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형과니의 삶

중화 중학교 본문

내이야기

중화 중학교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1. 02:10

중화 중학교

https://youtu.be/Zl7MR73vhBA

 

 

중화 중학교

'새 날의 동이 트는 아차산 기슭! 맑은 기운 벅차게 가슴에 안고'.......

나의 모교 중화 중학교의 교가 시작 부분이다. 전국의 초, 중, 고교 대부분의 교가에는 대부분 학교 주변에 있는 산과 강의 명칭을 한 자락씩 집어넣는다. 나의 모교들도 마찬가지다. 국민학교는 “ 삼각산 ” 고등학교는 “ 한강 ”을 끼어넣고 있다. 그렇다. “ 중화 중학교 ” 에도 틀림없이 "아차산" 이 자리 잡고 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애달픈 사연이 깃들어 있는 "아차산" 뿐만이 아니라 “ 북한산 ” 과 “ 도봉산 ” 도 자리 잡고 있다.

 처음 “ 중화 중학교 ”를 배정받고, 부모님과 나는 중국 학교에 배정받은 줄 알았다. “중화민국”을 떠 올리기 아주 쉬운 학교 명칭이라서 그랬다. 아예 “ 망우 중학교 ” [忘憂!(근심을 벗은 곳) 참 좋은데 말이다]라고] 라고 지었으면 좋았을 걸.. “ 서울시 교육청”에서 “망우 ” 하면 공동묘지를 연상시킬 듯해서 이웃동네 명칭인 “중화동”을 차용해 지은 듯하다. 지금은 면목동으로 옮겨 가 버린 것을 왜 굳이 학교에 동네 이름을 넣을 것을 고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교육 정책의 편의주의와 굳어버린 사고 탓이려니 생각하고 말자..

 1968년 가을 어느 날!

전국의 국민학생 들은 기가 막힌 낭보를 듣는다. '중학교 무시험제 도입소위 뺑뺑이가 시작된 것이다.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학생들에게는 무시험 입학이라는 소식은 엄청난 사건으로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소위 일류 학교만을 지향하던 많은 부모님들과 학생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결국 난 선배도 없는 “중화 중학교” 로 배정받았다. 1회 졸업생이 되어야 한다는 타이틀이다.

 기다리던 입학식! 검정 교복과 교모를 쓰고 거울 앞에 선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뿌듯한 표정이 눈앞에 선하다. 수원 “ 신풍 소학교 ” 의 일본인 교장 사동으로 일하며 소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정규학교로는 그것이 마지막인지라 내 교모와 배지의 의미가 맘 속에 시려서 일게다. 그토록 기다렸던 입학식이었지만 우리는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질퍽거리는 진흙탕 운동장에 가마니를 깔아 놓고 지지직거리는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교장 선생님의 낮고도 지루한 입학사가 낭독되는 동안 우리는 그저 덩그마니 눈앞에 서 있는 한 동의 학교 교사 만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담장도 다 준공되지 않고 교실도 흙으로 더 케가 쌓여있던 정말 황량하고도 을씨년스러운 “중화 중학교 ” 의 첫인상이었다 그랬다 “중화 중학교” 의 1회 졸업생인 우리들은 그런 환경에서 배움의 터를 틀어 가고 있었다..

봄이 되며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학교 주변을 뒤덮을 무렵 서서히 학교다운 모습이 살아나고, 익숙해진 아차산 기슭을 돌아다니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 망우리 공동묘지 ”에서 흘러내리는 해골물을 입에 적시며, 우리들은 커 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것이 1 회였다. 백일장도 체육대회도 졸업식도., 역사가 없는 학교, 선배가 없는 학교우리는 그런 서러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저 1 회의 타이틀을 달고 앞만 보고 달리는 야생마들이었다. 거칠 것도 없었다. 세상은 모두 우리의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들은 학생으로서의 모든 것을 일구며 꿈을 꾸었다.

 나의 모교의 좋은 점 중 하나가 주변의 모든 학교가 여학교밖에 없다는 점이었다.“송곡여중, 영란여중과,영란여상,혜원여중“등 이 학교들이 당시 우리들과 함께 버스를 타며 부대끼던 여학교들의 면면이었다. “송곡여중”에 다니던 조 00 양을 만난 것도 옆에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우리 “중화 중학교 ” 와 운명을 함께 하던 기분 좋은 동반자들이며 파트너 들이었다. 나는 내 인생의 배양기였던 중학 시절에 가장 알차게 살던 매 순간순간들을 또렸하니 기억한다.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 문학 소설에 대한 애착, 음악에 대한 갈구 , 학교를 빛내주던 커다란 표창장들, 부쩍 커버린 마음 씀씀이에다 , 인생의 진로를 잡아 주신 1학년 담임 선생님이신 “김 이홍 ”선생님과 3학년 시절 무던히도 나를 아껴주셨던 국어 선생님이신 “이 근수” 선생님과의 만남들이 커다란 물줄기를 이루며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지금의 “중화 중학교” 는 벌써 34 회의 졸업생을 배출한 성인으로 불쑥 자라 있다. 어린싹으로 시작된 지 30여 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내 후배들에게 선배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지만, 이제라도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내 삶을 옹골차게 가꾸어,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어야겠다.

“중화 중학교 ” 파이팅!  2006. 10. 3 저녁

 

* 내가 다닐 적 교가와 지금의 교가는 다르다. 가사도 일부 틀리고 곡 자체는 아예 다른 곡이다. 

내 사진들에서 - 중화중학교 교가 참조

 

 

john

중화중학교라고 하시어... 연변 교포인 줄 알았습니다....ㅎㅎ 우리나라 그것도 서울에 있는 학교로군요..! 06.10.13 00:07

석바위

아 글쎄 30년이 넘은 학교인데도 john님은 아직도 모르시잖아요. 그러니 당시 내가 받은 충격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06.10.13 09:06

 adam

석바위님 반갑습니다. 저는 장안중학교 출신입니다. 저도 제1회입니다. 중화중학교 많이 들어본 그때의 추억이었습니다. 건강하세요. 06.10.13

 석바위

그래요 그때 성일중 도 1회였었고 우리도 1회였는데 adam님도 저랑 연배가 같으신가 보네요 반갑습니다. 06.10.13 20:38

 노래

동네 사람들 자꾸 모이시네요ㅎㅎ. 장안 중학교는 들어보았는데 중화 중학교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해성여자중학교(그 전에는 이름이 '덕화'였습니다)를 2년까지 다니다가 독일로 왔지요. 그래서 석바위님의 옛이야기가 제 추억 인양 더욱 반갑네요.^^ 06.10.13 17:12

 석바위

글에서 보듯이 망우리 공동묘지 바로 밑에 있다가 2번을 옮겨 지금은 면목동에 있다고 하네요. 나도 덕화여중을 들어 보긴 했는데 자로를 찾아보니 전농 국민학교 아래쪽에 있군요 70년대 초에 덕화에서 해성으로 바뀌었네요 암ㅎ든 반갑습니다. 95년도에 잠깐 프랑크푸르트엘 들렸었는데... 06.10.14 14:40

 

'내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선설과 성악설의 표본이 될 만한 두 사람  (0) 2022.11.21
자이안트(GIANT)  (1) 2022.11.21
팔씨름과 여자 친구  (0) 2022.11.21
사라진 인천의 극장들  (0) 2022.11.21
고모 이야기  (0) 2022.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