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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국수 - 유종호 본문

사람들의 사는이야기

손국수 - 유종호

김현관- 그루터기 2024. 9. 16. 18:02

손국수  - 유종호

어린 시절 시골 웬만한 고장에는 으레 국숫집이 있었다. 간단한 장치지만 밀가루 반죽을 분통에 넣고 공이로 누르면 국숫발이 나온다. 이런 재래식 국수틀과 달리 제법 탈곡기 비슷하게 몸집이 있는 국수 기계가 있었다. 기계국숫집에 서는 대개 그 국숫발을 보기 좋게 빨래 널듯이 나무틀에 널어놓았다. 재래식 국수들의 경우 틀국수라 했지만 조금 복잡한 기계인 경우 기계국수라고 했다. 이에 반해서 집에서 손으로 만들어 먹는 국수는 '손국수'라고 했다. 

1950년대 서울에 올라와서 칼국수란 말을 접하고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국수가 얼마나 실물에 어울리는 그럴듯한 말인가? 식칼이나 칼국수나 느낌이 좋지 않다. 우리게에선 국수를 그저 누른 국이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른 국수의 준말인 셈인데 물론 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덕수궁에 가보면 임금이 점심때에 한해서 국수를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침저녁보다 점심 식사를 가장 가볍게 드는 것이 그 시절 암주(暗主)들의 관행이었던 모양이다.

바람이 거센 밤이면 
몇 번이고 꺼지는 네모난 장명등을 
궤짝 밟고 서서 몇 번이고 새로 밝힐 때 
누나는 
별 많은 밤이 되려 무섭다고 했다

국숫집 찾아가는 다리 위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어려선 국숫집 아이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벌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날만 일을 쉬고 
어른처럼 곡을 했다

-다리 위에서 전문

이용악 시편을 통해서 보면 시인의 부친은 노령을 오가면서까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진력하였지만 풀벌레 소리 가득한 밤에 침상에도 눕지 못한 채 객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게 한이 되어 시인은 부친의 최후와 제사를 몇 번인가 시에서 다루었다. 앞에 적은 '다리 위에서로 미루어보아 부친 별세 이후 모친이 국숫집을 하면서 남매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세상을 뜬 후 음식점을 하면서 생계를 꾸린 것은 이용악 모친의 경우만이 아니다. 읽어볼 만한 자전적 소설 '사상의 월야'를 보면 작가 이태준의 모친도 남편이 노령에서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로 개사한 후 생활방도를 찾아 목선을 타고 귀국한다. 함경도 웅기만의 '배기미' 란 포구에 상륙한 후 근처의 소청이란 곳에서 음식점을 연다. 1910년대 초의 일인데 그곳 사람들은 수제비는 만들어 먹었지만 손국수 해 먹을 줄을 몰랐다. 녹두는 심어도 청포를 해 먹을 줄 몰랐고 찰떡은 해 먹어도 메떡(흰떡)은 해 먹을 줄 몰랐다. 그런 판국에 작가의 모친은 만두와 손국수와 떡국을 팔았는데 세가 나게 팔렸다. 그리고 수입이 생기자마자 어린 아들을 서당에 보내어 공부를 시킨다. 맹모孟母 같은 여성이 작가를 길러낸 것이라는 감회가 생긴다. 

그러나 사회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북방의 변두리라 하더라도 1910년대의 현지에서 손국수나 떡국 해먹을 줄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을 읽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역사의 구체적 세목이다. 축약되고 편향된 통사나 읽고 나서 거침없이 해방 전후를 말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방지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만세전』이나 사상의 월야는 우리의 어제오늘을 이해하기 위해 누구나가 읽어보아야 할 문학 자산이라 생각한다.      유종호 / 사라지는 말들 - 말과 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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