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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고독한 발레리나

김현관- 그루터기 2023. 1. 14. 21:31

     

고독한 발레리나

65년 6월! 그날의 아침에는 유난스레 빨강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교실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지만 까만 판자에 콜탈을 칠해놓은 교실은 아침인데도 벌써 홧홧하니 열기가 가득차고 있다.그날따라 가량맞게 내 손을 잡는 짝꿍의 손이 촉촉하고,내 눈을 바라보는 그 아이의 눈가도 촉촉하다.영문을 모르는 내게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조그만 상자를 쥐어 주고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 한마디 하는데..

"음..나..내일 전학간다.!" 하고서는 이내.. "나 떠나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웃어 줄래?"

언젠가 고운 칠이 되어있고 귀여운 경칩이 달려있는 깜찍한 나무상자를 가져다 주면서 혼자 배시시 웃던 모습이 하도 예뻐 몇 번이나 예쁘다 소근댔더니 그때부터 당시 보기 힘든 외제 콤파스와 노랑 미제연필,보들보들한 지우개등 드문드문 귀한 학용품을 가져다 주면서 나보고 한 번씩 웃어 보라 청하였고,그때마다 멋적은 웃음을 띄는 내게 짝꿍은 해맑은 미소를 짓곤 했다.

그 날 그 아이가 준 작은 상자는 조그만 직사각형의 투명한 크리스털상자인데 ,줄지어 늘어선 떨림판이 내려다 보이고,오돌도돌한 원구체에 연결된 작은 손잡이를 자석식 전화기처럼 돌리면,오묘하고  영롱한 선율이 흐르는 앙증맞을 정도로 작은 오르골이었다.하지만 그 음악이 어떤 곡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 그 아이의 예쁜 미소를 볼 수 없었지만,오르골이 들려주는 맑고 느릿한 소리에서 짝꿍을 생각하며 나만의 조그만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몇 달뒤...겨울이 다가올 무렵! 가방속에 신주단지처럼 간직했던 오르골을 누군가 가져 가는 바람에, 세상이 무너지듯 큰 소리로 울며불며 아우성을 치자,급기야 학급전체가 책상위에 무릎꿇고 선생님이 아이들 가방을 뒤지는 일대 촌극이 벌어졌지만,끝내 오르골을 찾지못해 크게 상심했던 기억이 난다.차츰 시간이 흐르자 그 아이의 미소도 흐릿해지고 가물가물해지는 오르골의 선율도 희미하니 사라지고 말았다.

세월이 훌쩍 흘러 유럽출장길에 "제네바"에서 우연히 쇼윈도우에 진열된 수 많은 오르골을 보게 되었다.마치 동화속에서나 볼 수 있을 오밀조밀한 아름다운 오르골들을 보게 되자.먼 기억속에 침잠해 있던 그 아이와 오르골이 동시에 떠올랐다.함께 길을 가던 동료의 옷소매를 붙잡아 끌며 가게로 들어가 옛 오르골의 기억을 더듬었지만,곡명을 알 수 없어.결국 어린시절의 조그만 추억을 끄집어 내려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고, 출장 기간 동안 기억속에 머물던 그 아이의 얼굴 모습과 오르골에 대한 기억은 귀국 후 바쁜 일상속에서 또 다시 잊혀져 갔다.

며칠 전! 선배가 "마란츠"를 집에 들였다면서 듣기 좋은 음악을 권해 달라는 부탁으로 인해 소장하고 있는 여러 음악을 듣다 기억속에만 삼삼하던 어린 시절의 그 오르골 음악을 듣게 되었다..언젠가 들었겠지만 악단의 연주곡과 오르골의 연주의 특색이 달라 스쳐 지난 모양인데 몇 번을 다시 듣고 나서야 마침내 동일한 곡임을 깨닫고 온 몸에 짜릿한 전율이 흐름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초목과 마찬가지로 우연히 발견되는 감추어진 특질을 가지고 있다" 는 프랑스 고전작가 "라 로슈푸코"의 말처럼 "만토바니"의 연주곡과 오르골 연주곡의 감추어진 동질적 특성을 기억한 내게 준 기가 막힌 우연의 선물이다.

이제는 오르골의 선율에 짝을 태우고 둘만의 추억여행을 떠나야겠다..이름도 얼굴도 잊었지만 짝꿍은 영원히 내 기억속의 세계에서 팅커벨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 내 방에는 어린시절 오르골로 듣던 " Lonely Ballerina " 의 음악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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