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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하인천의 추억 본문

내이야기

하인천의 추억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2. 20:32

 하인천의 추억 

 자유공원에서 하인천 방면으로 4부 능선의 언덕배기에 기가 막히게 지어진 한동짜리 아파트가 신일아파트다 지어진지 오래되어서 녹색 페인트를 자꾸 덧 발라 아주 흉물스런 모습이다. 그곳 3층 베란다에 내가 서있다. 날씨도 매우 화창하고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며 이사람 저 사람 만나보는 것도 수월찮은 재미가 될 것 같다.

 바로 왼편 눈앞 길 건너 막 다른 골목의 ㄱ자형 집이 인천에서 꽤 많은 배를 소유하고 계신" 장 수환'선생 댁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는데 집을 들어서면 왼편에 조그만 아주 앙증맞은 정원이 눈에 띈다. 넓다 할 수 없는 앞마당을 지나 집안엘 들어서면 평범한 일본식 집의 전형이랄 수 있는 다다미 방이다. 1층은 그렇고... 2층을 올라가면 아주 보기 좋은 전망을 가진 방이 하나 있다. 삼면이 유리로 탁 틔어진 전경이, 비 오는 날 술 한잔 생각나게 하고 낙엽 지는 날 차 한잔 생각나게 하는 예쁜 전망을 가진 방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정원은, 진정한 공간 배열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이곳만 딱 떼어다 우리 집 옥상에 올려놓고 싶다.

 조금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88계단 못 미쳐 전파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젊었을 때도 머리가 희끗희끗했던 이성진 씨는 10년 전 한가하던 어느 날 화창한 오후! 우연한 장소에서, 중, 동구 케이블 T.V 이사 명함을 내게 쓰윽 내밀며 씩 웃는다. 아예 백발이 다 되어 보기 좋게 나이 든 성진 씨의 웃음이 매우 싱그럽다. 전파사에서 케이블 TV 이사까지 되었으니 꽤 성공한 셈이다. 내가 하인천을 떠난 지 30년이 다되어가니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옆 88계단에는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와 고동과 번데기에다 소주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계단에 줄 지어 앉아있다. 날씨가 좋으면 곧잘 장사가 되는 듯 보인다. 계단 꼭대기 오른편에는 중국인 교회가 동그마니 앉아있다. 늘 소리가 안 들려 언제 예배를 보는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중국에서 보내온 패루에, 음식점에, 상점에, 온통 붉으죽죽 중국풍으로 장식되어있어 옛 88계단의 정취를 느끼기는 힘들다.

 계단에서 조금 내려가니 황해 여관이 보인다. 하늘색 타일을 붙이고 60~70 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역 뒤편에 있는 어시장이 번성할 무렵 함께 왁자했던 전성기를 뒤로한 채 퇴락한 모습으로 을씨년스럽게 제자리를 지키더니 이제 다시 화려한 중국 요릿집으로 변신하여 제2의 번성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황해 여관 바로 옆집은 친형과 다름없던 박 순태 씨의 싸전과 정육점이다. 순태형 두 아이들의 삼촌 노릇도 해가며, 아주 허물없이 지내던 충청도 사나이는, 보증을 잘 못서 가게를 처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친 동기간처럼 지냈는데 아무 연락 없이 내려간 이후 소식이 없어 참으로 애틋한 마음만 갖고 있다. 그 집도 지금 공화춘의 이름을 차용한 화려한 중국 요릿집으로 바뀌었다.

 쭈욱 내려가다 보니 풍미 만두집(예전에는 만두를 해서 팔던 가게였다) 오른쪽에는 짜장면의 원조"공화춘"이 쇠락한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1979년 공화춘의 어르신 한 분의 잔치에 전 직원이 초대받아서 공화춘 안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 먹어보는 중화요리의 풀코스 앞에서 시작부터 배를 채워대는 우를 범한 탓에 얼마 안 가서 그 맛있는 음식을 구경만 하고 말았다. 무려 24품 요리의 정찬 코스였는데, 그 이후 문을 걸어 잠근 뒤 아직까지 그 문이 열리질 않고 있다. 아마 내가 공화춘에서 식사를 한 마지막 손님 중의 한 사람이 될 것 같다

 공화춘 앞에는 번듯한 석조건물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중국인 통장 여 성원 씨의 집인데 여성원 씨는 말을 참으로 작게 한다. 항상 깔끔한 헤어스타일과 환한 웃음과 조용조용한 걸음걸이 하며 매일 똑같은 중국식 검정 복장을 깨끗하게 다려 입은 모습이 고고한 학자를 보는듯 하다.

 왼쪽으로 길을 꺾어 들면 해안 천주교회 맞은편에 수입증지와 담배를 파는 조그만 중국인 가게가 있다 곡 창신 씨 집으로 화교협회의 중요한 일을 맡고 계시던 분이었는데 얼마 전에 신문 부고란 에서 돌아가신 걸 알았다. 아주머니는 한국분으로 몸집이 매우 좋고 종종 라면을 끓여주셔서 좋아했다. 딸내미가 한 명 있었는데 나와 농지거리를 꽤 잘하더니 한 1년 만에 대만으로 시집간다고 떠나버렸다 

 하늘이 무척 파랗다. 자유공원에서 시원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바람이 매우 상쾌하다. 어느새 옛 공화춘 뒷골목 4층짜리 건물 앞에 서 있다. 건물 옆으로 살짝 돌아서니 고려 다방이 나를 반긴다. 우리 사무실의 모닝커피 전문 배달점이다. 안을 들여다보니 지금의 자이언트 강 마담이 앳된 미스 강의 모습으로 손님과 정겹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참 예쁘다. 미스 강 덕분에 고려 다방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 인천역 앞 하인천 다방의 김 마담이 한탄을 할 만도 하다.

 고려 다방 바로 앞에는 항상 굶주린 총각의 배를 채워주던 인천 분식이 있다. 김 형태 씨가 하는 가게인데 아줌마가 무척이나 선한 인상의 착하신 분이다. 딸이 둘 있는데 동생인 연옥이의 이름만 생각난다. 두 따님 다 아줌마를 닮아서 귀염성 있고 착하게 생긴 게 매력이었다. 이 집은 내가 짜장면을 시키면 보통 3인분 정도를 담아주곤 했는데, 그걸 아귀처럼 다 먹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간혹 사무실로 배달을 시키곤 했는데, 나의 짜장면 먹는 모습을 보고는 지금의 내 마누라는 "저걸 어떻게 다 먹어? 대단하다!! 엄청나네!? "하면서 속으로 감탄을 했다고 이즈음에서야 얘기한다.

 인천 분식에서 큰길로 나오다 왼쪽으로는 단골집이던, 새마을 집, 실비집 등 몇몇 대폿집들이 몰려있는 좁은 골목이 있다. 특히 새마을 집은 숙직을 하며 술과 안주를 배달을 시켜 먹곤 하던 정겨운 집이다 골목길 초입의 대로변에는 화신 제과가 있다. 최영성 씨가 하는 제과점으로 동네 빵집 수준밖에는 안되었지만 동생이 단역 탤런트로 종종 T.V에 얼굴을 비추다가 요즘은 아예 얼굴을 안 비친다. 최영성 씨는 나와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는데 내가 다른 곳으로 발령받고 근무하는 새에 가게를 처분하고 어디론가 연락 없이 사라졌다. 길 건너편에는 전 치과가 있다. 아직도 있다. 참으로 오래 운영하는 편이다. 내가 근무할 때 40이 넘은 연세였으니 지금은 칠순이 다 되어갈 텐데...

 조금 왼쪽 언덕배기에는 옛 영국 영사관 자리였던 '파라다이스호텔' 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니만큼 옛 '올림포스 호텔' 이란 명칭이 훨씬 잘 어울려 보였는데.... 오른쪽에는 경인선의 종착역인 인천역이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별반 달라진 모습이 없다. 인천역 뒤쪽에는 동일아파트 양편으로 원주민들은 싫어하는 단어인 "뱀 골목"과 " 새우젓 골목" 이 자리 잡고 있다." 뱀 골목 " 은 골목 자체가 좁고 협소하며 곱게 펴지지 않고 구불구불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 " 새우젓 골목 "은 동일아파트 터가 예전 " 인천어시장 " 자리였을 때 새우젓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연유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새우젓 골목 옆에는 횡성 식당이라는 오징어찌개 식당이 매우 성업 중이다. 8 부두 노동자들이 즐겨 찾던 식당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 두 명씩 찾더니 이제는 노동자들이 오전 11시부터 자리 잡기에도 버거운 상황을 맞고 있다. 한때 동생이 국제여객터미널 앞쪽에 분점을 내기도 했었으나 형의 솜씨를 따르지 못했던지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한제분 옆길로 쭈욱 가다 보면 왼쪽에는 반짝 어시장이 서는, "북성부두"가 있고, 오른쪽에는 퇴락한 "만석부두 "가 자리 잡고 있다. 추억을 되새기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이름이지만 아직도 이쪽에 부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천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시 인천역 앞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

 인천역 건너편에는 지금 시뻘건 패루가 세워져 있다. 중국의 판진시가 인천 중구청과의 우호 선린 기념으로 중국인촌을 제대로 건설해달라는 일종의 청탁으로 세워진 무상증여 패루이다. 다른 패루들도 마찬가지지만 유독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패루라서 전혀 맘에 안 든다. 강제로 억지로 만드는 중국인 거리도 정말 맘에 안 든다. 자치단체장의 욕심과 문화적, 역사적 몰이해가 불러온 기형적 거리이다. 시간과 예산과 제대로 된 계획과 애틋한 지역사랑을 할 줄 아는 전문가와 그곳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과 힘을 합쳐 애정 어린 손길로 추진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패루를 들어서면서 왼편에 "하인천 이발관"이 있었다. "엄광식"씨가 운영하던 이발관으로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그에게 놀림을 많이 당했다. 그는 짓궂게도 총각인 내게 안마하는 아가씨를 붙여놓고 벌게지는 내 얼굴을 보며 키득거리는가 하면, 면도하는 아가씨까지 동원해서 장난을 치곤 했다. 10년 전인가 공공장소에서 만난 그는 어엿한 여행사 사장님이 되어있었고 풍채도 좋아졌다. 하지만 짓궂음만은 여전했다. '현관씨 그때 기분 좋았지' 라고 놀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그도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신일아파트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인천역 앞길로 송월동 방면으로 조금 가다 보면 미스 강 때문에 장사가 잘 되는 "고려 다방"을 부러워하던 " 하인천 다방" 이 움푹한 골목 1층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쪽에는, 언젠가부터 돼지갈비를 푸짐하게 주던 김 대복 씨의 " 대복집 "이 구수한 갈비 냄새를 피우며 지나는 손님을 유혹하고 있다. 부부가 푸짐하고 후덕스럽게 생겨서인지 손님들이 항상 그득하다.

 그 옆으로 조금 더 가다 보면 17사단 시절 군종병으로 있던 황 병장 사모님이 운영하는"선정 미용실"이 있다. 사역병으로 차출돼 사단 사찰에 연꽃을 만드는 사역 중 친해진 황 병장님은 나보다 무려 8살이나 위였다. 나와의 만남 뒤 2개월 만에 제대하고 (주)바른손 의 부장으로 근무하던 황 병장님은 몇 년뒤 암으로 투병하다 그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오른쪽 골목으로 오르다 보면 북성교회가 있고, 교회 옆 막다른 골목길 끝에는 10통장 천순길 씨가 살고 있다. 착하고 순하고 맘씨 좋았던 이웃집 아저씨 같은 천 씨 아저씨와 , 교회 앞쪽에 멋진 정원을 가꾸며 배를 몇 척 부리시던 조 0 0 씨...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항상 양복차림에 배를 내밀고 머리는 항상 포마드로 단정하게 빗어넘기며 허허대던 김 귀복 씨의 넙데데한 얼굴이 기억난다.

 두 노부부가 길 모퉁이 구멍가게를 하며 오순도순 살며, 나를 아들처럼 생각하시던 "강 신태" 할아버지 부부와 남북 어부 가족 업무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찾아뵙던 인연으로 친해지게 된 김 씨 아주머니 등!... 모두 하인천에서 연을 맺고 하인천에서 함께 웃고 떠들며 생활하고 친하게 지내던 분들이다. 이제 하인천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새삼스럽게 우리 방울이 (치와와)를 데려다 길렀던 신일아파트 조 진자씨와의 소중한 인연을 바탕으로 추억을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2007.07.07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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