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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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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야기/클래식 & 크로스오버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김현관- 그루터기 2023. 2. 26. 01:04
종이를 말아서 지휘를 했던 작곡가 베버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클라라 슈만은 “지휘자는 일단 지휘봉을 손에 들면 진짜 전제군주처럼 되어 버리며 동정심 따위는 추호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한탄한 적이 있다. 호른 주자로 오랫동안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했던 리하르트 시트라우스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지휘자가 어떤 모습으로 지휘대에 올라가고, 어떻게 악보를 펴는지, 그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휘봉을 손에 쥐는지. 그것만 보아도 우리는 그가 지배자인지, 아니면 우리 편인지 알 수 있다."

지휘봉은 권위의 상징이다. 수많은 신화나 전설, 정신분석학에서도 지팡이는 남성에 대한 성적 상징이었다. 지팡이를 지닌 남자는 자기 종족의 어느 여자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지휘봉은 생김새부터가 칼이나 창을 닮았다. 지휘자는 지휘봉을 들고 찌르고 자른다. 때로는 내리 꽂는다.

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1863-1942)는, 지휘봉을 들지 않고 지휘하는 것은 '악취미의 일탈 행위' 로 규정했다. 브람스 시절에 활동했던 독일 지휘자 한스 폰 뷜로우는 오보에 주자의 게으르고 둔감한 태도를 고쳐 주기 위해 지휘봉으로 단검처럼 그를 찌를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휘에서 막대기가 처음 사용된 것은 연습 때 악보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중세 시대에는 악보가 오늘날처럼 인쇄된 작은 크기가 아니라 커다란 괘도 위에 걸린 대형 악보였고, 이것을 모든 연주자가 함께 보면서 음악을 연주했다. 중세의 교회에서는 합창대의 연습을 위해 지휘자가 커다란 악보 걸이를 두드리면서 박자를 세었다.

음악사에서 최초로 종이를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지휘봉으로 사용한 사람은 루드비히 슈포어 (1784-1859)였다. 그는 1809년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천지창조' 를 지휘하면서 지휘봉을 맨처음 사용했다. 이전까지는 바이올린 수석 주자들이 지휘자를 겸했기 때문에, 바이올린 활이 지휘봉을 대신하거나 길다란 막대기로 바닥을 쳐서 박자를 제시했다. 심지어는 맨손이나 손수건을 흔들어 지휘한 사람도 있었다. 베르디는 야전사령관들이 들고 다니는 검정색 지시봉을 사용했다.

1830년대에 프롬나드 콘서트를 지휘했던 프랑스 지휘자 쥘리엥은 멋진 콧수염을 달고 번쩍번쩍 빛나는 흰 웨이스트 코트 위에 넓게 열어젖힌 코트, 자수를 놓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지휘대에는 붉은 우단이 깔려있었고, 금빛으로 도금한 의자, 정교하게 장식된 보면대가 놓여 있었다. 그는 베토벤을 지휘할 때면 언제나 다른 사람을 시켜서 은색 쟁반에 보석박힌 지휘봉을 담아 오게 했다.

오늘날처럼 흰색의 스틱으로 된 지휘봉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멘델스존이다. 그는 런던에서 자신의 오라토리오 '엘리야' 를 초연할 때 이 흰색 지휘봉을 사용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휘봉은 홍두깨 크기의 대형 막대에서 두루마리 종이를 거쳐 흰색 스틱으로 그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지휘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은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이다. 이외에도 치프리아니 포터(1792-1871), 사포노프 (1852-1918), 피에르 불레즈가 있다.

러시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사포노프는 1906년에 10년 내지 15년 이후부터는 오케스트라에 지휘봉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9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지휘봉은 계속 사용되고 있다. 사포노프가 이 말을 한 데에는 곡절이 있었다. 한번은 그가 연습에 지휘봉을 잊고 가져오지 못한 적이 있다. 그는 이후부터 계속 맨손으로 지휘했다. 그는 지휘봉 없는 지휘자로서 러시아에서 청중들과 평론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지휘자가 갖는 독재군주적인 이미지 때문에, 현대에 들어와서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가 시도된 적이 있다. 1922년 모스크바의 페르짐판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없는 연주회를 개최하여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실시된 여러 가지 음악적 개혁 중의 하나였다. 그 중 하나는 러시아 내에 있는 모든 피아노를 부수어 버림으로써 평균율을 없애려는 시도였고, 다른 하나는 모솔로프와 같은 작곡가가 공장의 소음을 찬양하는 작품을 쓴 것이다.

겉보기에는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는 매우 민주적인 이상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악단 운영도 원만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오케스트라는 이후 10년간 지속되다가, 1932년에 해체되었다. 왈츠나 행진곡처럼 빠르기가 일정한 음악이라면 몰라도 박자가 변덕스럽게 바뀌는 음악에서 이들은 뒤죽박죽된 연주를 들려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말 뉴욕에도 잠시 동안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192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도 유진 오먼디의 스승인 레오 바이너(1886-1960)가 지휘자 없는 관현악단을 시도했다. 이것도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무지휘 관현악단은 오늘날에도 지휘자가 없던 시절의 옛날 음악을 당시의 관습대로 재현하기 위해 특히 챔버 오케스트라 규모에서 종종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