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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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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나의 성장기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0. 17:02

나의 성장기
(출생부터 국민학교 시절까지)


수원시 우만동 동문 밖!"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의 4 대문 중 하나인 창룡문(동문의 정식 명칭이다.) 밖을 나서면 조그만 네모난 과수원이 자리 잡고. “ㄴ"자형의 폭 좁은 도로가 주변으로 한가로이 몇 집이 대충 놓여있는 형상의 마을이 있다. ⼄⾣년 9월 22일 새벽과 아침 사이에 그 한가로운 마을의 가장 허름한 집에서 김 씨 성을 가진 화춘이라는 분과 또 다른 본관의 김 씨 성을 가진 길자라는 분의 장남인 내가 태어난 곳! 그곳이 우만동 삼백 십팔 번지 나의 출생지이다.

나의 생가는 변형된 모습이기는 하지만 허름한 형상으로 아직도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4살까지 그곳에서 살던 나는 멀리 연무대와 화홍문 울 바라보며 동문을 나의 놀이터로 삼아 오르내리며 미끄럼 타고 뛰어놀던 단편적인 기억이 묻어 나온다. 갓난시절 어머니의 젖이 모자라 이웃 읍장네 할머니의 빈 젖을 하염없이 빨며 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퉁퉁 불은 젖꼭지를 베개 삼아 잠들던 그런 유아기를 거쳤다고 한다.

4살 때 중앙산업으로 일자리를 옮긴 아버지를 따라 서울 용두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용두동에서의 기억이라고는 5.19 학생의거 때의 고대생들의 우악거리는 함성들과, 집 잃고 헤매던 기억뿐 더 이상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잠시의 용두동 생활을 접고 제기동으로 이사 간 집은 남의 집 문간방으로 사과상자를 찬장으로 삼은 햇빛이 잘 드는 쪽마루와 마루밑의 온돌 아궁이가 유독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문 앞 꽤 넓은 골목 건너 집에는 손가락 과자를 뻥튀기하는 가내 수공장이 있었고 그 공장에서는 항상 시뻘건 불길을 내뿜는 버너 위의 검은 무쇠솥 안에 까만 모래들 속에서 빨강, 노랑, 하양 과자들이 꽃잎처럼 피어나는 모습을 한참씩 들여다보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보인다. 제기동의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건 인수 아저씨다. 아버지의 직장동료인 인수 아저씨는 낡은 우리 집 앨범에서 두 번째 내 사진의 등장인물이라 유독 기억하고 있다. 나무판자에 타마구(콜타르)를 묻혀 시커먼 담장을 해놓은 이웃집 앞에서 나를 안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피사체로 잡힌 아저씨는 사진으로 인해 유일하게 기억되는 분이다.

어릴 적의 나는 군것질에 영 젬병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 옛 얘기를 꺼낼라치면, 아직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쟤는 십환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있으면, 사 먹을 줄도 모르고 녹물이 묻어나 시퍼렇게 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고 말씀을 하시니 말이다. (당시 아이스케키가 십환에 두개였다.)제기동 생활도 잠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안의 가난은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 혼자 오산 외가댁으로 보낼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직까지 나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한 지곳리 생활은 천방지축 마을을 휘젓고 돌아다니다,배고프면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 달라고 칭얼대는 전형적 생떼쟁이의 모습을 보인 철없는 유년시절이었다. 외가댁은 꽤 부농으로 자수성가하신 외할아버지의 피땀이 마을 곳곳에 서려있었고 사랑방의 일꾼들이 여럿 기거하며 농사일을 한 것을 보아왔다. 동네 사람들도 외가댁에서 소작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가는 형편들이었던지라 귀여운? 생떼쟁이의 개구 짓을 받아준 모양이었다.

그 시절 큰외삼촌은 엿공장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광에는 드럼통으로 놓여있는 엿이 떨어지질 않았고 풀방구리처럼 드나들며 엿을 깨어 마을 아이들에게 거드름 피며 나눠주며 먹던 내 모습과 엿에 찌들어 새카맣던 내 손이 눈에 선하다. 정숙 이모는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신 내가 외할머니로 알고 있는 분의 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는 둘도 없는 친자매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고 계신다. 이모는 어릴 적 나의 건강식을 책임져 준 고마운 분이다. 여름철 이면 토종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워주는가 하면, 들녘에 지천으로 날아다니던 벼메뚜기를 볶아 간식으로 대청마루에 놓아두어 무시로 드나들며 먹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바람 부는 계절이면 감자, 고구마, 군밤이 주요 간식거리로 등장했고, 막내 외삼촌은 미꾸라지를 잡아 큼직한 놈 몇 마리를 소금구이해서 제비 새끼처럼 주둥이를 뽑아 든 조카에게 하모니카 불 듯이 먹여 주시곤 했다. 한겨울 서랑리 방죽에 얼음이 꽝꽝 얼면, 창고에 보관 중이던 스케이트 날로 만들어 놓은 관수형의(큰외삼촌 아들) 썰매가 진가를 발휘했다. 기껏 철사나 생철 조각으로 날을 만든 썰매와는 그 성능이 비교가 안 되었다. 콧날이 시큰거리고 귓불이 찢어질 듯 얼어와도, 썰매 지치는데 온 하루 해를 쏟아붓던 그야말로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약 2년여 의 지곳리 생활도 국민학교를 입학할 때에 맞춰 끝나고 말았다.

큰외삼촌의 도움으로 비록 허름하고 낡았지만 명색이 우리집이라는 답십리 184번지 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에 터를 잡게 된 건 아버지의 일터가 당시에는 답십리에 소재 한 선창산업에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집 근처의 생활환경은 말 그대로 도시 빈민가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약간 규모가 큰 듯한 공장의 담 뒤쪽 골목을 사이에 두고 큰 집이라야 열평 조금 넘는 판잣집 신세는 겨우 면한 블록 집들이 신답초교가 되어버린 배추밭을 끼고 ㄷ 자형으로 골목을 이룬 40여 호의 집이 있었고, 한쪽 편은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생활오수에 찌들고 오물 투성이인 개천에 말뚝을 박아 얼기설기 판자로 집을 지어놓은 70 여호의 판잣집들이 경원선 철로 밑에 자리 잡아 개천을 따라 쭉 이어져 나무다리로 통로를 내어놓은 진짜 판잣집 동네가 있었다

반대편 쪽은 공중변소를 아랫방향으로 두고 ㄹ 자형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에 우리 집과 비슷한 규모의 집들이 약 100 여호 삐뚤빼뚤 엉켜 처마를 맞대고 어른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좁은 길에 비가 오면 진창에다 우산도 제대로 펴질 못하는 그야말로 가관인 동네였다. 여름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밭에서 개를 잡느라 밭으로 난 처마에 까만 전깃줄로 개의 목을 묶어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모습을 직접 본 관계로 동석이 형이 사주던 보신탕을 먹기 전까지 개고기를 못 먹는 이가 되어있었고, 장마가 지면 밭 하고 집들 사이를 휘도는 도랑이 넘쳐 하수구로 역류하는 바람에 하수구를 막고 담에 구멍을 뚫어 퍼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 생활도 아버지의 사업이 친구의 배신으로 망하자 술로 인한 아버지의 방황이 우리 가정을 더욱 말 할수 없는 나락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오죽하면 끼니가 없어 재강(술지게미)을 아침 대용으로 먹고 학교에 갔다가 담임으로부터 어린것이 학교에 술 먹고 온다고 뺨을 맞은 것이 천추의 한이 되어 지금도 가슴에 뻐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와중에도 국민학교 1학년 몹시 무더운 여름 초입에 귀여운 나의 여동생 현주가 태어났고, 국민학교 5학년 선들한 가을바람이 부는 계절에 막내 현권이도 그 집에서 태어났다.

동네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으로는 배추를 거두어들이고나면 널찍한 우리들의 놀이터인 밭으로 가서 배추 꼬랑지를 캐먹고 쥐불놀이하던 기억과, 밭 한가운데를 아이들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게 큼직하게 파고 아지트라고 놀며 구슬치기와 불장난! (고무라도 태울라치면 시커먼 연기가 코안을 새카맣게 그을리는) 그리고 얼어붙은 도랑에서 썰매를 타다 메기라도 잡으면 구린내가 진동을 하는 지금의 아이들은 꿈도 꾸지 못할 그런 놀이들을 하고 지냈다. 개천 건너 판자 집중 양을 기르던 집에서 양젖을 얻어먹었던 일이 새록새록 기억을 돋워주고, 새로 산 나일론 잠바를 입고 가다 초산 벼락을 맞아 다행히도 얼굴은 괜찮았지만 잠바가 구멍 천지가 되는 바람에 어머니와 그 집 아저씨와 대판 싸우시던 일이 떠 오른다. (지금에 와서 생각나는 건 왜 가정집에 초산이 있었고 그 초산을 왜 담 밖으로 뿌렸을까 하는 의문이다.) 

또 한가지 끔찍한 기억은 썰매를 타러 미나리깡으로 달려가다가 마침 썰매를 타러 나오며 썰매 꼬챙이를 위로 들고 나오던 이름이 삼삼한 친구의 꼬챙이에 왼쪾 뺨을 관통하여 꼬챙이를 덜렁이며 엄마를 찾아 집으로 울며 들어가던 일이다. 지금도 내 왼쪽 얼굴 한가운데는 예쁜 보조개가 나있다. 그 시절 철로변 아이들이면 다 그렇듯이 경원선 철로를 끼고 있는 동네라 나 역시 반짝거리는 철로길에 대못을 주워다 침을 뱉어 놓고 기찻길 위에 귀를 대고 빨리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던 모습이 눈에선하다.

나의 모교는 서울 "전농 국민학교"이다. 24회 졸업생인 나는 전 세계에서 학생수가 제일 많은 학교에 다녔다. 한 학년이 20여 개 반이고 한 반에 70-80명인 학교! 그것도 1-3학년은 3부제 수업을 받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교육 환경을 가진 학교를 다녔다. 수학여행 가는 버스가 근 20여 대가량 이어져 달리는 장관을 연출할 수 있는 바로 그런 학교를 다녔다. 학생수 10,000명이 넘는 매머드 학교! 앞으로 그런 학교는 전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도시 외곽에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걸어서 갈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인지 주변여건이 그러해서인지는 몰라도 소풍만큼은 제대로 다녔다. 창경궁, 비원, 용주사, 남한산성, 광릉, 동구릉, 금곡릉, 경복궁 등등 소풍지로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곳으로 다녔다. [내 동생들과 두 아이들은 다들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정말 장소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기껏 약사사와 문학산이 주된 소풍지였고 그나마도 작은아들 같은 경우 집 앞의 근린공원으로 소풍장소가 정해 졌을 때는 하도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 저학년 때는 어머니와 함께 소풍을 다녔는데, 고학년이 돼서는 어머니의 배려로 할머니와 함께 소풍을 다녔다. 김밥 , 찐계란, 찐 밤, 사이다 한 병, 과자 한 두 봉지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진수성찬이라, 그 시절 친구들의 메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국민학교 시절의 친구를 꼽으라면 그리 많은 아이가 기억되질 않는다. 5-6학년 시절의 학교 친구들과 동네에서 함께 뛰놀던 전 상구, 안 중균 두 친구가 기억 날 뿐이다. 상구는 소규모 가내 금 가공공장을 하던 집 아이로 유독 기억에 남는다. 어린 시절의 그는 민규와 함께 셋이서 찍은 빛바랜 사진에서만 만나 볼 수 있다. 중균이는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나온 친구이며 자주 어울렸는데도 이상스레 별 추억거리가 없다.

우리 집으로부터 두집 건너 홀 어머니와 함께 살던 나보다 한 살 아래의 성기는 극성스러운 그의 엄마 덕택에 (동네가 시끌시끌해지는 몇 번의 싸움이 있었다.) 이름만 기억에 떠오른다. 양 기덕과 장 정식, 이 민규, 남궁 영순, 김 은선 등은 민규만 제외하고는 과외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그중 영순이는 전교 1-2등을 차지하던 재원으로 또랑 한 눈망울과 단발머리가 선명히 기억되던 여자 아이였고, 개천변에서 살던 은선이는 양쪽 어머니가 대충 알고 지내던 사이여서 개중 친하게 지내며 은근
히 좋아하던 맘을 품고 있던 아이였으나 그 표현을 한 번도 못해 보았다.기덕이는 약간 살집이 있는 통통하고 귀염성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민규는 6학년 때 반장으로 그의 집 뒤 편 조그만 동산에서, 석유를 입에 물고 불을 뿜어내는 용가리의 추억을 함께한 눈망울이 크고 잘 생긴 아이였다. 정식이는 그중에서 성장과정을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친구로, 경기상고를 졸업하고 서대문 근처 어느 은행에 취직했다는 말까지 들은 바 있는 친구이지만, 앞의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연락은 안 되고 있다.

서로 사는 동네가 틀린 이 친구들과는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구슬치기도 하고, 남의집 화장실에 폭음탄을 던졌다가 죽도록 맞아 보기도 하며, , 4킬로미터 이상은 족히 걸어야 하는 뚝섬으로의 개구리 잡으러 가기, 영화사 구경 가기 , 여름 장마철이면 늘 축축하게 젖어있는 담장에 지천으로 돌아다니던 노래기 잡아 경주시키기 , 서울 운동장 어린이 수영장으로 수영하러 가기 (수영 끝나고 운동장 광장에서 사 먹던 10원짜리 순두부가 왜 그리 맛있던지) 겨울철이면 밭에서 쥐불놀이하기 , 미나리깡으로 썰매 타러 가기, 등등이 스치듯 기억난다. 이렇게 나의 국민학교 시절은 천둥벌거숭이처럼 생각 없이 지나간 세월이었다.

 

• 수 년전 우연한 기회에 청량리에 볼 일 보러 들렸다가 시간이 남아 학교 다니던 길 들과 내가 살던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안 가보느니만 못 하였다. 우리 집이야 철거되며 신답초등학교 뒷마당으로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친구들 집들도 거의 아파트 단지에 파묻혀 어디가 어딘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영순네 집만 덩그마니 남아 있어 문패를 보았지만 남의 집이 되 버린 듯 하다. 결국 없어져 버린 집들과 함께 긴긴 세월의 더케만 느끼고 돌아오고 말았다.

( 2006. 9. 28 저녁 )

 

우만동 나를 안고 있는 아버지와 오른쪽 어머니 할머니 아버지 왼쪽은 미국으로 이민가신 고모님

 

답십리 상구네집에서 왼쪽부터 나,상구,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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