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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오래된 골목의 보물창고지기 본문
오래된 골목의 보물창고지기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 사진 김보섭 자유사진가
복작복작한 송림동 현대시장 한복판에 책을 그득 실은 수레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선뜻 다가서지 못하던 시장 상인들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어느덧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루지 못한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업학교에 진학했던 정육점 아주머니는 명화집을 빌려 보았고, 학창시절 역사를 좋아했던 칼국수집 사장님은 역사 소설과 평론서를 다시 꺼내들었다. 지난 2012년부터 1년간 진행한 ‘책, 시장으로 가다’ 프로젝트로, 시장 사람들의 일상을 변화시킨 이 작지만 아름다운 움직임은 ‘상상작은도서관’ 대표 정춘진(46) 씨의 머릿속에서 시작됐다.
서울의 한 장애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그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동구 송림동 자택 건물에 상상작은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책을 좋아하고 또 나와 내 가족이 살고 있는 ‘우리 동네’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다.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착한 임대료를 받으며 가족과 오붓이 살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은행대출을 받아 작은 건물을 매입했다. 대출 이자를 대신해줄 월세 30여만 원을 위해 리모델링공사까지 마쳤지만, 원래 미용실이 있던 자리는 생각처럼 임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을 빈 공간으로 있다, 창고 안에서 잠자고 있던 책 2천여 권을 꺼내 묵은 먼지를 털고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도서대여점이라도 연 건가, 기웃거리며 궁금해 하는 동네주민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집은 동네 도서관이 되었다.
“동네 주민들 대부분이 도서관을 이용한 경험이 없고,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책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책을 고르는 법을 알려 주고, 빌려 가는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을 골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각자 처한 상황에 맞게 책을 추천해 주는 건, 공공도서관이 아닌 작은 도서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매력이라고 말한다. 또 책도 책이지만, 도서관 안에서 이웃들 간에 서로 살아 온 삶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뜻으로 도서관 운영도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한다. 정 대표가 출근하는 낮 시간에는 동네 청년들이 편한 시간에 도서관을 열고, 문이 닫혀 있으면 주민들이 원하는 책을 메모에 써 붙여 놓곤 한다. 이용하는 사람 대부분이 동네 주민이기 때문에 회원가입도 회비도 없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정겨운 동네 도서관이지만, 책장에는 귀한 인문학 서적이 빼곡히 차있다. 작지만 특화된 인문학도서관으로 손색이 없다.
“독서를 하는 건 다양한 편견을 접하며 편견의 각을 무디게 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이웃들에게 이러한 인문학의 매력을 이야기하며 책을 추천해 드리는데, 다들 좋아하세요.”
그가 품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증명하듯, 도서관에는 오래된 희귀본을 비롯해 지금은 구하기 힘든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그득하다. 송림동 사람들은 그 보물창고에서 내 이웃의 지문이 스민 책을 꺼내, 소소한 즐거움을 얻고 때론 조용한 위안을 건네받으며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굿모닝 인천 6월호]
201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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