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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까따르 행진곡 (단편소설/이 남수) 본문

친구들이야기

까따르 행진곡 (단편소설/이 남수)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20. 12:10

까따르 행진곡

 굳이 바닷가로 나가지 않고서도 모텔 방 안에서 편안하게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다. 스마트 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깬 이진수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가기 전에 소형 냉장고에서 물병 하나를 꺼내 커피포트에 가득 붇고 스위치를 올려 두었다.

연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짓날 새벽 다섯 시, 울산 앞바다의 일출은 한국에서 제일 빠른 편이지만, 창밖으로 펼쳐져있는 어두운 바다는 아직 낮 가리는 검은고양이처럼 숨죽이고 가만히 웅크려 있었다. 이진수는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는 커피믹스 두 봉지를 한꺼번에 큼직한 머그컵에 털어 넣고서 뜨거워진 물을 듬뿍 따랐다. 실내의 전등을 모두 내리고, 옷장에 비치되어 있던 흰색 면 타월 가운을 걸치고서 해변으로 향한 베란다로 나와, 준비되어 있는 커다란 대나무 안락의자에 편안히 기대앉았다.

밤새 바다를 숨차게 달려온 태양의 붉은 기운이 수평선을 따라 조심조심 번져나갔다. 이진수는 진한 커피 향을 한껏 들이마시면서, 오늘따라 더욱 검붉고 농밀하게 물들어가고 있는 동해바다에 무아지경 매혹되었다. 마침내 말간 태양이 이글거리며 몸서리를 치듯 바다를 박차고 불쑥 떠올랐다. 장쾌한 일출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도 새로운 각오로 벅차게 두근거렸다. 이번 공사는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이다.

방으로 돌아와 오늘 예정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다시 꼼꼼하게 검토한 이진수는, 미리 계산해 두었던 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모텔을 나섰다. 큰 길 쪽으로 나오니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가게에는 손님들이 꽤 북적이고 있었다. 식당 벽에, 숙취를 확실히 풀어드립니다 라는 광고 문구를 보고 콩나물 해장국을 주문하였다. 어제 오후 UV CURING GRP(자외선 경화방식 합성수지) 실제모형 테스트(MOCKUP TEST)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저녁 시간에는 테스트에 참관했던 두 명의 외국인 감독관들을 데리고 맛 집으로 꽤나 유명하다는 일식집에서 가볍게 한잔을 한다는 것이, 싱싱한 안주 체면을 좀 세워주다 보니 그만 상당한 폭음을 하였던 것이다

식당 벽 높이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에서는 아침 뉴스를 알리는 앵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간밤에도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줄줄이 터져 있었고, 경제가 전례 없이 어려워지고 있다, 북한에서 또 다시 새로운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정치인들의 몰염치와 부패가 도를 넘었다는 등, 갖가지 뉴스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H중공업 정문에 도착하여 까다로운 출입절차를 무사히 마치니, 프로젝트 공무팀 김영호 차장이 정문까지 직접 나와서 그를 안내해 주었다. 본관 건물 삼층 대회의실에는 이미 공무팀 직원들이 회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는 H중공업이 심혈을 기울여 수행 중인 카타르 P GTL 프로젝트 보온공사를 위한 KICK OFF MEETING(공사수행계획 발표회)이 예정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에서 차지하는 보온공사의 비중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H중공업 현장소장은 물론이고, 마침 다른 회의 참석차 한국에 체류 중이던 JV(조인트 벤처) 치요다의 현장소장과, PMC(프로젝트 관리회사) 책임 디렉터까지 참여하는 중요한 회의이다. 그리고 오늘의 발표자는 바로 보온공사 시공을 맡은 신금기업의 기술이사 이진수 소장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기본 기술시방은 유명한 석유그룹 쉘의 스펙이었는데, 대부분 네덜란드 보온협회가 출간한 보온핸드북 CINI의 내용을 채택하고 있었다. 한국기업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엄격한 기준이었다. 견적단계에서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이진수는, 엄청난 분량의 스펙과 CINI 내용을 숙지하느라고, 지난 몇 달간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사용되는 자재들도 일반 공사와는 다르게, 상식을 뛰어넘는 높은 수준이 요구되고 있었다. 특히 몇 가지 시공방법들은 세계적으로도 처음 시도되는 새로운 공법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보냉 외장재로 지정된 UV CURING GRP라는 자재는 종전에는 들어보지 못하던 새로운 형태의 자재였다. 생산자도 극히 제한적이었을 뿐 아니라, 엔지니어링 단계에서부터 오직 하나의 영국회사만이 적합한 생산자로 추천되어 있었다. 물론 문구상으로는 같은 물질특성을 가진 자재의 경우 PMC의 승인을 거쳐 사용할 수 있다고 적혀 있기는 하였지만, 그간의 예로 보았을 때, 그것은 형식적인 립 서비스에 불과한 것으로, 추천된 회사제품 이외의 자재를 사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정제품의 생산자가 엔지니어링 회사에 로비하여 사전에 자기들 제품을 공사 스펙에 노골적으로 명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유럽의 회사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돕는 강력한 카르텔의 한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특별한 이 자재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영국 생산업체의 조언을 받아들인 H중공업에서는, 현재 동일 자재를 시공 중이라는 D건설의 사할린현장을 방문하여 벤치마킹을 하기로 하였다. 새해가 막 시작된 한겨울에, H중공업 공무요원과 신금기업의 현장소장, 공사부장이 사할린현장으로 급파되었다. 북극의 성난 칼바람이 귀를 생으로 베어내는 것만 같은 사할린현장에는 눈이 무릎 높이 넘게 쌓여 있었다.

이 제품의 특성은 자외선을 받으면 바로 경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모든 제작공정은 햇빛이 완전히 차단된 밀폐공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뿌연 먼지와 독한 화공약품 악취 속에, 침침한 백열전구 아래서 작업해야하는 근로자들은 반드시 큼직한 보안경과 우주괴물처럼 보이는 방독면을 착용해야만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작업이다 보니 작업효율은 형편없이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 제품은 주로 해변에 건설되는 석유화학공장의 환경특성을 감안하여, 강한 자외선으로 인한 외장재의 조기 노화현상을 방지하고, 특히 바닷새들의 독한 배설물과 부리 쪼임 같은 고질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하여 금속제품을 대체하려고 유럽에서 개발된 제품인데, 국제특허문제가 걸려 있어서 세계적으로 생산 가능한 업체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스펙에는 오직 하나의 제조사 이름만이 추천되어 있으니, 이 경우는 거의 독점공급 조건이라고 보아야 하는 고약한 상황이었다.

이진수는 사할린현장 방문의 경험을 통해서 GRP제품이 가진 문제들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어떻게든 이 자재를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개선안을 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국내에 돌아온 즉시 비슷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A화학의 제품개발담당자에게 연락하여 필요한 물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A화학에서 보내온 제품의 물질특성데이터를 비교해 보았더니, 영국회사의 제품과 비교해서 전혀 손색없는 수치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이진수는 상세한 협의를 위해서 A화학을 찾아가 실제 제품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가 예상한 대로 A화학에는 제작과 시공방법은 다소 다르지만, 스펙에서 요구하는 물질특성수치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이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 현재는 주로 LNG 냉동운반선 설비의 보냉 외장재로 사용되고 있는데, 분명히 GTL 현장에서도 무리 없이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진수는 즉시 상세한 보고서를 준비하고, 근거서류를 첨부하여 발주처인 H중공업 품질담당자에게 이메일로 전송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담당자는 다른 화급한 현장지원업무로 너무나 바빠서 보고서를 제대로 읽어 보지도 못하였다. 그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이진수는 직접 전화를 걸어 진행상황을 파악해보았다. 그러나 담당자로부터 돌아온 것은, 지금 파악 중이니 기다리라는 다소 짜증스러운 대답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두 주를 더 기다렸으나, 결국 그로부터는 아무런 회신도 오지 않았다. 이진수는 전보다 좀 더 보강한 보고서를 먼저 신금기업 최고경영자들에게 보고하여 충분히 이해를 구한 후, 강력한 공문을 H중공업 GTL공사 현장소장 박광식 상무 앞으로 전송하였다. 공문을 접수한 박 상무는 크게 진노하여 즉시 관련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책임 소재를 놓고 실무 담당자들 간에 다소간의 갈등과 진통이 있기는 했지만, 그 회의를 통해서 H중공업과 신금기업의 관련자가 함께 참여하는 TF 팀이 구성되었고, 영국 제조사의 GRP 제품을 대체할 수 있는 국산제품의 개발과 PMC 승인 과정을 신속하게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진수는 국산제품 개발과 실제모형 테스트 준비를 책임지게 되었고, H중공업의 품질담당자는 PMC JV 치요다의 품질 엔지니어들을 테스트에 참관시키고, 테스트가 성공되었을 경우 PMC로부터 사용승인을 받아내는 업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진수는 A화학의 제품개발팀과 협조하여, 시공 방식은 다르지만, 모든 부분에서 영국사의 제품보다 오히려 우수한 제품을 개발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바로 어제 오후 울산의 한 공장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엔지니어링회사 수석 엔지니어와 치요다 사의 보온 스페셜리스트 오타상이 참관한 가운데, 실제모형 테스트가 실시되었고 매우 의미 있는 결과를 확보하였다. 비용 면에서도 월등한 경쟁력이 있을 뿐 아니라, 작업성이 좋아서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고, 시방서에서 요구하는 모든 물질특성수치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진행되는 회의에는 JV의 현장소장들과 PMC 책임 디렉터도 함께 참석하였다. H중공업 공사 관련자들과 신금기업 경영진까지 참석한 회의실은 긴장과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브라인드를 내리고 조명을 모두 끈 회의실 전면에 대형 프로젝터 화면을 띄워놓고서, 약 이십여 분에 걸친 프레젠테이션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진수는 유창한 영어로, 그동안 열정을 다해 준비해온 자료들을 유감없이 발표하였다. 그러면서도 너무 딱딱한 내용 때문에 분위기가 경색되지 않도록 가벼운 유머를 섞어 참석자들의 웃음을 유도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발표가 끝나자 JV 소장들로부터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진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데이터와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명쾌하게 답변하였다. 특히 어제 울산에서 진행되었던 UV CURING GRP의 실제모형 테스트에 대해서도 충분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자세히 설명하였고, 이번 공사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서 PMC와 엔지니어링회사의 신속한 승인이 필요함을 각별히 강조해 두었다.

요란한 박수 소리와 함께 KICK OFF MEETING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H중공업 현장소장 박광식 상무가 이진수에게 다가와 손을 힘차게 잡으면서 치하해 주었고, PMC 책임 디렉터와 JV 치요다 현장소장도 만족스런 표정으로 악수를 청하였다.

오랜만에 주말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한 이진수는, 월요일 아침 일찍 합정역 사거리 근처 신금기업 본사로 출근하였다. 이제 정말 본격적인 카타르 P GTL 프로젝트라는 치열한 사막의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선발대가 현장으로 출발하였고, 본사 공사 지원 부서에서는 현장에 필요한 장비와 자재들을 속속 선적하였다. 그러나 H중공업 품질담당자가 진행하던 UV CURING GRP 대체품 승인 결과는 깜깜 무소식 이었다. 이진수도 화급한 하루하루의 업무에 몰두하다 보니, 그만 지속적인 점검을 놓치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무심한 세월은 소리 없이 잘도 달려가고 있었다.

공사 준비로 밤낮없이 분주하던 즈음에, PMC와 치요다의 긴급요청에 따라, 이진수는 치요다 본사가 위치한 일본 요코하마로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다. 이번 출장의 주요업무는 보온작업에 필요한 스펙의 확실한 이해와 작업절차서 준비, 그리고 계약사항 중 상호 불일치하는 사항들에 대한 우선순위 결정 등이었다. 요코하마의 날씨는 서울에 비해 훨씬 무겁고 더웠다. 나릿타 공항에는 이진수 보다 일주일 먼저 입국하여 업무를 보고 있던 H중공업 공무팀 김영호 차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미 저녁 시간이 되었기에, 두 사람은 짐표가 그대로 붙어있는 여행 가방을 끌고서 복잡한 지하철을 타고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김차장이 주로 이용한다는 숙소 옆 식당은 앙증맞다할 만큼 작았다. 주문한 도시락이 테이블 위에 놓였는데, 적갈색 네모반듯한 나무식판 위에 여러 음식을 조금씩 올려놓은 모습이 마치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일본 관광을 나섰던 한국인 가족이 식당에서 고추냉이를 더 요구했다가 큰 봉변을 당했다는 황당한 뉴스로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김차장은 먼저 입국한 선배로서, 자기 자신도 다른 선배들로부터 들은 몇 가지 기본 주의사항을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전달해 주었다. 일본인 업무 파트너들과 이야기 나눌 때, 가능하면 양국 사이에 쟁점이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라든지, 독도 영유권 문제 같은 민감한 주제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효과적인 업무처리를 위해서 현명한 처세일거라는 조언이었다.

정말 일본이라는 나라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미덕이라는 초등교육의 영향으로, 겉으로만 보기에는 속없이 너무나도 친절해서, 어떤 일이든 아무 문제없이 그저 잘 풀려갈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직접 상대를 해 보면, 친절한 것과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것 사이에는 실로 엄청나게 큰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절대로 자기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오만한 마음을 감추고 진실을 호도하는 위선적인 민족 집단이기주의는 정말 위험천만하고 비 인륜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비록 두 나라가 여러 문제로 이렇게 많은 갈등관계에 있기는 하였지만, 해외건설현장에서는 서로 협조하여 공사를 추진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일본이 한국보다 자본과 엔지니어링 부문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국 업체의 입장에서는 일본 업체의 지지와 협조가 필요한 경우가 더 많았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한국 업체가 중국이나 다른 동남아 국가들 보다는 비용 면에서 조금 불리하지만, 기술이나 품질 수준, 스케줄 엄수 등에 있어서는 월등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공사 수행을 위해서는 한국 업체와의 협조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이렇게 상호간의 필요가 일치하면서 사실상 가장 유리한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었지만, 두 나라 사이에는 여전히 불행했던 과거사 문제를 비롯하여 알 수 없는 시기심과 경쟁심리가 있었기 때문에, 현장 일선에서 부딪혀가며 함께 일해야 하는 기술자들의 입장은 서로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 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동료로서 함께 무언가를 같이 해야만 할 때에는, 마치 그런 갈등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고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저 일밖에 모르는 순진무구한 엔지니어인 냥 행세하며, 양국 사이에 민감한 사안들은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고 모르는 체 하는 것을 당연한 기본적인 예의로 여겼다. 너무나도 갑갑하고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진수는 치요다의 여러 부서를 찾아다니면서 매일 많은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일본인들은 한국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어 발음이 썩 좋은 편이 아니어서 영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외국인과 대화를 할 때에는 상당히 위축된 모습을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이진수는 꽤 능숙한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일을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었다. 요코하마에서의 촘촘했던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귀국 하루 전에는 그간 상당히 친해진 보온 스페셜리스트 오타상의 안내로 시내 관광을 하였다. 일본은 나라 자체는 분명히 부자였지만, 국민 개개인의 생활만 놓고 본다면 한국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일본인들의 친절함과 근면, 검소함은 분명히 배울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출장을 끝내고 서울 사무실에 출근하여 전체적인 공사 현황을 점검해 보니, 무엇보다 UV CURING GRP와 관련된 업무들이 아무런 진척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국산화로 대체되지 못할 경우에는 영국으로부터 카타르로 직접 수입해야 하는데, 생산과 선적, 해상운송과 통관기간까지 계산해 보니, 이미 시간이 매우 촉박한 상태였다. 더구나 이 자재는 반드시 현장에서 제품생산자의 실무교육에 참여하고 자격증을 받은 작업자만이 시공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도저히 구매를 늦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진수는 즉시 영국의 GRP 제조사 영업팀에 연락하여, 급히 그들이 재고로 보유하고 있는 최대물량을 첫 번째 오더로 주문하고, 한편으로는 자재의 현장 도착일정에 맞추어 현장교육이 즉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육계획수립을 지시하였다.

현장에서 전송되어오는 작업일보와 각 종 보고서에는 현장운영에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H중공업의 현장담당자는 공정진행에 문제가 많다면서, 이진수 소장의 조속한 부임을 계속 독촉하였다. 아직 처리되지 못한 구매업무는 본사의 공사 지원 부서에 모두 위임하고, 이진수는 일단 현장부임을 서두르기로 결정하였다.

팔월의 카타르는 절대 폭군, 태양만이 호령하는 사막과 황무지의 나라였다. 한 낮의 온도가 섭씨 오십 도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페르시안 걸프 해안을 끼고 건설된 현대적인 인공도시, 수도 도하의 신도시에는 엄청난 돈의 위력이 만들어낸 기기묘묘한 빌딩들이 마치 세계건물전시회를 열기라도 하는 듯 하늘을 찌르며 눈부신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공항에는 신금기업 관리부장이 인도인 기사가 운전하는 검정색 싼타페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카타르는 한국의 경기도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였지만, 천연가스 매장량이 세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풍부한 나라이다. 최근에는 천연가스 상태로 수출하지 않고, GTL이라는 새로운 공법을 통해 액화상태로 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더욱 큰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도하에서 북쪽으로 팔십여 킬로미터에 위치한 라스라판 산업공단은 면적이 사천오백 헥타아르(약 천삼백육십만 평)에 이르고, 그 안에는 여러 개의 발전소와 담수화 공장을 비롯해서, 많은 정유공장들과 원유체취공장, 천연가스 액화공장, 비료공장, 석유화학공장들이 즐비하였으며, 향후 들어설 공장들을 위해 비워둔 거대한 용지들도 구획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가히 사막 위의 대제국이 건설되고 있었다.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가장 핵심적인 산업단지인 만큼, 무장한 군인과 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공단 정문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을 철저히 검문하고 있었다.

현장은 기능직 부족부터, 장비 부족, 자재 부족, 자금 부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이진수는 일단 H중공업 현장소장에게 부임신고를 하고, 보온현장사무실에서 신금기업 전체 한국인 직원들을 긴급회의로 소집하였다. 여러 문제점들이 거론되었는데, 가장 심각한 것은 삼국인 기능 인력 문제인 것으로 집약되었다. 공사 초기부터 태국에서 백여 명의 인력들이 들어왔지만, 기대보다 기술수준이 낮은 작업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사전제작 작업장과 설치현장에서는 기능이라고는 거의 없는 작업자들에게 작업방법을 일일이 가르쳐 가면서 공사를 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태국과 미얀마에서 들어온 작업자들은 기본적인 언어소통조차 되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이진수는 자신의 방으로 부서장들을 불러 모았다. 아내가 정성껏 싸준 오징어포를 안주삼아, 관리부장이 가져온 위스키를 한 잔씩 나누면서, 앞으로의 개선방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사부장은 태국과 미얀마에 출장을 가서라도 우수한 인력을 직접 뽑아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지 인력공급업체에서 보내온 서류에만 의지해서 선발하다 보니, 도무지 기능 수준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진수는 태국과 미얀마 인력업체에 미리 요청하여, 우수한 기능 인력들을 삼배 수 이상으로 모집시켜 놓고, 공사부장이 현지에 직접 가서 기능테스트와 면담을 진행할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을 관리부장에게 지시하였다.

다음날부터 이진수 소장은 현장의 문제들을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새벽부터 현장으로 나가 하루를 시작하였다. 작업 전에 모두 함께하는 국민보건체조와 공구함 간이미팅, 반장들의 작업지시 현장도 관찰하였다.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고 열심히 쫒아 다니다 보니, 현장 구조와 위치도 익숙해지면서 차츰 해결책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사흘 후 이진수는 다시 직원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현장을 돌면서 파악한 문제점들을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어차피 검은 깃발이 올라가는 한 낮에는 너무 더워서 그늘 아래서 대기하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없으니, 그 시간에 차라리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에서, 약간의 다과와 음료를 제공하면서, 직무교육과 쉬운 영어 소통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로 되어있는 검사절차서와 작업절차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교육해서 반장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실제로 교육을 시작하고 소통의 시간을 늘려가다 보니, 직원들 상호간 업무에 대한 이해와 협조도 많이 개선되고, 작업자들도 차츰 한국 반장들에게 마음을 열고 인간적으로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진수는 내친 김에 작업표준을 요약한 핸드북을 준비하여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조금씩이나마 현장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영국에서 GRP 일차물량이 도착하고, 실습교육을 위하여 두 명의 기술자들이 현장을 방문하였다. 나흘짜리 교육일정에 이소장은 본인도 교육에 직접 참석하면서 통역 역할까지 자임하였다. 질기고 두툼한 국방색 천막으로 허름하게 지어진 GRP 사전제작 가설 작업장은 자외선을 철저히 차단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백열등을 켜두지 않으면 어두워서 실내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백 제곱미터가 넘는 실내에 에어컨을 가동하기도 어려워서, 작업장 내 여러 곳에 대형 스텐드 선풍기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먼지와 화공약품 냄새 때문에 커다란 보안경과 방독면까지 쓰고서 하는 작업은 더디기만 하였다. 나흘간의 교육이 끝나고 이십 명의 작업자에게 모양만은 꽤 그럴듯한 자격증을 수여한 영국 제조사 교육 팀은 자기네들끼리 축배를 부딪치고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이진수는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이렇게 느린 작업 효율을 가지고서는 방대한 량의 현장작업물량을 주어진 기간 내에 결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이진수는 H중공업 품질담당자를 찾아가 GRP 국산화 대체품의 PMC 승인 진행현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담당자는 PMC로부터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PMC 담당자를 직접 찾아가 물었더니 엔지니어링사로부터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어차피 승인은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니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빈정대는 소리도 들려왔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접촉해 들어가야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태국에서 직접 면접을 거쳐 새로 들어온 기능 인력들은 다행히 기능 수준이 우수한 편이었다. 네팔인 작업자 중에서도 영어가 가능한 일꾼들이 더러 들어와서 현장 언어소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GRP 외장재 제작 효율이 너무 저조하다는 것 이외에는, 어느 정도 현장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차츰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제삼 공구의 시공을 맡은 인도 회사에서 인명사고가 발생되면서, 전 현장의 안전관리 수준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진수 소장 자신도 매일 아침 무거운 개인안전장구를 짊어지고 두 시간 이상씩 작업현장을 점검하고 다녀야 했다. 수은주가 오십 도를 넘는 불볕더위 속에 삼사십 미터 높이에 있는 베셀 작업현장을 오르내리는 일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전쟁이라도 치르듯 한바탕 순찰을 돌고나면, 온 몸에서 흐른 땀으로 작업복은 늘 흠뻑 젖어 버렸다. 이진수는 소장실 벽면을 돌아가며 가득 붙어 있는 자세한 공정별 작업 진행현황을 들여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요란한 무전기 호출음이 귀를 때렸다. H중공업 품질담당자의 호출이었다. 긴급히 논의할 문제가 있으니 지금 당장 PMC 제이 회의실로 급히 와 달라는 것이다. 이진수는 불안한 마음으로 PMC 본부 건물을 향해 한걸음에 달려갔다. 회의실에는 JV 양사와 PMC의 품질담당자들과 검사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PMC 검사관은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프로젝터에 걸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화면을 띄었다. 화면에는 이번 주 신금기업에서 작업을 마친 대형 베셀의 보냉작업 모습이 올라와 있었다. 보냉재와 외장재가 서로 견고하게 붙어 있지 못하고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더구나 시방서에서 허용되지 않은 접착제가 사용되어, 제대로 굳지도 않은 채 두껍게 발라져 있었다. 이진수는 사진들을 이메일로 전송해 줄 것을 요청한 후, 본인이 직접 현장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명일 중으로 결과보고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보고된 내용으로만 보았을 때는 신금기업의 실수임이 거의 명백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즉시 공사부장과 품질부장을 호출하였다. 그들도 이미 PMC 검사관의 지적사항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지난주와 지지난 주에는 금일 지적된 베셀과 똑 같은 형태인 두 기의 베셀들이 아무 이상 없이 검사 통과되어 검사서류에 오케이 사인을 모두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검사 지적된 베셀도, 대부분의 다른 검사 부위들은 이미 적합함으로 검사가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지적된 베셀 작업현장으로 올라가 문제의 부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보통 그동안의 PMC 검사는 작업이 완료된 후에 진행하기 때문에, 그들이 검사를 할 때는 외장을 뜯어보지 않고서는 사실상 내부에 상태가 어떤지, 어떤 자재를 사용하였는지 알기 어렵게 되어 있었는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작업하는 중간에 PMC 검사관이 현장 점검을 나왔고, 마침 시방서에 없는 수상한 접착제로 작업하고 있는 현장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이진수는 일단 공사를 전면 중단시키고 작업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지시한 후 사무실로 돌아왔다.

공사부장의 보고에 의하면, UV CURING GRP 전용 접착제의 재고가 많이 부족한 것을 알게 된 경험이 아주 많은 한국인 베테랑 반장님 한 분이, 자신의 오랜 경험을 믿고 스펙에서 허용되지 않은 일반 접착제를 작업자들에게 내어주고 작업을 지시했는데, 첫 번째 베셀 검사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PMC 검사가 통과되자, 보고도 없이 계속해서 무리하게 사용하다가 이와 같은 초대형 사고를 치게 된 것이었다. 베셀 세 기의 작업면적만 해도 자그마치 이천 제곱미터가 넘었고, 만약 보냉재까지 모두 철거하고 다시 작업해야 한다면 백만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추가경비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진수는 관리부장과 품질담당자를 대동하고 지난주 이미 검사 통과되었다는 베셀들이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보았다. 외관만 보아서는 매끈하게 마무리가 되어, 일부러 뜯어보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냥 모르는 체 한다 하더라도, PMC 측에서 자신들이 이미 검사 승인까지 한 마당에 굳이 다시 뜯어보자고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관리부장은 이미 검사승인 완료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예상되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면 손해가 너무 커서 현장예산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사무실에 돌아온 이진수는 관리부장을 돌려보내고 홀로 자리에 앉아 깊은 시름에 잠겼다. 품질측면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세 기 모두 뜯어내고 재작업을 하는 것이 백번 옳은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비용이 정말이지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을 무시하고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마이너스 백육십오 도에 이르는 가혹한 운전 조건의 시운전 중에라도 문제가 터져 나오게 된다면, 그 때는 그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한 시간여를 꼼짝도 않고 깊이 고민하던 이진수는 마침내 마음의 결심을 내렸다. 전화기를 들고 신금기업 오성주 사장의 스마트 폰 번호를 눌렀다. 한국은 이미 밤 열한시가 넘었을 시간이었다.

늦은 시간에 이진수 소장의 긴급전화보고를 받은 오성주 사장은, 손실 예상금액이 상당히 큰 것에 매우 부담을 느끼기는 했지만, 현장 모든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현장소장이 소신을 가지고 추진해 나갈 것을 다시 한 번 강력히 위임해 주었다. 질책과 비난, 책임 추궁 대신에 격려와 재신임으로 용기를 준 최고경영자와 회사에 대해서 이진수는 더욱 큰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곧 퇴근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이진수는 서둘러 개인안전장구를 착용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혼자 문제의 베셀로 다시 올라갔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을 오르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안전조끼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청심환을 꺼내 반쪽으로 잘라 입에 넣고 씹으면서, 그는 서두르지 않고 심호흡을 하고서 천천히 철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막 끝으로 펼쳐진 광대한 지평선으로 빛을 잃어가는 창백한 태양이 검붉은 석양 속으로 서서히 침몰해 가고 있었다.

베셀 꼭대기까지 힘겹게 올라가 보니, 뜻밖에도 PMC 책임 디렉터 미스터 프렛쳐가 홀로 앉아 백발의 머리카락을 드러낸 채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의 만남에 살짝 당황하였지만,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후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프렛쳐는 오랜만에 현장에 혼자 나와 보았는데, 조금 지쳐서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진수는 얼른 주머니에서 청심환 하나를 꺼내어 환의 효능에 대해 설명을 하고 그에게 건네주고는, 혹시나 그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자신은 남겨 두었던 나머지 반개의 청심환을 꺼내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프렛쳐도 즐거운 표정으로 기꺼이 청심환을 받아먹었다. 그들은 공사 진행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오늘 발생된 신금기업의 보냉작업 불량 문제에 대해서는 그도 이미 보고를 받은 모양이었다. 이진수는 불량발생에 대해서 정중히 사과하고, 가능한 조속히 확실하게 해결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PMC의 적극적인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진지하게 호소하였다. 프렛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힘닿는 대로 도와줄 것이니,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서류를 준비해서 내일 일찍 자신의 사무실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이진수는 숙소에서 노트북을 꺼내 놓고 늦은 시간까지 미스터 프렛쳐에게 보고할 자료들을 준비하였다. 프렛쳐는 프랑스계 영국인으로 이번 공사를 위한 PMC의 책임 디렉터로서, 현장 내의 모든 공사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당히 까다롭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사실 보온공정을 책임지고 있는 협력사의 소장 정도가 개인적으로 만나기는 쉽지 않은, 현장 최고 실세였던 것이다. 이진수는 피곤이 몰려와 쏟아지는 잠을 참기 어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해서 정성껏 보고서를 준비하였다. PMC 검사에서 불량 지적된 베셀은 해당 검사부위뿐 아니라 이미 검사 승인된 부분도 해체하여 재검사한 후, 만약 같은 문제가 발견된다면 전체를 모두 철거하고 재시공을 하겠다고 기술하였다. 또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히 있을 것으로 보이는 다른 두 기의 베셀들도 주요부위를 부분 해체 후 검사하고, 문제가 확인될 경우에는 모두 완전 해체하고 재시공을 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점으로 공급되는 영국산 UV CURING GRP의 불합리성과 저조한 생산효율 문제점들을 자세히 지적하고, 특히 이 제품의 한국산 대체품 승인의 비정상적인 지연에 대해서 강력히 개선을 요구하면서,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합리적인 조치가 급히 필요함을 거듭해서 강조하였다.

보고서를 준비하느라고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이진수 소장은, 사막의 적막한 밤하늘을 끊어내며 절규하는 모스크 새벽기도 마이크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밤새 준비한 서류들을 챙겨가지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베셀 세 기를 모두 뜯어내고 재시공을 하게 될 경우, 최소 이 주일 이상의 공정 지연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백만 달러가 넘는 경제적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지근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해서 차분히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세 기를 모두 뜯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조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집요하게 머리를 쳐들었다. 오늘 일단 PMC 책임 디렉터에게 공식적인 보고를 하고나면, 다시 번복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검사 완료된 두 기의 베셀들 역시 잘못 시공된 것이 너무나 명백하였다. 엔지니어의 양심을 속이고 어물쩍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에는,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책임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모두 뜯어내고 다시 시공을 한다면, 공기 지연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직접적인 자금손실만도 한화로 십억이 훌쩍 넘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식사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 사무실에 도착한 이진수는, 밤새 준비했던 문서들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필요한 관련 자료까지 첨부한다면 상당한 분량의 서류가 될 것이다. 신중에 신중을 더한 생각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이진수는 한국인의 자존심과 엔지니어의 명예를 택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보고서 끝 부분에, 만약 재시공을 하게 될 경우 발생 예상되는 공기지연과 추가코스트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언급해두었다. 보고서를 PDF 전환하여 출력하고, 서류에 직접 서명하였다.

PMC 책임 디렉터 미스터 프렛쳐는, 한국의 작은 하도업체 신금기업의 투철한 책임감과 이진수 소장의 진지한 용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이번 상황은 PMC측의 검사 실수도 있었고, 그 결과에 따라서 계속적인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기에, 주장하기에 따라서는 PMC에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 복잡한 문제였다. 더구나 그로 인한 재정적 손해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기에, 실수를 즉시 인정하는 솔직하고도 단호한 이진수의 보고서는 그를 진심으로 감동시켰다. 그는 이렇게 양심적인 하도업체에게 무언가 그들이 원하는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프렛쳐는 PMC 품질담당관에게 특별히 지시하여, 신금기업이 원하는 UV CURING GRP 대체품에 대한 실제모형 테스트를 현장에서 자신의 책임 하에 다시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소장의 긴급한 요청을 받은 한국의 A화학에서는 즉시 특별 전담팀을 구성하였고, 필요한 자재들을 소지하고 긴급히 현장으로 날아왔다.

이진수는 김동출 반장을 만나러 현장으로 내려갔다. 육십이 넘은 나이지만 다부진 체격의 김반장은,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근심스런 표정으로 작업자 휴게실에 움츠리고 앉아 줄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었다. 이소장은 이번 문제가 절대로 김반장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성심껏 설명해 주고,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전보다 더욱 열심히 함께 노력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소장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으면서, 얼굴을 숙이고 있던 김반장의 눈가에는 슬그머니 뜨거운 사나이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A화학의 현장 실제모형 테스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오픈되어 진행되었기 때문에, 현장 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게 되었다. 긴급히 필요한 자재들이 현장으로 공수되고, 곧 이어서 충분한 물량이 해양운송에 들어갔다. A화학 대체품의 최대 장점은 사전제작 작업장을 운영할 필요가 없이, 설치현장에서 직접 시공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김동출 반장은 자기를 인정해준 이소장이 너무 고마워서 몸을 아끼지 않고 죽을힘을 다하였다. 회사의 큰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작업자들도 자발적으로 오버타임을 자청하면서 잃어버린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분발해 주었다. 덕분에 모두 뜯어내고 다시 시공한 세 기의 베셀 보냉공사는 예정보다 절반의 시간 만에 완벽하게 재시공을 끝낼 수 있었다. 김반장은 기왕 준비된 사전제작 작업장을 활용하여, 규격별 형틀을 만들어서 FITTING류 외장을 사전에 미리 제작해 두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그 이후의 공사에서 대단히 혁신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나중에는 FITTING류 뿐 아니라 판재들도 설비의 곡률에 맞춰 미리 사전 제작하여 현장적용 하였고, 상상하기 어려운 작업 효율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A화학의 대체품은 가격 면에서도 영국 제품의 절반 정도 수준인 데다가, 김반장의 제안으로 작업효율을 크게 끌어 올리고 보니, 일전에 세 기 베셀 재작업으로 인해 발생되었던 손해를 완전히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본사 경영진에게서 승인받은 수익률도 당초 계획의 세 배 이상 달성하게 되었다. 마침내, 신금기업이 맡은 보온공정이 PMC로부터 품질과 공기 면에서 공구 내 최고업체로 평가받았다.

이제 이진수 소장은 현장 내의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H중공업에서 조차도 PMC 측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생기면 이소장을 찾아와 상의하고 조언을 구할 정도였다. 역경을 함께 극복하고 현장 내 최고업체가 된 신금기업의 모든 구성원들은, 소장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서 최우수업체로서의 명예를 계속 이어나갔다. 관리부서에서는 열심히 호응해준 우수한 삼국인 작업자들에 대한 인사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향후 해외의 다른 공사에서도 함께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산업 역군들이 열사의 땅에 뿌린 진한 땀방울과 함께 세월은 빠르게 흘러, 드디어 공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H중공업에서는 그간 이진수 소장의 노력을 높이 치하하여, 신금기업 대표이사에게 최우수 협력사 표창상패를 수여하였다. 현장까지 날아와 표창을 받은 오성주 사장은, 자신의 신뢰에 대해 커다란 공사성공으로 보답해 준 이진수 소장의 손을 굳게 잡으며 감사를 표하였다. 소소한 펀치작업만이 남은 상태에서, 이진수는 현장소장으로서의 모든 책임을 공사부장에게 위임하고, 뿌듯하고도 아쉬운 마음으로 본사에 복귀하게 되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조국의 산하가 너무나 아름답고 정겨웠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주일 간의 꿈같은 휴가를 마치고 본사로 복귀한 그의 사무실 방문 앞에는, 공사 지원 본부장 상무 이진수라는 새 명패가 선명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글쓴이 : 이 남수

         까따르 현장의 모래폭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