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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샹송의 발전과 확산 본문
샹송의 형성과 발전
2 샹송의 발전과 확산
트루바두르와 트루베르의 출현은 이후 샹송의 내용과 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대부분 시인이었기 때문에 샹송에서 당연히 멜로디보다는 텍스트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러한 샹송을 텍스트 위주의 샹송(la chanson à texte), 혹은 문학적 샹송이라 칭한다. 이런 전통은 16세기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Pierre de Ronsard)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가, 19세기에는 몽마르트르의 카바레를 중심으로, 20세기에는 작사-작곡가수(sing a song writer) 세대의 출현과 생제르맹데프레(SainGermain de Près: 센 강가 주변을 이르는 말)와 함께 부활한다.
16세기 들어서는 음악가와 시인의 교류가 본격화되었는데, 이 분야의 혁명은 피에르 드 롱사르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최초로 음악가와 공동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는 1552~1553년 세르통과 자느캥 등의 작곡가의 음악을 곁들인 시집『사랑(Les Amours)』을 발표한다. 악기가 없거나 여러 목소리가 어우러지지 않은 시 낭송은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듣기 좋은 목소리가 함께하지 않는 악기 연주도 아름답지 않다고 단언하며 그는 시에 음악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곡이 붙여진 그의 시는 현재 300편이 넘는다.
이처럼 이 시기까지 샹송에서 멜로디 부분은 텍스트를 돋보이게 하는 보조 자격에 머무른다. 이 시기 샹송의 특징 중 하나는 텍스트가 멜로디와 긴밀히 밀착되어 노래에서 가사가 멜로디보다 우위를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텍스트는 멜로디에 비해 유행에 덜 민감하고 시간의 흐름을 잘 견딘다. 과거에 유행한 노랫말을 요즘 리듬에 맞게 편곡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만 보아도, 텍스트는 보편적 진리를 노래하며 시간을 초월해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멜로디는 가사만큼 중요하다. 당연히 프랑스 샹송의 정수는 가사와 멜로디의 완벽한 조화에 있다.
16~17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유형의 노래들이 나타났다. 평민은 특히 당시의 종교나 정치적 상황을 풍자한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리고 '퐁네프(Pont Neuf)'가 등장했다.
파리 퐁네프 다리 밑에는 풍자 가요 작가나 풍자 글을 짓는 사람들이 많이 숨어 지냈다. 이들은 정치적 이유로 다리 밑에 숨어 지냈는데, 이러한 현상은 마자랭 시대부터 나폴레옹 1세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 다리 밑의 시인과 작가들은 대부분 당시 정권을 비판하고 그에 저항하는 세력이었다.
프롱드의 난 때 이곳에서 마자랭을 풍자하는 노래가 생겨나기도 했다. 프랑스 역사 속의 많은 사건이 노래 속에서 칭송받기도 하고 비난받기도 했는데, 퐁네프에서 만들어진 노래는 민중의 의견을 대변한 노래라고 불리웠다. 널리 알려진 노래의 멜로디에 다른 가사를 붙여 만들어진 풍자 노래들은 곧 퐁네프라는 이름으로 분류된다. 다시 말하면 퐁네프는 다리 이름이면서 동시에 잘 알려진 곡조에 가사를 붙인 비교적 짧은 풍자 노래를 말한다.
사실 선동적인 포교 노래는 이미 12세기 방랑 성직자인 골리아르 시대부터 유행했다. 종교전쟁 이후 루이 13세와 리슐리외는 전쟁으로 텅 비어 있는 국고를 채우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검열이 강화되었지만 풍자 가요 작가는 곧바로 이 사실을 폭로하고 비판했다. 특히 프롱드의 난으로 이어지는 몇 년동안 정치적 샹송은 가장 중요한 위상을 지니게 되는데, 마자랭을 풍자하는 「마자리나드(Les Mazarinades)에만 6,000곡이넘는 노래가 실린다. 쏟아져 나오는 노래를 더 이상 검열할 수없는 지경에 이르고, 결국엔 "나는 창녀 같은 우리 여왕을 목졸라 죽이고 싶어." 등 직설적이고 난폭한 가사로 채워진 노래집들이 유포되었다.
종교전쟁이나 프롱드의 난 같은 중대한 사건에 관한 노래들은, 특히 풍자 노래들은 퐁네프 다리에서 불렸다. 그런데 왜 퐁네프 다리인가? 중세의 거리는, 특히 파리의 거리는 센 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해 진흙탕인데다 울퉁불퉁 기복이 심했다. 그러나 퐁네프 다리 부근은 편평하고 탁 트인 공간이었다. '새로운 다리'라는 뜻과 달리 1604년에 완공된 퐁네프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석조 다리이며 가장 긴 다리이고(길이 232m폭 20m) 최초의 지붕 없는 다리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에는 대부분의 다리가 목조에 지붕을 씌운 형태로 되어 있었다.
또 퐁네프는 파리 중심부에 위치하며, 최초로 센 강을 건널수 있는 다리이기도 했다. 화창한 봄이나 여름 저녁, 사람들이산책하러 이 다리로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엔 언제나 장이 열렸다. 따라서 퐁네프는 포교와 선전과 소요의 진원지가 되면서 수많은 소식을 만들어 내고 퍼뜨리는 대표적인 장소가 된다.
퐁네프 다리는 사람들의 의견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했다. 요즘의 텔레비전 스튜디오처럼 모든 것이 이곳에서 토론되고 다루어지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파리에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느냐?"고 묻지 않고, "퐁네프에서 어떤 노래가 불리느냐?"고 물었다. 퐁네프엔 완전한 표현의 자유가 있었다.퐁네프는 파리의 중심에서 더 나아가 프랑스 왕국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서 불리던 노래들이 장터를 돌아다니던 악극단, 광대, 가수 등을 통해 지방 도시로, 시골로, 산악 지대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샹송을 통해 프랑스어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지고 일반화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파리를 제외한다른 지방에서는 방언을 쓰고 있었다. 예를 들면 브르타뉴 지방의 뱃사람 노래는 지방 언어로 불렸지만 그 노래가 다른 지방으로 전파될 때는 파리 중심의 프랑스 어로 바뀌었던 것이다. 모든 노래는 퐁네프를 거쳐 다시 퍼져 나갔고, 그러면서 지방어는 프랑스 어로 바뀌어 다시 전파되었다.
이처럼 샹송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에 이미 표준어 확산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이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처럼 노래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방 언어가 배제되고 파리 중심의 표준어가 형성되었다.
교회나 종교를 비판하는 노래들은 중세에도 있었지만, 종교전쟁이나 퐁네프처럼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 시기가 처음이었다. 이런 정치적 샹송은 혁명이나 전쟁 등의 위기 상황에서 더욱 힘을 얻었다. 대표적인 정치적 샹송이라면 프랑스 대혁명 시절의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들 수 있다. 이 곡은 금지와 해금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었으나 제3공화정 시대인 1879년 프랑스 국가(國歌)로서 그 입지를 굳혔다.
16세기 말 보따리 장사들은 외딴 시골 마을까지 내려가 소식지를 팔았다. 여기에는 각종 사건들이 적혀 있었고, 그림을 비롯해 노래 몇 곡이 실려 있었다. 이처럼 문자화된 소식지도샹송을 보급하는 데 한몫을 했다. 16세기 이후 노래는 커다란 사건의 전모를 밝히거나 자신의 의견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샹송의 정보 전달자 역할은 중세 이후 지속되다가 신문이나 잡지 같은 인쇄 매체가 발달하는 19세기 들어 점차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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