참척의 슬픔을 적고 있다. 심상한 필치이지만 깊은 슬픔을 내장하고 있다.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우리에게 친숙한 귀금속 가운데서 금 다음으로 은이 무겁다. 황금빛이나. 은빛이나 모두 좋은 빛깔이다. 그래서 예부터 숭상을 받아왔다. 금가락지 다음으로 은가락지가 있었고 금장도와 은장도가 있었다. 금배와 은배가 있었고 금실과 은실도 있었다. 금발과 은발은 그러나 오래된 것이 아니고 영어 blond의 번역어로서의 금발이 생긴 후 은발이 따라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전엔. 백발로써 족했을 것이다.

멀리 고대 그리스에서나 동아시아에서나 금과 은의 자리매김은 동일하였다. 은이 들어간 어사 중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은하수이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에서 은한은 은하수다. 본시 한은 한수 한 자로 양자강의 지류를 가리키지만 그 자체로 은하수의 뜻도 가지고 있다. 거기에. 한 자씩을 더해서 은한이나 천한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일본어에서는. 은하를 아마노가와()라 하는데 천한天漢을 번역한 셈이다. 우리가 은한이라 한 것과 대조가 되는데 소리와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은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서 영국이 패권을 잡기 이전, 유럽의 강국은 스페인이었다. 1452년 신대륙 발견 이후 일찌감치 멕시코와 페루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혹사시켜 은광에서 은을 채취하고 그것이 스페인의 정치적·군사적 부상의 하부구조가 되었다. 모든 은광에서 나는 수입의 5분의 1은자동적으로 스페인 왕실로 갔다.

유럽인 상륙 이전의 잉카문명이나 마야문명은 쇠망의 길을 간다. 잉카제국의 주민들은 금은 태양신의 땀이요 은은 달 여신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신화를 현실로 믿는 부족은 멸망하게 마련이란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달 여신의 눈물을 정련하는 데는 수은을 사용하는데 원주민이 그 일을 맡았음은 물론이다. 수은중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금은보화에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참한 잔혹사가 깔려 있다.

두 번에 걸쳐 실패한 일본정복 시도 때 원나라는 고려에 감당할 수 없는 수효의 병선 건조를 강요하였다. 그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원은 무시로 금과 은, , 인삼의 상납을 요구하였다. 원나라 조정에 바치는 이른바 공녀 그쪽 귀족이나 고관이 요구하는 여성, 기타 집단적 혼인을 시킬 신부를 구하기 위해 고려에서는 결혼도감結婚都監,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과 같은부서까지 두어야 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명나라와의 예물 교환이 무역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고는 하나 강자와 약자 사이에 수평적 관계가 성립되기는 어렵다. 조선조에서 보낸 예물은 금은, 마필, 인삼, 표범 가죽,모시, 자개그릇 등이었는데 역시 금은이 으뜸가는 것이었다. 금은의 확보가 어려워 국내 채굴을 독촉하고 금은의 유출 금지와 사용 제한을 실시했으나 확보할 길이 막연하였다. 본국의 소산이 아니란 이유를 들어 명에 면제를 지속적으로 간청하였고 세종 11년에야 면제받게 되었다.

조선조 말 은의 국내 생산지로 알려진 곳은 단천, 교하, 곡성, 춘천, 공주 등이었다. 학교에서 이러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국민들의 오늘 이해에 큰 장애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빛과 함께 그늘도 제대로 가르쳐야 건강한 현실인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개인이나 공동체나 빛과 그늘을 아울러 갖고 있는 것이 세상사요 인간사이다. 너는 금수저에 악마이고 나는 흙수저에 천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은 인간 희극의 압권이다.  - 사라지는 말들 - 유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