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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덕이 있는 사람 본문
덕이 있는 사람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덩굴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 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에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이 세상에 육신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일찍이 떠나간 노천명盧天命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란 시이다.
그를 가리켜 고독한 사람,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고, 행복보다는 불행이 더 많았던 시인으로 알고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를 덕이 갖추어져 있던 사람으로 알고 있다. 덕이란 군자君子라는 개념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유교儒敎에서 가르치는 예의를 갖추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잘못을 꾸짖지 않는, 보고도 못 본 체,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사람을 옛 사람들은 후덕한 사람으로 알았다. 그러나 덕이란 그런 식의 외형적인 성현聖賢 도덕가가 아니라 세속적인 허욕을 버리고 스스로의 마음을 꿰뚫어 보면서 자연의 섭리속에 내 몸을 던지고 자기 한몸의 고민보다는 인생의 참된 뜻을 알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을 덕 있는 사람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하고 싶다.
욕심 없는 사람이 즉 덕 있는 사람이다. 체면을 차리고 남의 눈치 보고 이 사람도 좋소, 저 사람도 좋소 식의 미움과 원한을 안 사려고, 자신의 일신을 돌보는 사람이 덕 있는 사람은 아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전통과 서구적인 인간관계 중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생각이라 하겠다.
<춘추좌씨전>에도 큰 덕은 작은 원한을 멸할 수 있다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협소한 편견 때문 에 원한을 살 때가 많은데 원한을 없애는 길은 오직 덕을 쌓는 것이라 했다. 덕을 쌓는 것은 <사서삼경> 을 탐독하고 수양을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사심 私心을 버리는 것이라 했다.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이라는 말이 있다. 재주, 지혜 같은 빛나는 것을 부드럽게 숨겨 두고 어리석고 무능한 티끌과 같이 뒹굴어 잘난 체하지 말라는 뜻이다. 똑같은 뜻으로서 덕 중에서 최고의 덕은 남이 저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인 줄 모르는 덕 이라 했다.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고, 회사원이 매일같이 일정한 시간에 출근하여 일을 성실히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이 덕이다.
그런 일은 잘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러한 진리를 아는 사람만이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남이 보아서 저 사람은 훌륭한 덕을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면 그때는 그 사람은 제 2류에 속하는 덕을 가진 사람이지 일류는 되지 못한다고 했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란 밖(外)을 치장하지 않기 때문에 남이 보아서 모르는 것이다. 갈옷(楊) 같은 천한 누더기 옷을 입었으되 품안에는 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다. 남에게 자기가 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못난 체, 바보인 체하는 사람이다.
벌써 사람이 아는 체, 똑똑한 체한다는 것 자체가 덕이 없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제아무리 자기선전을 하고 돌아다녀야 할 세상이지만 옥이 숨어 있으면 어느 조그마한 구석에서도 빛이 비쳐 나오듯이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 덕이지 덕이 있는 체하는 사람은 덕있는 사람이 아니다.
덕은 반드시 유식하거나 높은 지위에 있거나 돈이 많거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범주에 속해 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것인지 도 모른다.
중이 중인 체, 기독교 신자가 신자인 체하는 사람이 도리어 진짜 승려가 아니고 독실한 신자가 아니듯이 그들은 하나의 직업으로써 생계를 이어 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중국의 고전인 《대학>에 덕은 근원이고, 재물은 밑통(末)이라고 했다.
덕이 있으면 재물은 자연히 따라 들어오는 것이고, 재물에 너무 마음이 어두우면 덕은 이에 따라오 지 않는다고 했다. 덕만 있으면 재물도 따라온다는 말을 요새 곧이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덕이 없고 재물만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재물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혹은 管子)이 라는 재상이 “만성滿盛의 집에는 딸을 시집보내지 말라"고 했다. 딸을 시집보낼 때 그 집이 밥이나 굶지 않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들을 따로 낼 여력이 있나. 시부모도 모시지 않고 또 그 집안이 벼슬이나 하고 지체도 높으면 그럴수록 좋아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관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번영의 정상에 올라 있는 집이란 이제 기울어져 가는 쇠운에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질적으로 너무 흥청거리고, 없는 것, 고마운 것, 괴로운 것을 모르면 일단 유사시에 당황할 뿐 아니라 남들은 그럴 때일수록 도와주기는커녕 고소하게 잘 됐다고 할지도 모르니 너무 있는 사람만 골라서 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세상 어머니들은 이 말을 알면서도 실행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가정 이다.
관자는 또 말하기를 맛(味)에 두터운(厚) 사람이 덕은 박(薄)하다고 했다. 미식가美食家는 유덕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맛있는 음식만 찾아 먹는 사람에게 덕이 없다는 뜻인데, 자기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사 먹는데 덕이 있고 없고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하겠지만 여럿이 앉아서 음식을 먹을 때 맛있는 것만 골라먹는 친구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얌치 없는 사람이란 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들어 맞을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역사책인 <국어國語>에 덕이 없이 사람을 복종시키려면 스스로 다치는 수가 있다고 했다. 돈이나 권세를 가지고 억지로 남을 누르려고 하면 돈, 권세가 그에게서 사라졌을 때 그를 책망하거나 욕을 하는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보아왔다.
공자도 덕은 외롭지 않다고 했다. 덕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은 근자에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정직하면 정직할수록 손해를 본다고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역시 옳지 못한 것은 오래 갈 수 없다.
덕을 쌓으려고 책을 많이 읽고 수양을 하려고 얘 쓸 필요는 없다. 사심, 사욕을 없애고 허욕에 마을 쏠리게 하지 않는 것이 덕을 갖추는 길이다. 길 은 먼 곳에 있지 않고 가까운 것이며, 어려운 일이 아니고 누구나가 다 갖출 수 있는 일이다.
/ 윤태림(尹泰林)[1908~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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