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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눈 오는 아침의 소묘

김현관- 그루터기 2024. 8. 11. 20:01
눈 오는 아침의 소묘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아침을 온통 하얗게 덮어놓았다. 어릴 적엔 눈이 오면 그저 밖으로 뛰쳐나가 노는 게 당연했다. 첫 눈발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흥분된 마음으로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시절의 설렘보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은근히 투덜대는 마음이 앞선다. 어쩌면 이게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드는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엊저녁부터 눈이 오면 어떤 옷을 입을까 걱정하던 아내는 아침 일찍 근무를 위해 집을 나섰다. 출근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 나이에 이제는 집에서 푹 쉬어야 할 텐데, 못난 남편 덕분에 여전히 일터에 나가야 한다니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오늘 퇴근 후에는 아내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정성껏 다리를 주물러 줘야겠다. 눈이 오는 날이라 발걸음이 더딜 테니, 아내가 돌아오는 길이 무사히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눈 내리는 아침이 되니, 여기저기서 친구들과 지인들의 연락이 온다. 십정동에 사는 누님도, 숭의동의 누님도 눈발에 움직이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전화로 안부를 전해왔다. 모두들 연세가 있으니 눈길에 나서는 것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송현동에 사는 누님은 좀 다르다. 눈이 내리는 순간을 마치 소녀가 된 듯 예찬하며, 자유공원과 삼두아파트 동네가 하얗게 빛나는 광경을 흥분된 목소리로 전했다. 참으로 시인은 시인이다. 목소리에는 순수한 기쁨이 묻어 있었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해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창밖을 바라보니, 집 안의 고요함 속에서 이따금씩 흩날리는 눈발이 그저 평온하게 느껴진다. 어릴 적과는 달리, 이제는 이런 날씨에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지는 걸 보니, 확실히 나이를 먹은 게 실감이 난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눈 내리는 날은 즐거움보다는 걱정을 더 불러오는 날이 되었다. 자칫 움직이다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날에는 밖으로 나서기보다는 그저 집 안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음악을 틀어놓고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멜로디에 몸을 맡기며 하루를 보내는 것. 눈 내리는 겨울날,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듣는 음악만큼 위안이 되는 것은 없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마음을 다독이고, 복잡한 생각들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겨울의 눈은 그렇게 사람들의 일상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단순한 놀이의 대상이었던 눈이, 이제는 우리에게 조심스러움과 더불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한다. 눈 내리는 오늘, 나는 그저 이렇게 창밖의 풍경과 음악 속에서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하루를 정리한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서 눈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도, 자연의 일부처럼 변화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제는 창밖의 눈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점점 더 조심스러워진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눈이 내리는 오늘, 나는 이렇게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일도 무사히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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