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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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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석바위 회상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1. 10:56

석바위 회상

석바위! 주안4동이 주된 동네이며 주안 6동과 주안 8동 일부를 포함해서 석바위라 하는데 또 다른 명칭으로는 ⽯巖(석암)이라고도 부른다. 주안8동 천주교회를 석암 본당이라고도 하고, 석바위 시장에 붙어 있는 경찰관서를 " 석암 파출소 "라 불렀으며, 인근 동네 명칭도 간석과 동암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주안염전을 둘러싼 일대에 바위가 많아 그리 불린 듯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둘러봐도 바위는 보이질 않는다. 다만 주안 도서관 뒤쪽에 "대머리공원"이라 불리는 "석바위 근린공원"이 있어 인근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이 하고 있는데 공원 꼭대기에 듬직한 바위 몇 개가 자리 잡고 있어 석바위의 명칭에 조그만 의미를 주고 있다..

인천으로 이사 올 무렵! 이곳을 들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수도사" 앞 좁은 길로 소래 다니는 버스가 다니고 *(버스 행선지에- 虎⼝浦:범아가리-라 써진 명칭이 신기했다) 지금의 동인천중학교 일대에 군집해 있던 과수원에서 풍기던 푸릇한 과일향기에서 수원의 유명했던 딸기농장인"푸른 지대"를 연상케 하였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 극동아파트 자리는 온통 가구 및 합판 제조 공장들이 난립해 엉성하고 정돈되지 못한 모습들을 보여 좋지 않은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인천고등학교도 배다리에서 옮겨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기반시설이 충분치 않아서인지 도로와 인도조차 구분되지 않았고 복개 前 의 승기천 가는 길은 온통 진흙탕길이었으며, 복개 後의 동양장 사거리는 장마철이면 침수가 일상화되던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토지 회관(지금의 경인상가 내에 있던 회관) 뒤편이 택지로서의 기능을 충족시킨 계획된 모습을 보여주자 주민들의 유입이 활발해지는 중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중구에 있던 법원과 시청이 옮겨 오면서 석바위 시장과 지하상가를 위시한 상권이 활발하게 형성되었고 르네상스, 제일, 동아 등의 상업용 빌딩과 금융권  건물들이 속속 건립되면서 지금껏 경인국도 남부축에서의 교통과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로서 첨병의 역할을 하고 있다.

80년대 말! 석바위로 이사를 했다. 주안도서관 아래 큰 길가 골목에 있는 이층 양옥집이었는데 단칸방을 전전하다 앞마당에 번듯하니 정원까지 딸려있어 아내에게 면목이 섰던 석바위 집은 자줏빛 모란꽃이 유독 눈에 들고 목련이 운치를 주던 그런 집이었다. 게다가 바로 앞은 번듯한 화원이 자리 잡고 있어 사철 그윽한 꽃향기를 맡으며 지내는 아늑함도 덤으로 얻을 수 있어 그 분위기도 좋았다. 그곳에서 작은 아들 돌잔치도 치르고, 진급도 하고, 꿈에 그리던 오디오도 장만하는 등 아기자기한 삶을 펼쳐가며 살았는데. 특히 골목 사람들이 주는 따뜻한 인정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던 나날들이 지금도 그립다.

영록이네, 꽃님이네, 혜선네, 매분 네 그리고 종종 골목을 시끄럽게 하시던 승희네 아저씨와 우리 집 등이 모여 살면서, 틈만 나면 골목 마당에 자리를 깔고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더위도 쫓고, 낙엽도 음미하면서 오손도손 세월을 함께 나누었다. 마침 섬에 1년여를 근무하게 되어 푸진 섬사람들의 인심을 담아 온 해산물이 종종 골목잔치의 주 메뉴가 되었던 일도 새삼 되새겨진다.

공교롭게도 담장을 나눈 이웃집 영록이 아빠와 나, 영록이 엄마와 아내, 영록이와 석민이의 나이가 똑같아, 서로 그 동네를 떠나고 나서도 친동기간처럼 지낸다. 영록이와 석민이는 군대까지 동반 입대하여 한 내무반에서 전우로 지내다가 제대를 했는데, 지금 뉴질랜드로 유학가 있는 영록이와 한국에 남아 있는 석민이 두 녀석들의 쌓아가는 신세대적인 우정의 방식이 아주 도탑고 볼 만하다.

몇 년뒤! 그 골목을 떠나 바로 이웃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거실이 아주 넓고, 무엇보다도 높은 트러스형 천장으로 지어져 환기가 잘 되고 집 주변이 향나무와 은행나무로 둘러쳐져 아주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해 가던 날 아내가 감격해하는 모습에서 한 가지씩 원하는 바를 얻어가며 살아가는 작은 행복을 느껴 보았다.

석바위에서 지낸 근 10여 년간은 내 인생에서의 가장 활기찬 시간이었다, 풍요와 안정을 즐기며 행복에 겨워 보기도 하고,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의식도 절실하게 느끼며 살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과 시련도 겪으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쉼 없이 변화해 가는 세상 속에서 사고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의 이방인이 될 수 있음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석바위는 내 인생의 한 축을 이루며 버티고 있는 아주 중요한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업의 실패로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난 지 벌써 오 년이 지났어도 석바위는 내 아이들에게 소중한 성장의 터전이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의 터전이며 유소년 기를 보냈던 답십리의 집도 철거되며 떠난 후 그저 추억만을 간직하며 지내고 있는데,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온 지금! 내 아이들과 단란하게 지내고 이웃과 정 주며 살던 석바위와 , 청년기와 장년기를 지내고 있는 지금 수봉산 기슭의 이곳도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 단지로 변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도시에서 사는 사람의 숙명적인 현실이라면 이제 이후의 삶은 어디에서 의지할 것이며 고향이라는 말은커녕 출생지와 살던 곳의 추억마저도 재개발과 재건축이라는 미명 아래 모조리 뭉뚱그려 부숴버릴 테니 지금도 그곳에서 알토란 같은 꿈과 행복을 지니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010 - 07 - 01 

* 호구포
남동구 논현동 서남쪽에 있는 호구포는 말 그대로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 포구라는 뜻이다. 호구포 뒷산인 오봉산 기슭에 마치 호랑이가 어흥 소리를 내며 입을 한껏 벌린 듯한 형상의 검고 커다란 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호구암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포구 이름도 범아가리 또는 호구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부근에 구한말 해안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논현포대, 일명 호구포대가 있었다.

간석주공아파트 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