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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갈빛에 젖은 하루 본문
https://youtu.be/fHivYZ1pjZ0?si=9ceIaOgfjMQ2KO-e
갈빛에 젖은 하루
20세기의 한 획을 긋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푸르스트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보고 듣고 깨닫는 지난한 여정에서 자신이 가진 편견을 고쳐 보고 새로운 경험적인 시각을 얻음으로써 한 걸음 더 삶을 알차게 채우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로 생각한다.
오늘 친구가 내게 선사해 준 갈 빛에 젖은 하루의 여정이 바로 그러했다. 입동 지나 빛 스러져 가는 계절의 변화를 창밖으로 느껴 가며 두런두런 나누던 대화의 살가움이 그리 정겨울 줄 몰랐다. 엊저녁 식당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령에 갈 채비를 하던 광진이가 함께 가자고 하여 즉석에 이루어진 나들이길이다.
이른 아침 버스 안에서 내려다보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삶의 풍경들에서 김장 배추를 거두는 아저씨의 머리카락 위에 얹힌 빛나는 햇살은 아름다운데, 창가로 스쳐 지나는 야산의 퍼석한 단풍잎들을 바라보려니 어느새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마음 한편이 짠하다. 논바닥에 어김없이 뒹굴거리는 베일러 작업을 한 볏짚 더미들 (곤포 사일리지 bale silage) 이 무슨 거대한 마시멜로처럼 보인다. 일전에 예훈이가 저런 볏짚을 보고 무엇인가 궁금해 농촌진흥청에 전화까지 했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한바탕 웃던 기억이 난다. 이 나이 먹도록 볏짚인 줄 유추하지 못하는 친구의 순수함이 매력으로 다가섰던 순간이었다.
새벽에 올려진 메일을 확인하다가 ”미안해! 사랑해! 용서해!“라는 어느 노부부의 어긋난 사랑 얘기를 보면서 내가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이 일방적이지 않은가 아니면 의무적 선택인지 정말 사랑을 하고 있기는 한 것인가라는 성찰까지 하게 한다. 함께 살아온 지 삼십 년이 훌쩍 넘는 동안 아내를 웃음 짓게 하던 날들이 얼마나 되었던가! 저 노부부는 죽을 때까지 서로 상대를 배려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아내의 좋아하는 바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 살고 있으니 되돌아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평택터미널에서 기다리던 친구를 만나 단둘의 오붓한 여행을 떠났다. 지난겨울에도 그저 얼굴이나 보자며 "내일 점심때 보자!"라는 일곱 자 단문을 하루 전에 보내 급작스레 차가운 겨울 바다에서 따스한 추억을 품게 해 준 정겨운 친구이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천변의 아름다운 모습들에 감탄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과수원 자리에 공장들을 짓느라 여기저기 밑동을 드러내고 누워 있던 성환 배나무들의 아린 풍경들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으며 그렇게 합덕을 지나다가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행철이에게 함께 점심이나 같이 할 요량으로 전화를 했더니 하필 일을 보러 괴산에 가 있단다. 삼 년 전인가 동창 모임에서 보고 간간 전화 통화만 하였는데 아쉬움만 남기며 합덕을 지난다.
“친구야! 저기 저곳이 곡교천이다.” 멀리 노랑빛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작년에 기수형이 이곳의 장관을 보여 주려 왔었지만 바로 전날 내린 비로 인해 앙상한 가지들만 매달려 있는 을씨년스러움에 그냥 돌아왔는데 올해는 풍성한 자태들을 보여 주었다. 다만 눈에 가득 찬 화사함을 바라던 친구는 전체적으로 약간 탈색된 은행이파리들의 빛바람을 아쉬워하더라! 역시 전문가는 색감을 보는 눈이 틀리는구나! 하지만 나는 진즉부터 오고 싶던 곳에서 친구와 함께 이런 장관을 보는 것만으로 고맙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만족도는 상대적으로 틀릴 수밖에 없으니 오늘은 내가 풍요롭다 해야겠다.
"친구야 이거 아니? 계절을 느끼며 사는 사람과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 개중에 더워 죽겠어 추워 죽겠어라며 변하는 계절들이 내미는 손길을 거들떠도 안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 사람들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 있어? “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한들한들 떨어지던 은행잎을 바라보던 친구의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참 뒤에야 "그래! 움트는 봄 빛이 있다는 것 파란 여름이 있다는 것 노란 가을과 스러져 가는 갈 빛 계절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우린 힘들어도 짬을 내어 가며 계절의 변화를 이렇게 눈으로 보며 피부에 새겨 가면서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얘기하려는데 친구는 사진을 찍으려는지 강변으로 어슬렁 발걸음을 옮긴다.
곡교천을 떠나 차창 밖으로 흐르는 가을바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넓은 저수지를 지난다. 알고 보니 단일 저수지로는 한국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예당 저수지’라 한다. 저수지의 중간 즈음에 물 위에 떠 있는 나무들의 풍경이 새롭다. 오래전 아내와 함께 영평사를 다녀오는 길에 들렀던 금강변에 잠겨 있던 느티나무들의 반영을 보면서 쓴 단문이 떠오른다.
금강변에서
금강의 품에 잠긴 버드나무 가지의 반영이 가을바람에 반짝이며 교태를 부리는데 이백리 둘레길 초입에서 눈꺼풀이 감긴다고 투덜대는 아내가 귀엽다. 소풍 전날 잠 못 이루는 아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은 이래서 재밌고나! " 오호! 그 많던 뚱딴지는 어디로 갔을까!
예당 저수지를 지나는데 배속이 헛헛하다. 여행에 있어 식도락은 빠질 수 없다는 친구가 바로 앞의 마을 광시의 한우촌엘 들러 점심을 먹고 가자 하는데 영월의 다하누촌보다 규모가 큰 한우마을이 우리를 반긴다.
오래전 친구가 들렀다는' 길가식당'이라는 곳엘 찾아들었는데, 혼자 육회비빔밥을 먹으면서 누군가와 같이 오면 꼭 먹어보리라 생각해 두었다면서 호기롭게 주문한 육회와 냉면 그리고 육회무침을 곁들인 점심을 먹었다. 역시 소고기는 맛있다는 말이 허투르지 않다. 사진동호회와 함께 다닐 때는 몰랐는데 혼자 다니다 보니 한국 식당의 특성상 혼자 먹기 어려운 음식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혼밥 혼술이 유행하는 작금의 현실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배가 부르자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풍족하다. 식당 근처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차는 619번 국도를 따라 유영하듯 느릿하게 흐른다. 이윽고 오서산 자락에 위치한 신 경섭 가옥에 도착했다. 가옥 안팎으로 온통 은행나무 잎과 열매가 떨어진 채 그대로 수북이 쌓여 있다. 신 경섭은 영조 시대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에 무관으로 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녹훈되었으며 종 3품의 품계인 우후(虞侯)를 지냈다고 한다. 당상관이 아니라 집의 규모가 다소 작은 듯하였으나 무관이라 그런지 마당이 연병장처럼 넓어 가옥의 반 이상을 차지하여 그 품위를 더하면서 늦가을에 이곳을 찾는 많은 사진가들에게 그윽한 노랑빛 단풍의 멋을 보여 주고 있었다. 풍치를 좇아 이리저리 구경을 하면서 돌아다니다 빛 잘 드는 툇마루에 앉았는데 오래된 이 집의 대문이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읊는 돌쩌귀 소리에 문득 외갓집 대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니스 칠이 벗겨져 결이 그대로 보이는 낡은 나무 문패에는, 오산읍 지곶리 **번지 金 千興이라고 할아버지의 존함이 먹물로 또박또박 씌어 있다 문패 바로 밑자락 삐삐 선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누렇게 바랜 두툼한 비닐봉지 속에는 오래된 訃告들이 들어있다. 하나하나 할아버지에게 아픔을 전해주던 슬픈 소식들이지만 흉한 소식은 대문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는 삶의 한 부분을 엿보게 한다... 삐~이~ 꺽! 한 발을 성큼 들어야 넘을 수 있는 대문의 돌쩌귀 소리를 들으며, 천둥벌거숭이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돌쩌귀 부딪는 소리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어느새 석양이 뉘엿 지고 있다. 돌아갈 시간이라 아쉽지만 오늘은 느긋함과 자유로움을 오늘의 여행 주제로 내세운 친구 덕분에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들을 찬찬히 속에 담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오랜만에 가슴이 일렁이는 아름다운 하루를 보냈다.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때맞춰 아름다운 자연을 봐야 할 명분도 챙겼고, 삶을 허랑 허랑 보내지 말아야 할 것과 이렇게 친구와 함께 서로의 품속을 나누며 살아야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여행은 누구와 함께 하던지 서로 흉중의 마음을 틔울 수 있으면 이미 좋은 여행이라!
‘광진아, 우리 앞으로도 평안하게 만나 이렇게 느긋한 시간들을 함께 지내 보자꾸나..’
2017.11.11 그루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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