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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코끝을 흐르는 추억들 본문
코끝을 흐르는 추억들
코끝을 흐르는 추억들
사람들은 오감을 통해 세상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중에서도 냄새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몸을 헤집고 들어와 때로는 추억 속에 머물러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이렇듯 냄새는 우리의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가 좋아하는 순간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그 냄새를 다시 맡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 글은 제 삶 속에서 추억과 함께했던 냄새들, 그리고 그 냄새가 불러일으킨 기억들을 모아 적어본 것입니다.
시골 국도에서 느낀 배기가스의 향
방학 때마다 외가댁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곳으로 향하는 한적한 시골 국도에서, 시외버스가 지나간 뒤 솔향기와 함께 코를 자극하던 옥탄가 높은 배기가스의 향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그 정류장 앞 삼거리 구멍가게에서 마시던 음료의 맛과 함께, 그 향기는 저를 흠뻑 취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그곳에서 버스를 탈 일도, 그 냄새를 다시 맡을 일도 없겠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들녘을 걷던 여름날의 풀꽃 내음
외가댁에서 바라보던 어스름한 들녘, 그곳에서 타박타박 걷던 길에 코끝을 스치던 여름날의 풀꽃 내음이 문득 떠오릅니다. 그 시절의 외가댁은 이제 궁전 같은 이층 집이 되었고, 외갓집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추억으로만 남아버렸지만, 그 풀꽃 내음은 아직도 저의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겨울 저녁의 소여물 냄새
어릴 적, 눈 내리던 겨울 저녁, 외가댁 뜰에 퍼져오던 김 속을 헤치며 맡았던 소여물 냄새는 구수하고 따뜻했습니다. 그 냄새는 마치 외가댁에서의 행복한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듯합니다. 지금은 그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없지만, 추억 속에서 여전히 그 순간을 떠올리곤 합니다.
친구 집에서 처음 맛본 파인 주스
국민학교 5학년 때, 부자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친구의 엄마가 가져다준 연녹색 파인 주스는 깊고 투명한 유리잔에 담겨 있었고, 그 시원한 첫 경험의 냄새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친구의 엄마는 늘 물방울무늬의 하얀 원피스를 화사하게 입고 계셨는데, 그 모습과 함께 파인 주스의 청량한 맛과 향은 저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동대문 도서관의 책 냄새
옛날 자주 가던 동대문 도서관에 처음 입장하던 날, 장서고에서 풍기던 책들의 퀴퀴한 지성의 냄새는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여름과 겨울방학 동안 세계문학전집을 완독하며, 책의 친근함을 온몸으로 느껴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책 속에서 느꼈던 행복은 아직도 제 기억 속에서 선명합니다.
첫사랑과의 숲 속 산책
여자 친구와 처음 손을 잡던 날, 하늘이 보이지 않는 어스름한 "광릉" 숲 속을 거닐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온몸을 파고들던 쑥스럽고 두근거리던 그 싸한 숲의 향기, 그 향기는 풋사랑을 경험해 보신 분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과 느낌일 것입니다. 그런 감정과 느낌과 자연이 동화되어야만 맡을 수 있는 꿈같은 저 향기는 아직도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라일락 꽃 향기
어느 해 봄, 이사 간 집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에서 풍겨 나오던 그윽한 기쁨의 꽃 향기가 떠오릅니다. 상윤이 엄마의 상냥한 목소리와 라일락 꽃 향기가 잘 어울렸던 그 순간, 이듬해 고모님이 미국으로 떠나시기 전 집에 오셨던 날, 아버지는 저 나무 밑에서 마른 비질로 동기간의 헤어짐을 슬퍼하셨습니다. 그리운 향기와 아픔이 함께 느껴졌던 그 나무는 상윤네 집이 헐리며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우정의 향기
첫 잔에서 풍기는 몰트 위스키의 진저리 쳐지는 맛과 취한 뒤 친구의 눈물에서 풍기던 우정의 향기가 떠오릅니다. 말레이시아로 이민 떠나는 친구와 둘이서 강남의 한 바에서 이별주를 마시던 슬픈 기억은 아직도 제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결혼식에서의 사랑의 향기
결혼하던 날, 아내의 얼굴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던 손수건에서 잔잔하게 흐르던 사랑의 분 냄새는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를 믿고 결혼해 준 아내의 고귀한 눈물의 체취는 저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고,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냄새로 남아 있습니다.
샤워 후 아내의 체취
샤워하고 나온 아내에게서 은근하게 풍기던 성숙한 체취는 저에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냄새로 남아 있습니다.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도 여전히 그 체취를 느낄 수 있지만, 아내는 모르는 듯합니다.
아들의 탄생과 함께한 향기
갓 태어난 아들의 빨간 입에서 풍기던 탄생의 젖내와 앙증맞은 엉덩이에 발랐던 파우더의 향기는 저에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27년 전, 아침 6시 8분에 경동에 있는 김용우 산부인과에서 첫 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비로소 삶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삼일째 되던 날, 아내의 가슴에 파묻혀 있던 아들에게서 풍기던 그 귀한 냄새와 향기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군밤 속에 담긴 삶의 향기
어느 차가운 겨울, 어스름 저녁 무렵의 퇴근길, 동인천 지하상가 입구에서 솔솔 풍겨 나오던 군밤 속 삶의 향기는 저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둘째를 임신한 아내가 초겨울에 군밤이 먹고 싶다고 했던 날, 없을 것 같던 군밤장수 할아버지가 왜 그리 반가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의 군밤 냄새는 저에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검정 콩밥의 구수한 내음
당직을 선 날 새벽, 동방집 할머니가 열어젖힌 무쇠솥에서 확 얼굴을 덮어오던 김 속을 흐르는 검정 콩밥의 구수한 내음은 저에게 작은 행복의 절정을 선사했습니다. 이제는 인천 아트 플랫폼으로 바뀐 그곳, 할머니의 구수한 반찬 맛과 구석방에서 콩밥을 말아먹던 소고기 뭇국의 개운한 맛이 아직도 그립습니다. 콩밥 특유의 거무스름한 색깔이 주는 식감과 그 향이 아직도 코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리운 냄새여.
유럽에서의 낯선 냄새들
10여 년 전, 마음 편히 다녀본 유럽에서의 낯선 냄새들이 떠오릅니다. 알프스의 "에뀌 디 미디" 산장 얼음동굴 밖에서 서늘하게 코끝을 스치며 지나가던 얼음가루의 청명하고 투명함, 제네바에서 묵었던 조그만 "스트라스버그" 호텔의 새벽 구내식당에서 흠뻑 배어 있던 치즈 냄새, 그리고 샹젤리제 길가에서 스쳐 지나가는 여인들마다 풍기던 알싸한 향수 냄새는 저에게 낯설면서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의 담배 연기에서 풍기던 만족의 냄새
아버지께서 애장품인 "ZIPPO" 라이터로 불붙여 기분 좋게 들이마신 후 내뿜던 첫 번째 담배 연기에서 풍기던 만족의 냄새는 저에게 그리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부러 담배 연기 속을 헤집고 들어가면서까지 맡았던 그 지포 특유의 냄새와 아버지의 숨결이 그리워집니다.
새벽 공기의 싸한 냄새
초여름 여명의 백운산 자락에서 소리 없이 다가와 코끝을 감돌던 싸한 새벽 공기의 냄새는 저에게 삶의 애착과 긍지, 자존심을 곧추세울 수 있게 해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백운산에서 밀려 내려오는 새벽 정기를 온몸으로 느낄 때, 저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곤 했습니다.
솔잎 파리의 영혼의 내
명퇴하던 해, 찾았던 약사사의 앞마당에서 낙엽을 태우는 스님의 막대기 끝에 자작이는 솔잎 파리의 날숨 소리와 하얗게 퍼져 오르던 영혼의 냄새는 저에게 깊은 깨달음을 안겨주었습니다. 교만함을 달래고자 찾았던 약사사는 저에게 인생의 진리와 겸손을 깨닫게 해준 곳이었습니다. 그때 맡았던 내음은 저를 다시금 성찰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렇듯, 냄새는 저에게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 추억을 통해 과거의 소중한 순간들을 다시금 되새겨보게 합니다. 냄새만으로도 수많은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고, 아주 까맣게 잊고 지내던 옛 벗을 그려볼 수 있는 기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장소와, 돌아가신 분들을 다시금 되새겨보고,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새롭게 북돋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단편적인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본 것이지만, 그것이 저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계기가 되어 더 큰 보람을 느낍니다.
2010 ‒ 06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