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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샹송의 형성과 발전 본문

음악이야기/월드음악-샹송,칸초네,탱고,라틴등

샹송의 형성과 발전

김현관- 그루터기 2023. 3. 2. 00:55

https://youtu.be/zqAxVrBwoqg

Jean Paul Égide Martini - Plaisir d'amour (1784 ca.)

 

샹송의 형성과 발전

1 샹송의 기원과 중세의 샹송

프랑스 샹송(la chanson française)은 멜로디와 프랑스 어 텍스트의 조화로 이루어진, 프랑스의 대중적인 노래를 일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 샹송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벨기에, 스위스, 캐나다처럼 프랑스어권 문화를 공유하는 나라들의 대중음악으로 확대된 영역을 칭한다.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샹송은 11세기에 나타났다. 그후 천년 동안 샹송의 형태, 내용, 언어 등은 다양하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샹송의 형식은 쿠플레[le couplet, 절(節)]와 르프렝(le refrain, 후렴)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하나의 이야기가 구성된다. 쿠플레는 이야기를 전개, 발전시켜 결말까지 이어가는 역할을 하지만, 내용면에서 보면 반복되는 르프랭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작가가 르프랭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샹송은 현대의 대중음악이라는 의미보다는 '성(聖)음악' 혹은 '교회 음악과 대비되는 '세속 음악'의 의미가 더 강하다. 이 시기의 샹송은 교회 음악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중세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끈 구심점은 교회였다. 당시엔 글을 아는 귀족이 드물었고 평민도 거의 글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교회는 기독교의 교리를 평신도에게 알리기 위해 그림, 조각 노래 등을 이용했다.

노래는 그림이나 조각에 비해 교회 밖의 일상생활에서도 늘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육 도구였다. 세속적인 노래는 교회의 영향력과 별개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지만 가톨릭 성가와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우선 성직자들이 대중의 레퍼토리에서 멜로디를 많이 차용했을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세속인들이 잘 알고 있는 멜로디에 가사만 바꾸어 붙인 것이다. 또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일하거나 모임에 참가하여 교회 음악을 함께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3세기의 베틀가(la chansonde toile) '앉아 있는 아가씨 (La belle se siet)'의 멜로디를 빌어서 15세기에 기욤 두파이가 교회 미사곡을 만든 식이다.

최초의 샹송은 남부 지방 속어 방언인 랑그독으로 쓰인 점으로 보아 트루바두르(les troubadours)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의 경우처럼 중세 사회는 언어로도 구분된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 성직자들은 고급 라틴 어를, 그 이외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은 속어인 로망 어를 사용했는데, 로망 어는 현대, 프랑스 어의 모태가 된다.

트루바두르는 음유시인을 지칭하는 말로, 로망 어로 노래를 만드는 시인 또는 이미 만들어진 노래를 '발견'하고 찾아내는 사람을 지칭한다. 최초의 트루바두르는 아키텐의 기욤 9세 백작으로, 현재 그의 노래는 10여 곡이 전해진다. 곡을 직접 만들어서 노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트루바두르는 다른 사람의 곡이나 이미 알려진 멜로디에 자신이 쓴 시를 붙였다.

시인인 트루바두르들의 노래는 음폭이 좁고 한 옥타브를 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트루바두르가 노래를 한다'기보다 '시를 낭송한다'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에서 20세기 이전까지 샹송 가수' 대신 '낭송자'라는 표현이 폭넓게 사용되었던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2세기 말부터 트루바두르의 시는 루아르 강을 건너 남프랑스에서 프랑스 북부, 독일,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서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이것이 트루베르(les (rouvères)의 기원이다.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는 활동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구별된다. 독일의 트루베르는 후일 미네젱거(minnesänger)로 발전한다.

또한 트루바두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트루베르는 더 나아가 새로운 장르의 노래를 만들었다. 베틀가, 풍자 노래, 술을 마시며 노래하는 권주가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특히 발라드 같은 정형시를 만들고 정형시에 새로운 리듬을 넣어 일정한 멜로디에 맞춰 춤출 수 있는 캐럴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 점에서 트루베르는 듣기 위주의 작곡을 했던 트루바두르와 구별된다. 그때까지는 주로 귀족 계급이 이들의 노래를 즐겼으나 춤곡이 만들어진 이후엔 노래를 즐기는 계층이 중산 계급인 부르주아 층과 일반 평민에게로 확대되었다. 프랑스의 노래는 비로소 특정 계급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모든 계층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성직자들도 트루바두르, 트루베르 등과 함께 방랑하면서 로망 어나 라틴 어로 삶을 즐기는 에피큐리언 풍 노래를 작곡했는데, 그중 몇 곡이 현재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 원본에 남아 전해진다.

현재까지 알려진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는 460여 명에 달하며 2,500여 편의 시와 250여 곡의 노래를 남겼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시와 노래의 영감을 얻었을까? 당시 사회 문제, 특히 십자군 운동은 좋은 소재가 되었다. 잘 알려진 인물을 풍자하거나 칭송하는 등 시대적 상황이나 자연을 소재로 삼은 노래들도 유행했다. 학자와 귀족들은 세련된 사랑을 그린 궁정풍 연가(戀歌)를 많이 남겼는데, 사랑의 노래야말로 트루바두르가 남긴 음악 중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그런데 어떤 신분이나 계층의 사람들이 트루바두르나 트루베르가 될 수 있었을까? 로망 어를 아는 사람이면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왕, 백작 등 귀족부터 교회 수사, 상인, 기사, 더러는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다양한 계층이 트루바두르나 트루베르로 활동했다.

이후 13세기 초반이 되면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가 나타나는데,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는 혹은 실을 잣는 여인들을 위한 베틀가이다. 베틀가는 대개의 경우 멜로디가 단순하고 슬프며, 수를 놓는 젊은 아가씨나 여인이 노래에 등장한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클로드 뒨통에 의하면 베틀가는 단순히 여인들이 베를 짜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사실적 이야기로 구성된 이 노래에는 중세 사회의 규범이, 특히 귀족 사회가 묘사되고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11세기 마틸드 여왕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바이외 태피스트리(la Tapisserie de Bayeux)'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중세에는 실을 잣고 수를 놓는 일이 여왕과 귀족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어여쁜 도에트(Belle Doette à la fenètre assise)'를 보자.

창가에 앉아 있는 어여쁜 도에트, 책을 읽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지요. 온통 사랑하는 도온 생각뿐. 그는 멀리 다른 나라로 싸우러 떠났습니다.

커다란 접객 홀에 이르는 계단 앞에 시종이 멈춰 서더니 말에서 짐을 내려놓았어요. 도에트는 지체 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랫동안 뵙지 못한 나의 주군은 어디에 계시나요?"

도에트는 재차 물었습니다. “사랑으로 모실 내 주군은 어디에 계시나요?"“마님, 이젠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군요. 주군께선 돌아가셨습니다."

도에트는 탄식하기 시작했어요. “충직하고 훌륭하신 도온 백작, 불행히도 당신께선 가 버리셨군요. 당신에 대한 사랑의 징표로 이젠 고행자들이 입는 속옷을 입겠어요. 더 이상 털외투를 걸치지 않겠어요. 생 폴 교회에서 수녀가 되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자 도에트는 커다란 슬픔에 빠진다. 중세에는 전쟁이 흔했고, 전쟁터로 떠난 애인이나 남편의 죽음으로 여인 홀로 남게 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이다.

베틀가는 사랑의 기쁨과 슬픔뿐만 아니라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특히 혼전 임신을 경계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당시 미혼의 젊은 아가씨에게 혼전 임신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수녀가 되겠어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자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서까지 한 남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중세 시대의 애정관이 드러난다. 사실 여자들의 삶은, 특히 남편이 죽은 여인들의 반쪽 삶은, 수녀원 안에서건 수녀원 밖에서건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사회의 규범에 의해 언제나 보호받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감시받는 삶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중세 사회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베틀가를 남자들이 딸이나 아내를 가르치기 위해, 다시 말하면 남자에게 종속되는 여자의 삶을 준비시키기 위해 만들었으리라는 추정이 힘을 얻는다. 당시 교회에서는 라틴어로 설교하였기 때문에 여자들이 설교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일상생활에 대한 설교는 드물지 않았을까? 여자들을 위한 교육 기관도 없었던 이런 상황에서 샹송은 특히 베틀가는 여자들을 위한 예의범절 전서였고 인생의 교과서였다. '어여쁜 도에트'를 부르며 여인들은 도에트의 불행과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다. 이후 18~19세기에 베틀가는 로망스로 부활하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노래가 '사랑의 기쁨 (Le plaisir d'amou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