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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신포동의 술집들 본문

내이야기

신포동의 술집들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3. 10:04

신포동의 술집들 

젊은 시절!

신포동 일대는 내 젊음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희로애락의 추억의 창고이다. 친구와 술과 대화와, 그리고 귓전을 간질이던 떠돌이 악사의 클라리넷 음률이 어우러지던 내 삶의 활력소의 장이다. 펄떡이며 살아 숨 쉬던 거리에서 유독 밤의 시간을 감싸 안아주던 주점들에서의 치기 어린 대화와 부침들이 내 인생과 엉켜 나를 성장시켰다.

 신포동은 "금강제화"를 꼭짓점으로 약 90도 각을 포용하고 대각선 끝 언저리의 "외환은행"과 사각형 변을 어우르는 일대를 얘기한다."제일은행"을 중심으로 중구청 쪽 방면 까지를 흔히 신포동이라 하지만 그곳은 엄밀히 말하면, 행정구역상 중앙동이다. 여하간 경동과 중앙동 일부를 포함하고, 신포시장을 포함한 주변부 일대를 신포동이라 칭하면, 무리함이 없을 것이다.

 강남이 득세하기 전까지 부산의 서면과 남포동과 더불어 유행과 소비의 대명사로 불리던 신포동은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고부터 차츰 쇠락하여, 옛 영화를 그리며, 재기에 몸부림치는 공룡이자 아웃사이더가 되고 말았다.

 어느 무료한 오후!

나는 심심할 때면 예전의 기억들을 되살려 보는 재미있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내 삶과 연관된 끈들을 되짚어 보는, 시간 죽이기에 매우 좋은 방법이다. 살아오며 만나 보았던 사람들의 이름 들이랄지, 노래 제목 이랄지, 암튼 스스로 생각의 주제를 주어 놓고 그 주제에 대하여 하나하나의  구성 요소를 기억해 내는 재미있는 습관이다. 그로 인해 " 사라진 인천의 극장들"을 써 보았었다. 

 그날도 그렇게 예전의 내가 즐겨 다니던 신포동 주변의 술집 이름 들을 주욱 나열해 보았다. 상호가 기억 안 나는 집들과 몇 차례 안 다녔고 별 인연이 없이 무덤덤 한 곳들을 제외하고도 훌쩍 100집이 넘어가 버린다. 하지만 내가 확인했거나, 없어진 모르는 곳들이 꽤 될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다. 하릴없이 술집 이름이나 끄적이고 있는 나도 참그렇지만 이 술집들에서 나와한 때 연이 맞아 한 대포 하던 이들이 이 잡문을 보게 되면 추억거리로 되 뇌어 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듯하다. 혹여나를 아는 이가 이 글을 보게 되면, 그때의 장면들을 회상하며 술 안주감으로 요긴하게 써 주길 바란다. 내게도 잔 하나를 권하면 금상첨화 일터.... 오늘도 신포동에서는 많은 이들이 한 잔 하며 두런두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을 것이며, 나도 그중의 하나이다.

 

고고장!

젊은 시절 주로 다니던 클럽(일명 고고장) 중에 특히 생각 나는 곳은, 동인천 역 앞의 서울은행 지하에 있던 "인영 고고장"과 동인천 길병원 맞은편 "인형극장"자리 지하에 위치한 "신광 나이트" , 그리고 신흥동 창고지역의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 뉴-반도"(한 동안 그룹"사랑과 평화"가 공연을 했던 - 나중에 신흥 카바레"로 바뀌었음)와 맞은편 누리 타워 자리에 소재한 "뉴-월드 관광나이트"가 있었다. 이중 "인영"과"신광", "뉴-반도" 세 곳은, 총각시절 연애하던 유 모양과, 우리 둘에 항상 붙어 다니던 또 다른 유 모양과 김 모양과 함께 무시로 드나들며, 젊음을 만끽하던 곳이다. 유양 아버지의 적극적인 반대로 결국 헤어지긴 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도 처녀시절의 희고 예쁜 얼굴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천 사람들이면 다 아는 "상공회의소" 건물 맞은편에 극장식 나이트클럽"국일관"이 있다. "국일관"은 당대 유명한 가수와 탤런트들이 총 출연 한 곳으로 꽤 오랫동안 그 명성을 유지했다. 허세를 부리며 택시를 잡아타고 2차를 가던 "올림포스호텔" 내 "다-빈치"클럽이 있는데, 일단 계산을 하고 나면 술이 확 깨는 곳이어서 젊은 시절에는 별로 가보지 못한 곳이다. 인천 생활을 하며 만난, 유일한 고등학교 선배인 상준이 형님께서 늦장가를 가며 결혼 기념주를 낸다며 들렀던 "다-빈치"에서 돈이 모자라 예물시계를 맡겼던 일은 아직도 우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일화이다.

 호프집 !

더운 여름날! 시원한 생맥주가 생각나면 주로 들리게 되는 호프집들이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에 (80년대 후반) 꽤나 독특하고 운치 있던 카이저-호프라는 곳이 있었다. 원목과 밧줄로, 널찍하며 높이도 꽤 되는 실내를 장식하여 이국적 풍물을 느끼게 해 준 이곳은 주로 흑맥주를 마시러 다니던 곳이었는데 지금 한중문화관 근처 (구 일본 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옆에 자리 잡고 있었던 관계로, 아는 이들만 들락거리는 곳이었다. 다소 교통이 불편해서 그랬는지 어느 사이 슬그머니 없어지고 말았다. 아쉬움이 남는 곳 중의 하나이다.

또 한 곳! 이십 대 후반에 종종 들리던 곳 중의 하나가 용동 큰 우물 들어가는 입구의 대로변 건물 이층에 "로젠 켈라"라는 곳으로 나이 드신 분들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바니-걸들의 서비스가 이채로움으로 유명했는데, 그녀들은 절대 자리에 합석하지 않았다. 그곳은 폐업하기 얼마 전에 전라의 스트립-쇼를 하는 저급 업소로 변질되기는 했지만, 그 이전의 "로젠-켈라"의 품위를 아시는 분이면 그곳을 인천의 술집 중 하나로 꼽아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은 곳이다.

용동 큰 우물 앞에는 지금의 4-5십 대들의 로망의 장소였던, "마음과 마음" , 그리고 "카네기"라는 호프집이 있는데 특히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 "마음과 마음"의 난쟁이 아저씨는 당시 최고의 마스코트 중 하나였다 "카네기"는 내 첫사랑과의 마지막 헤어짐의 장소로 , 공교롭게 "폴 모리아 악단의 ""Love is blue" 음악을 들으며 이별을 고했던 가슴 아픈 추억의 장소였다." 아! 젊음의 시련과 아픔의 이름이여..."그리고 "동방극장" 자리의 이층에 위치한 호프집은 무명가수들의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며 독일식 소시지 안주를 맛있게 해 주던 곳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하고 있는지? 아직도 운영하고 있는 가게중 그래도 자주 가 본 곳으로는 "불칸 호프"가 있다. 신한은행 대각선 방향에 있는 실내가 넓은 곳이지만, 우리 일행은 꼭 안 쪽의 10명 정도 둘러앉을 수 있는 자리만 선택해서 즐기던 기억이 난다.

 이색적인 곳으로는 해안동 "등대 경양식" 뒤 쪽에 위치한 "씨-맨스 클럽"이 있다. 외국 선원들과 군인들을 위한 곳으로 모  신문사 일을 하는 "S.M" 형님과 둘이서만 종종 들렀던 곳이다. 외국인 전용 클럽이기는 하지만, 내국인의 출입도 제한하지는 않았다. 아가씨들에게 일정 시간당 술 한잔씩을 사 주어야 얘기를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술 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운영하는지는 모르겠다.

 스탠드-바 (Stand - Bar)

80년대 초반부터 소극장처럼 우후죽순 생겨나며 한동안 꽤 유행하다가 지금은 거의 자취를 볼 수 없는 스탠드-바라는 형태의 술집들이 있다. 한 업소의 운영권을 지분별로 나누어 운영하던 곳이며,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지금의 카페 형식의 업소가 번성하게 되는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술 마시다 노래를 부르게 되면 , 곡당 천 원을 (나중에는 이천 원) 올갠 반주자에게 지불하는데, 노래를 즐겨 부르던 이는 술값보다, 노래 값이 더 나오기도 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스탠드-바의 운영 방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여 이후 단란주점과 노래방의 등장과 함께 직격탄을 맞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내게 있어 스탠드-바라고 하면, "대부 스탠드-바"를 우선 손꼽는다. 그중에서도 17번 코너의 정양이 특히 생각난다. 용동 마루터기 아치탑에서 큰 우물로 내려가기 전 초입의 삼각형 형태의 자리에 위치하였다. 큰 우물 옆쪽에는 "인터내셔널" 스탠드-바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동석형과 대부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단골로 다니던 집이었다. 

신포동 한가운데 신한은행 지하에 위치했던 "An An" 은 특수부대 출신의 백 모 계장이 활극을 벌였던 곳으로 기억이 삼삼하다. 테이블 위를 날쌘 고양이처럼 날아다니던 모습을 지켜보며, 참으로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곳이다. 성가대 대선배가 올갠 반주를 하던 신포시장 내 약국 앞의 "백악관" 은 악사로 올갠을 연주하고 계신 선배가 부담스러워 좋은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못 가던 곳이다. 한 동안 주인의 요염함에 끌려 자주 들렸던 세계 극장 지하에서 영업하던 "뉴-욕 스탠드 - 바" 와 새마을 협의회장을 하던 이가 운영하던 신흥동 로터리 인근의 "향도 회관" 이 있으며, 그 바로 위의 "미 스탠드-바"는 젊은 사장과 당구를 치며 어울렸던 관계로 자주 들리던 곳이다. 또한 백제호텔 뒤편의 "갈채"와 그 근방의 " 인천항" 은 한가운데 둥근 테이블을 두고 코너를 나누었던 곳으로 나의 영원한 술친구 " B.H"와 자주 다니던 곳이다.

창 밖의 해가 뉘엿뉘엿 소월미도 등성이에 걸릴 때쯤이면, 여기저기 전화벨 소리가 힘차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오늘은 어느 곳으로 발길을 돌릴까 궁리한다. 수백 명의 직원들과 복닥거리다 보면, 어느 한 구석에서건 술 마실 거리가 생긴다. 설혹 퇴근 시간이 늦어 혼자 신포동 거리를 걷다 보면, 누군가 튀어나와한 잔 권하는 이가 있어 나같은 주당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동네라 하겠다.

Cafe

소주 한 잔 걸치고 나면 2차를 가게 되는데 종종 가는 여러 집 둘 중 아주 재미있는 카페가 한 군데 있다. 신한은행 바로 앞에 "Camus"라는 아주 작은 카페가 있는데 문을 들어서면 일자 형태의 두 평이 채 못 되는 면적에 손님들이 한 줄로 늘어 앉을 수밖에 없고 그나마 7명이면 꽉 차고 마는 협소한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여주인이 똘똘하여 제법 단골들이 많은 집이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오십이 넘어서도 예전 귀여운 자태가 있을지 궁금하다.

 건흥 아파트 뒤 편에 있던 "조이너스"는 여주인이 등에 난 커다란 종기를 제거해야 하는 수술을 해야 하는 처지를 알고 당시에는 지역 의료보험이 없던 시절이라 남편 행세를 하여 수술을 도와준 인연으로 십여 년을 단골로 지낸 특이한 경우이다. 단체로 몰려가 큼직한 매상을 종종 올려주어 귀빈 대접을 받던 집이다

"쟈이안트"는 별도로 소개를 한 바 있어, 여기에서는 차치하고, "후생병원" 앞의 "흐르는것이 어찌 물뿐이랴! " 라는 긴 상호를 가진 곳도 있다. 그 곳에서 신문사 일을 하는 문일 군과 연을 맺은 곳으로 곳으로 기억 하지만, 철학적인 상호에 걸맞은특이한 점은 없던 곳이다. 문일 군과 종종 가던 곳 중 "중화루" 뒤편의 음악 전문 카페인 "탄트라"가 있는데, 우리와 주인의 취향이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간혹 논쟁을 벌이다 쫓겨나기도 했다. 참 개성 있는 주인이다. 하지만 투박한 칼라 유리로 장식된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과 그 불빛에 일렁이는 수많은 먼지들이 컴컴한 실내를 비추일 때의 퇴폐적 분위기가 맘에 들던 집이다. 문일 군의 건강이 염려된다. 참 올곧은 친구인데 잃을까 적이 걱정된다.

 "대성 불고기"옆의 "스테이션"은 여주인의 뛰어 난 미모와 실내장식이 깔끔하고 이층의 널찍한 공간을 활용할 수 있어 회식 후에 단체로 자주 가던 곳이다. 병뚜껑 카페로 알려진 "뽀야"는 이름만 차용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바로 옆 건물 이층과, 현재의 자리를 옮겨 가며 영업을 하고 있다. 동석형과 여주인이 잘 알던 사이라 종종 다니곤 했었는데, 즐겨 다니던 이곳저곳에 돌아가신 동석형의 체취가 묻어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대폿집

술집이라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스며있는,대폿집이 최고다. 주당들의 허름한 주머니 사정을 가장 잘 이해 해주고, 외상장부에 이름을 올려 놓아도 부담이 없는 곳이 대포집 말고 또 어디 있으랴!

20대 초반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드나들던 용동 큰 우물 주변의 "이모집"과 "고모집" 그리고 "큰우물집"에서 막걸리와 빈대떡을 먹고 마시며 호기를 부리던 일은 젊음의 특권이 아니었나 싶다. 추억의 이름들이다. 자유공원을 오르는 초입에서 번성하고 있는 삼치골목을 있게 한 "버드나무집"이 있다. 허름한 나무 대문을 열면 늘 왁자하니 젊은 인생들이 모여 앉아 시론과 담론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느덧 아홉 시경이면 일찌감치 파장 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시인묵객들과 식자층들의 단골로 유명한 신포시장 안에 위치한 "백항아리 집"과 "신포 주점" "미미집"들에 얽힌 많은 사연들은, 인천 문학사와, 문인들의 이름과, 그네들의 행적의 시발점이며 종착역으로 남겨두려 한다. 사실 난 그곳에서 별다른 매력을 별로 못 느꼈고 단지 싸게 나오는 술 값 때문에 자주 가곤 했다.

시장 안의 "신포 순대"에도 간간 들리며, 시장 순대의 참 맛과 국밥의 구수함, 그리고 쫄깃한 간을 음미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맞춤양복으로 소문난 "황제 양복점"의 두어 집 밑으로, " 마냥집"과 "염염집" 이 있다. 동그랑땡과 파전 등 각종 전과 시원한 생굴을 주로 팔던 집으로 나뿐 아니라 신포동을 찾는 많은 이들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위에 열거 한 곳 외에 족발과 홍어찜으로 알려진 "대전집"과 바로 앞의 "스지탕"을 자주 시켜먹었던, 얼굴 퉁퉁한 그리고 손이 두텁한 인상 좋은 아저씨의 "다복집" 이 있다. 균형이 안 맞아 간혹 둥근 테이블이 기우뚱할 때면, 담배 껍질로 받침을 하여 균형을 잡던 소소한 기억이 있는 집이다.

지금의 마사회 건물 맞은편에 "⺠"이라는 주점이 지금 꽤나 유명세를 타고 있는 듯한데,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 주인네의 풋풋함과 좋은 분위기와 무엇보다도 사무실과 가까워 술이 급할 때면 志友 들과 자주 어울리던 곳이다.

신포동과 조금 떨어진 곳 중 신흥시장 입구의 지금 게장집으로 유명해진 "성원식당"이 있다 그 건너편에 서너 군데 목로주점들이 있다. 그곳에서는 주로 생간과 천엽의 고소함을 느끼던 집들이다. 또한 고인이 된 영현 선배와 자주 들리던 당시 신흥파출소 옆 자락에 있는 "주마등"의 감자탕도 참 맛있게 먹던 집 중 하나다. 지금은 감자탕집이 흔해지고 성의가 없어서인지 맛도 없어 기피음식 중 하나가 되어 버렸지만, (같은 이유로 해물찜과 아구찜도 기피 음식중 하나가 되었다. 음식점 주인들은 각성해야 한다. 가격에 비해 먹을 게 없다.) "주마등"의 감자탕은 양뿐 아니라 맛도 기가 막혔고 무엇보다도 엄청나게 싼 값에 앉은자리에서 2- 3 냄비 정도를 먹기도 했다.

조금 여유가 돌 때면, "대성 불고기"에서 콩나물국을 즐기고 (고깃집에서 웬 콩나물국? - 아시는 분은 안다.) "신한 불고기" 에서 돼지주물럭과 고기찌개를 먹고 마시며, (장사가 잘 되어서인지 구월동에도 분점을 냈다.) 주택은행 뒤쪽의 수육과 설렁탕을 자주 먹으러 가던 "중앙옥"에도 들리고 인천 돼지갈비의 원조격이었던 지금은 기억에서 조차 잃어버린 "조선옥" 과  "신포 주점"옆 의 "대동강" 등등 입 맛 따라 발 따라 들리던 여러 곳이 있다.

 해장국

이런저런 이유로 과음을 하고 난 다음 날이면, 속이 뒤집히는 쓰라림을 겪어야 한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죽을 뻔 한 병치레도 한 탓에 술을 즐기지는 않는 편이나, 누구라도 해장을 잘해야 몸을 保 할 것이다.

속풀이 하던 곳 중 중구청 밑의 "동방집"은 할머니가 운영하실 때 소고기 뭇국이 정말 좋았다. 나무를 때던 부뚜막의 가마솥에서 퍼 주시던 고슬고슬한 까만 콩밥과 잘게 찢어낸 소고깃국에 파를 듬뿍 넣어 고춧가루를 설렁설렁 쳐서 먹게 되면, 뒤집히던 속도 금세 갈아 앉았다. 근처 대로변 초입에 있던 "춘천 식당"의 얼큰한 생태찌개는 속풀이에는 그만이었으며, "외환은행 맞은편 "신성루" 뒤편 골목의 "이조 복집"에서 끓여 낸 말간 지리도 속 달래는 데는 일품이다.

새벽에 출근하는 날에는 "평양옥"과 신흥 로터리 의 " 신생 불고기 " 인천여상 밑의 " 선미정"에 가서 먹던 우거지 해장국들의 맛이 지금도 삼삼하다. 신포시장 안에도 꽤 유명한 "답동관"과 설렁탕을 잘하던 "금화 식당" 이 있었지만 명성만 남았을 뿐이다. 제일 중요한 한 곳! 사무실 등나무 밑의 할머니 매점에서 먹는 사발면이 우리의 해장음식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기실 술 먹은 다음 날은 아침도 못 먹고 출근하는 일이 다반사이거늘 출근 후 근무 중에 어디 가서 해장국을 먹을까는-- 언감생심! 그저 날계란 한 알 툭 깨서 사발면에 넣어 먹던 그 뜨끈한 국물 맛이라니...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젊음의 호연지기와 흰머리카락을 늘리며, 인생의 맛을 일깨워 주던 신포동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또 내 인생의 변환에 따라 차츰 뜨악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곳은 내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며, 어머니의 품과 같은 포근한 역할을 하고 있다. 친구 정구와 처음 술을 접했던 신포시장 안의 큼지막한 야채 튀김집은 없어지고, 새로 고쳐지은 "경남 횟집"의 건물이 생경하듯이 세월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만, 쫄깃한 민어회의 맛과 나의 신포동에 대한 애정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며, 지금도 많은 이들이 신포동을 추억하고, 또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젊음과 인생을 안주삼아 잔을 기울이고 있을 터이다. 2008 년 생일날에

 

신포동과 중앙동 일대 - 왼쪽끝 짙은 녹색건물이 팽고팽고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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