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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5월의 한가운데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13. 11:22

 5월의 한가운데 / 운주산자락 노곡리에서

보고 싶던 형님을 찾아 조치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 내려가겠다고 진즉에 연락을 드렸던 때문인가 며칠 전에는 어디엘 가고 싶은가 전화를 하시더니 그제 저녁에는 무엇을 먹고 싶은가를 물어보시는 형님의 따스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한동안 황사와 미세먼지로 우중충하던 하늘도 모처럼 새파랗게 빛을 뿌리고 있어 상쾌함을 더하고 이어폰에서는 나의 애청곡들이 차창 밖 고속도로변의 풍경의 변화에 맞춰 부드럽게 귓전을 울리고 있다. 이제 농번기라 안성천을 이어가는 주변에는 논바닥을 고르는 트랙터의 웅웅 거리는 소리가 힘차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한 지 며칠이 지났다. 많은 국민들이 지지하여 이제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일 대통령께 거는 기대들이 남다르다. 취임하기 무섭게 인천공항 근로자들에 대한 정규직화를 지시하여 공항 근로자 일만여 명에게 희망을 주고 세월호 침몰 당시 마지막까지 학생들에게 힘을 주고 떠난 기간제 교사의 순직을 인정하도록 검토하라는 등 많은 이의 환호를 받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내가 선택한 대통령은 아니라도 일단 시작이 좋다. 아무쪼록 시대의 흐름과 국민들의 기대에 걸맞은 바람직한 다스림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임기를 멋지게 마치는 표상을 보여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청주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온 형님의 배려 덕분에 평안하게 조치원에 도착하여 L형님과 조우한 뒤 맛난 점심을 먹고 운주산 자락 노곡리로 향했다. 운주산을 넘어가는데 작은 길가에는 산바람으로 인해 시리도록 하얀 아카시아꽃의 나풀거림이 눈앞에서 겅중거리고 짙은 꽃향기가 온 산을 뒤덮고 있다. 등성이를 조금씩 오를 때마다 아카시아 군락지가 보이는데 제일 키카 큰 나무 밑에 예닐곱 개씩 놓아둔 벌통 주변에서 꿀벌들이 새까맣게 몰려나와 지나는 길손들에게 붕붕거리면서 정겨운 날갯짓을 하고 있다. 반갑지만 벌은 벌이라 은근히 겁을 먹으면서 천천히 꿀벌들에게서 벗어났다.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을 때마다 제대할 당시 본부대 막사 뒤에서 쏟아져 내리던 아카시아 흰 꽃잎의 나풀거림과 그 향기를 함께 기억해 내곤 한다. 제대한 뒤 당장 마주쳐야 하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 흩뿌리는 꽃잎과 같은 인생이 될까 하는 두려운 속마음을 생각나게 해서 더 기억하게 되었는데, 운주산 등성이 저 아카시아꽃 잎들의 나풀거림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제 정년을 맞이하는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과 무관할 수 없겠다.

이윽고 L 형의 집이 보인다.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타던 언덕길도, 두릅순을 따던 두릅나무 울타리도, L형이 손수 공사를 지휘하면서 지어 냈던 큼직한 본채와 연못들도 그대로 긴 시간을 버텨 내고 있다. 시간의 버팀 속에 날아다니는 추억 한 가지씩 끄집어내면서 참죽나무순을 따고 담소를 하는 형님들의 모습이 너무도 평안하다. 백로가 여유롭게 날아다니는 논두렁에서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데 찔레꽃이 시원하게 부는 바람 속에 하얀 꽃잎을 흔들면서 자기도 찍어 달라 유혹을 한다. 근 십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나 그동안 나의 삶에는 이런저런 변화가 많았는데 이곳도 몇몇 변화의 흔적들이 보인다.

언덕길 쪽에 나 있던 옛 흙길 대신 시원스레 4차선으로 새로 뚫린 도로의 모습과 단정하니 정비된 각종 표지석들과 이전에는 낡고 빛바랜 표지판 하나 달랑 서있던 곳에 새로 지어진 깔끔한 버스정류장 건물.. 미꾸라지를 잡던 조그만 저수지(되넘이지) 역시 사방공사를 하며 깨끗하니 단장되었다. 마을 이곳저곳에 새로 지어진 산뜻한 주택들의 모습들은 여느 시골들의 모습들과 다름없이 조화롭지 못하니 생경스럽기만 한데 와중에 홀로 고향을 지키던 노인들이 돌아가시고 남겨져 폐허가 된 낡은 집들이 대비되면서 마음을 적시고 있다.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부터 고향으로 자리 잡은 외가댁에 대한 상념이 가슴속에 스며든다. 고향은 마음의 잠자리이며 삶의 숨통을 열어가는 소중한 추억이다. 외가는 어머니에게 고향이고 안식처가 되듯이 내게도 어린 시절의 꿈과, 아픔과 추억이 똬리처럼 오롯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지금도 갑갑한 일상이 이어지는 날이면, 그 옛날 어리고 순수한 작은 영혼이 노닐던 작은 실개천의 조잘거림과, 웅덩이 속 물방개의 잦은 발짓이 눈에 밟히고, 너른 서랑리 방죽의 싸한 물안개 속에 젖어있는 사춘기 시절의 나를 그려보며, 세마대 오르는 작은 오솔길을 산책하고픈 아련함을 느낀다. 노곡리의 풍경에서 외가댁을 떠 올리는 것은 아마도 두 분 형님이 보여주는 따스한 정 때문이리라.. 그렇게 5월의 한가운데 모처럼 일상의 안온함에 젖는다. 

2017.5.14 그루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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