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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여행으로 돌아가다 / 김영하 본문

사람들의 사는이야기

여행으로 돌아가다 / 김영하

김현관- 그루터기 2024. 3. 7. 18:53

 여행으로 돌아가다 / 김영하

대영제국이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시절. 케냐 총독이 한 원주민 젊은이에게 케임브리지대학에서유학할 기회를 주었다. 이 젊은이는 마사이 족장의 아들로총독은 그 총명함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들을 영국에 보낸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지만 족장에게는 아들이 많았고,그중 하나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의 명문대에 보내 신학문을배우고 신문물을 익히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기에족장은 총독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유학을 마치고케냐로 돌아왔을 때, 젊은이는 크게 당황했다. 자기 부족을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 년 전 부족이 머물던 곳에 가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늘 그랬듯이 소떼를 끌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던 것이다. 유목민인 그들에게는 고향이라는 개념이 없다. 마사이족의 삶은 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소가 뜯어먹을 풀이 부족해지면 소떼를 몰고 다른 곳으로이동한다. 그는 사자와 하이에나, 기린들이 오가는 사바나를 헤매며 자기 부족을 찾아다녔다.

몇 달간의 필사적인 탐문과 추적 끝에 그는 귀에 익은 반가운 방울소리를 듣게 되었다. 마사이족은 멀리서 방울소리만 듣고도 자신들의 소떼를 단박에 가려낼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방울소리를 향해 달렸고 소떼와 함께 야영 중인 가족과 친척들을 만났다. 아들의 고생담을 들은 족장은 동정은커녕 크게 탄식했다. 아니,영국까지 가서 도대체 뭘 배우고 왔단 말인가? 배우기는커녕 바보가 다 되어 돌아왔구나. 자기 부족도 못 찾아오는 천치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마사이족으로 산다는 것은 삶이 항구적인 여행 상태라는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똑똑함이란 소떼를 먹일풀이 어디에 무성한지를 알아내는 능력이다. 행여 낙오하더라도 소떼가 남긴 흔적만 보고도 단박에 부족의 행방을 알아내고 따라잡는 재능이다. 지구상의 온갖 오지를 다 탐험한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들이 축적해놓은 지식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돌아올 지점이 어딘지를 분명히 알고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돌아올 곳,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곳, 내 집과 내 물건이 있는 곳은 여정이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여행의 원점. 여행이 실패하거나 큰 곤란을 겪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베이스캠프. 그곳에서 우리는 피해를 복구하고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사이족의 청년은 달랐다. 여행의 목적지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오히려 고향이 유동적이었다. 육중한 돌로 지어진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수백 년 동안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아마 청년의 손자가 죽을 때까지도 어디론가 옮겨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온 곳. 그의 부족은 늘 이동 중이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삶인 이들에게 여행이란 과연 무엇일까? (중략)

생각해 본다.고향으로 돌아간 그 마사이족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처음엔 분명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떠나기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에 조금 놀랐을 것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이제 더이상 당연하지 않다. 귀환의 원점은 겨우 찾았지만 그 자신이 이미 변화했기 때문에 원점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족장의 말처럼 그는 어떤 능력을 상실했다. 마사이족으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재능을. 그 대가로 그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부족은 언제나처럼 소떼를 몰고 유목을 계속하겠지만 청년은 다시 한번 자기만의 여행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알게 된 것이다. 사는 곳을 옮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여행은 유목이나 이주가 아니라는 것을. - 김영하 산문 - 여행의 이유 中

아마도 그는 다시 떠났을 것이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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