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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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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선 희 이 야 기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0. 10:29

 

 

선 희 이 야 기

친구와의 등산 약속으로 타고 가던 새벽 버스 안에서의 일이다. 전날 과음으로 속이 쓰리고 머리도 지끈거리길래 추운 날씨에도 창문을 열어젖히며 '이러려면 무엇하러 등산을 가나?'라고 자문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버스가 멈추고 아주머니 한 분이 느릿느릿 올라타더니, 내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아주머니의 물건들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까만 비닐봉지와 포개 든 체크무늬 랜드로버 쇼핑백이 보였다. 길거리에서 가끔 보던 백이었는데,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그 백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한 친구의 까르르 웃는 하얀 얼굴이 시야에 떠올랐다.

그 친구의 이름은 지선희. 이십 대 초반 성가대 시절에 만난 친구였다. 웃을 때 볼에 패인 우물 같은 보조개가 귀여운 동갑내기 그녀는, 집이 같은 방면이라 성가 연습이 끝나면 줄곧 동행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모 은행 경동 지점에 근무하던 그녀와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충분히 연애 감정을 느낄 만한 나이였지만, 우리는 평범한 절친한 친구 사이로만 머물렀다. 선남선녀가 몇 년을 친근하게 지내면서 어찌 연애 감정을 못 느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선희는 자기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스스럼없이 소개해주었다. 그네들과도 종종 어울리긴 했지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외환은행에 다니던 호리호리하고 예쁜 얼굴의 영희는 결혼 후 연락이 끊겼고, 통통하고 건강미 넘치던 미연이도 사무실 근처에서 양품점을 했는데 퇴근길에 종종 들러 차 한잔하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어느 가을, 사무실로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에 만나자며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고 내동에 있는 랜드로버 매장에 데려갔다. 그녀는 남자에게 줄 선물이라며 어느 것을 고를지 모른다길래. 하나를 골라 보여주었더니, 갑자기 그것이 내 것이라며, 봉급을 탄김에 내 생일 선물로 사주는 거라고 했다. 때는 지나버렸지만 생일 축하한다며 까르르 웃던 그녀의 모습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그 이후로 서로 선물을 주고받은 기억은 없다. 그날 선희는 나를 남자로 보았을까? 아니면 단순히 친구로서 생일 선물로 준 것일까? 그 신발은 십 년 넘게 아껴 신다가 석바위로 이사하면서 사라져버렸다. 내 인생에서 여자 친구에게 받은 최초의 선물이었는데.

선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우연히 “백석 천주교 공원묘지”의 할머니 묘에서 두 계단 아래에 그녀의 아버지 묘가 있어 한식이나 추석이면 그녀를 떠올리곤 했다. 어느 해 추석인가 성묫길에 마주쳐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어느 날, 선희로부터 아주 난감한 부탁을 받았다. 자기 언니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러달라는 부탁이었다. 기겁하며 거절했지만, 막무가내로 조르는 통에 마지못해 승낙하고 큰 걱정에 집 뒤 공원에 올라가 꽤 많은 연습을 했다. 절두산 성당에서 치른 그녀의 언니 혼배미사에서, “평화의 주”를 축가로 부르던 나는 그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당이 큰 건지 목청이 작은 건지. 동행한 선배들이 그 정도면 잘 부른 거라고 치켜세워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지금도 그녀의 언니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다.

선희는 남자 단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시원한 이목구비에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이 매력적이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심성과 자주 웃는 얼굴이 인기의 요인 아니었나 싶다. 특히 곰형이 선희를 좋아할 때마다 심통이 난 걸 보면 나도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신발을 선물 받은 해의 초겨울 어느 날, 저녁을 먹기로 한 약속이 있었지만, 서로의 퇴근 시간이 2시간 넘게 차이가 났다. 남은 시간 동안 술친구와 사무실 옆 모주집으로 간 것이 실수였다. 모주 두 양푼을 비우고, 소주 두 병을 나눠 마신 후 얼큰한 취기로 비틀거리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정신은 말짱했지만, 몸은 이미 취해 있었다. 분위기를 잡겠다고 새로 나온 마주앙을 주문한 것이 화근이었다. 건배를 하다 힘 조절이 안 되어 잔이 깨지고, 바꿔 받은 잔도 테이블에 놓으며 힘을 많이 줘 잔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럭저럭 저녁을 먹고 나오다 좁은 '유지 경양식집'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떨어졌다. 놀란 그녀의 큰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몸이 멀쩡하고 옷도 깨끗해 한참을 웃었지만, 그게 어디 웃을 일이던가.

그렇게 실수도 웃어주고, 추억거리도 주며, 설익은 농담도 재미있게 받아주던 선희는 결혼 후 은행을 그만둔 뒤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꽤 오래전 미연에게 물어보았으나, 선희는 연락이 없고 가게에도 발길이 없다고 했다. 결혼과 함께 세상의 연을 모두 끊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는 추억 속의 친구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연락하면 찾아볼 수야 있겠지만, 남의 처자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친구라 하더라도 남정네가 찾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추억으로만 남겨두었다. 새벽 버스 안에서 우연히 보게 된 랜드로버 쇼핑백 덕분에 선희라는 오래된 친구를 다시 기억 속에서 꺼내어 즐거웠던 시절을 되새겨보게 되었다.

그루터기 김 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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