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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 이야기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0. 17:59
고모 이야기

사랑하는 마음이 깊으면 이별의 아픔도 그만큼 깊어진다. 아버지와 고모의 사랑은 너무 깊었나 보다. 오누이의 애틋하고 살가운 사랑을 시기한 듯, 하늘은 이 두 분에게 평생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살게 하였다. 수만 리 타향에서 전해오는 고모의 편지는 가족을 그리는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와 아버지의 가슴을 애타게 했다. 이따금 오는 국제전화를 받는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고모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두 분의 그리움의 떨림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10여 년 전 아버지의 부음을 듣던 고모님의 흐느낌 속에서 마지막 떨림을 보았다.

수십 년 미국 생활에서 온전한 자리매김을 하며 늘 따뜻한 모습을 우리 가족에게 알려주시더니 얼마 전 느닷없는 황혼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게 되셨다. 설상가상으로 권총강도를 당한 사촌 동생 석준이의 쇼크 때문에 그간 정들었던 플로리다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신다고 한다. 말년에 힘든 삶을 살고 계신 듯해 마음이 아프다.

근 40년 전 수원에서 서울의 일류 중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고모에게 과외를 받는 방법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수원과 인근의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제들은 고모에게 과외를 받는 게 당연시되었고, 그 틈에 조카인 나도 매년 7월 24일과 12월 24일 방학이 시작되면 (그때는 전국 어디나 방학일자가 같았다.) 그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할머니께서 데리러 오셨다. 서울역 옆 굴레방다리 가는 길의, 지금은 삼화고속 인천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수원행 합승 버스 (약 24인승 정도의 마이크로버스 개념으로 보면 된다.)를 타고 갔는데, 차비를 안 내기 위해 난 항상 운전석 옆 엔진 커버 위에 앉아가는 신세였다. 겨울방학이면 따뜻하게 갈 수 있었지만, 여름방학 때는 그곳에 앉아 수원까지 2시간 넘게 타고 가노라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고생길이 참으로 즐거웠다. 왜냐하면 고모 집에 가면 비록 셋집이지만 참으로 깨끗하고, 무엇보다도 과외받는 학생들의 여유 있는 생활 수준으로 선생님 드시라며 학부형들이 가져다주던 당시에는 구경할 엄두도 못 낼 말랑말랑한 미제 쇼빵과 m&m 초콜릿, 바나나, 파인애플 등을 실컷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모의 과외 방식은 매우 독특하고 스파르타식 교육이어서 2년간 고모에게 배운 학습 지식들이 40년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잠재되어 실생활에서 요긴하게 쓰이고 있으니 말해 무엇할까!!

고모에게 배운 1달간의 교육만으로도 난 매달 우등상장을 받았고, 고모의 학습 약발이 떨어지는 시점이면 다시 방학이 돌아와 재주입을 하여 또 상장을 받는 우등생이 되어버렸다. 고모의 학습 중에서 배웠던 알찬 교육 중 하나는 “천자문”을 마스터한 것이었다. 우리 세대는 중학교부터 한문 과목이 없어지는 바람에 지금도 많은 내 동기들이 한자에 약한 세대가 되어버렸지만, 난 고모의 선견지명 덕분에 지금도 한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이다. 한자 교육은 지금까지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고모 집에서 같이 공부하던 내 또래 중에 하창용이라는 친구와 민일식이라는 두 친구가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다. 창용이의 아버지는 당시 공군 장교(조종사)로 근무하고 계셨는데 평상시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선망의 대상이었던 데다, 우리들의 든든한 후원자이셨다. 여름이면 광교 풀장 옆의 너무도 멋지고 깨끗한 부대 전용 풀장으로 아이들을 전원 찦차에 태워 물놀이와 함께 푸짐한 음식을 마련해 주셔서 그 멋쟁이의 진가를 한없이 높여 주시던 분이었다.

일식이의 아버지는 팔달문 옆에서 시민의원을 하시던 분인데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나고 일식이의 안경 쓰고 하얀 얼굴만 기억이 난다. 일식이는 병원 옆의 화원에서 내게 “미모사”라는 건드리면 움츠러드는 재미난 식물을 처음 구경시켜 준 친구이기도 하다. 지금 사회의 중견인으로 활약하고 있을 텐데, 이 글을 보고 연락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아련한 음악이 있다. “피터, 폴 & 메리”의 "Gone the Rainbow"로 감미로운 선율의 “슈 슈 - 슈라쿵...” 하며 시작되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내 기억 속의 고모와 항상 붙어 다니는 노래이다. 고모는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나의 영화 애호적인 성격이 고모와 방학 동안 함께 보았던 영화들에서 주는 느낌이 강렬해서인지도 모른다. “영광의 탈출”, “모정”, “콰이강의 다리”, “황야의 무법자”, "몬도가네" 등의 영화를 함께 보았다. 국민학교 4-5학년짜리가 이해하기에는 힘든 영화들도 함께 보며 차근차근 영화의 내용과 주인공들의 심리, 영화의 배경들을 설명해주곤 했다. 함께 보았던 영화들은 나중에 성인이 되어 다시 한두 번씩 보았고, 그때의 감정들을 시간 너머로 다시 한번 공유해 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 영화관에서 나오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모가 나지막이 즐겨 불렀던 노래가 바로 “Gone the Rainbow"였다. 덕분에 나도 “피터, 폴 & 메리”의 팬이 되었으니, 어릴 적 좋아하는 사람의 영향이 평생 삶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을 몸소 느낀 바 되었다.

고모와 고모부는 집안의 불균형으로 인해 결혼 얘기가 나오면서 벌써 삐걱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 즈음, 양장점(서울 명동과 안양에도 분점이 있었던 꽤 큰 규모)을 운영하시던 고모부를 소개받아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만 하더라도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였으나, 결혼 이후 깐깐하고 심술궂은 시누이들의 오지랖 넓은 등쌀에 지친 고모부의 일탈이 시작되면서 고모의 기나긴 인생의 부침이 시작된 것 같다. 결국 두 분은 불편한 관계를 안고 돌아오지 않게 되는 머나먼 미국 땅으로 이민을 가시게 되었다.

이민 가시기 얼마 전 인천 집에 오신 고모와 우리 가족들은 자유공원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그때의 아버지의 고통은 말할 수 없으리란 건 말 안 하셔도 느낄 수 있었다. 이민을 갔어도 고모부의 일탈은 그치지 않았고, 급기야 얼마 전 황혼 이혼 소식을 듣고 말았다. 고모 입장에서는 기나긴 결혼의 굴레와 마음고생을 벗어버린 계기라 할 수 있겠지만, 7순을 앞두고 있는 이때에 너무나 가슴 아픈 결정이 아닐지 모르겠다.

아직도 전화 통화에서는 내 조카 현관이를 외치는 고모의 처녀적 목소리가 묻어나온다. 내 동생 현주나 현권이는 고모를 잘 모른다. 너무 어려서 고모가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모의 기억 속의 조카는 나 하나로 귀결되어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꿈 많고 음악과 시와 영화를 좋아하던 처녀 시절의 내 고모는 아직도 내 맘 한구석에 버젓이 살고 숨 쉬고 있다. 예쁜 얼굴보다는 지성 있는 자태의 내 고모! 연세 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살이 좀 붙은 모습의 사진을 보니 아직도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석준이와 희주와 함께 알콩달콩 사시는 고모의 재미난 모습만을 그리며 전화 한 통 걸어봐야겠다.

“고모, 내 돈 좀 벌면 한 번 찾아뵐게요. 건강하세요.”

난 어쩔 수 없는 속물이다. (2006. 9. 2 아침나절)

 

 고모의 결혼식 / 지금은 미국에 살고 계신 고모님의 결혼식 사진이다. 당시 수원에서는 명문중학교 등용문의 과외선생님으로, 이름을 날리던 절정의 시기였다. 나도 방학 때만 되면 고모에게 가서 과외를 받고 우등상장을 계속 타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사진 속 고무부는 예물 시계가 제대로 잠기지를 않아 결혼식 내내 불편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앞줄에서 노닥거리며 잡담을 하던 두 꼬마는 함께 과외를 하던 민 일식과 하 창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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