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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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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또 비가 옵니다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23. 12:16

또 비가 옵니다.

이제 그만 올 만도 한데, 염치도 없습니다. 어릴 적엔 비만 오면 문밖으로 뛰어 나가 얼굴을 하늘에 대고 말간 혓바닥을 내밀어 맑은 빗물을 받아먹으며 껑충 깡충 뛰어다녔습니다. 빗물은 눈을 적시고, 얼굴을 적시고, 옷을 적셔도 마음은 뽀송뽀송한 파랑하늘의 뭉게구름을 보고 있지요.

높은 철공장 담장 아래로 우산 셋이 걸어갑니다. 빨강 우산, 파랑 우산, 그리고 찢어진 형아 우산. 우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내 발아래에는 대접만 한 웅덩이에 빗물이 떨어지며 동그랗게 은물결이 쉼 없이 퍼집니다

조그만 고랑을 이루며 흐르는 빗물을 한 움큼 움켜쥐며 그냥 까르르 웃습니다. 분홍빛 손가락 사이로 졸졸졸 빠져나가는 금빛 빗물을 보면서 또 웃습니다.

황톳빛 진흙에도, 시커먼에 잿빛 흙더미에도, 비에 젖어 반짝이는 그 모습이 어린 눈과 마음에는 모두 이상하고 아름다운 장난감의 세계였습니다. 비가 온 후 공사장에는 노랑 모래가 아이들에게 손짓을 합니다.

 "얘들아! 어서 와.. 이리 와서 두꺼비 집 지으며 나랑 함께 놀자.."
"와~~"

 아이들은 우르르 뛰어가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세마대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다릅니다. 비 오기 전에는 이끼에 물든 초록색 물들이 " 조르르 " 흐르더니 비만 오면 투명한 약수가 " 솨~알~ 솨~알 솰~솰솰 " 흘러내립니다. 서랑 방죽으로 내려가는 개천의 물소리는 제각각입니다. 통신소 고개의 냇가소리는 종알종알 종알, 마을 어귀 다리 아래에는 조~올 졸졸, 배씨네 과수원 앞에는 깔깔깔, 서낭당 고갯길 앞에서는 소곤소곤, 그리고 방죽에는 갈대의 옷 갈아입는 사그락 소리뿐입니다. 아니 귀를 잘 기울이고 들으면 조그만 산새소리도 들리고 간혹 멀리서 들리는 매미소리도 들립니다.

나이 들어 오늘의 이 빗소리가 어릴 적 귀에 들리던 그 빗소리 같았으면, 그때 마음속과 닮게 들리고 바라보는 빗방울의 색깔도 그 마음으로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올해 여름에는 이 빗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리는 빗소리이기를 간절히 빌겠습니다.

2011 - 8 - 13 - 그루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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