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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수봉산 과 제물포,그들과의 추억과 이별 본문

내이야기

수봉산 과 제물포,그들과의 추억과 이별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5. 18:53

수봉산과 제물포, 그들과의 추억과 이별


수봉산은 인천에서도 주산이 아닌 한 줄기 산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높이도 불과 95m로 100m도 채우지 못한 야트막한 언덕배기 산이다. 그래도 이 땅이 생긴 이래 인천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정겨운 산이며, 경인고속도로와, 경인국도, 그리고 경인선을 아우르는 우리의 산이다 경인국도라고 하면 서울 영등포로부터 오류동을 거쳐 부천을 지나, 석바위와 제물포 남부역 광장 앞을 통해 동인천까지 도로를 칭한다. 그 경인국도와 함께 국철인 경인선이 함께 한다. 

우리 집은 수봉산을 든든한 배경으로 두고 그 경인국도와 경인선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30여년전 서울 답십리에 소재하던 "선창산업"이 월미도로 이전하였다. "선창산업" 공무과에 근무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이 처음 자리를 잡은 동네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경인국도변 수봉산 입구의 도화동 634번지다.

참으로 꾸밈없는 동네이지 싶다.이사오던 그 해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나, 30여 년이 지난 올 겨울에 보이는 풍경이나 별반 변화된 모습이 없는 곳이다. 그래도 세월에 의한 변화가 없을 리는 없듯이 간간이 없어져서 잃어버렸던 장소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들과, 그 곳에서 있었던 이러저러한 추억들이 생각난다.

아주 오래 전 수봉산 입구에는 겨울을 따뜻하게 해 주던 난로 제조공장인 "후지카 공업사"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제물포 자동차 매매단지"가 들어서고, "수봉 관광호텔" 옆에 살던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동네 친구 "공 종학"이네 집도 없어졌다. 종학이 누나의 자상한 미소가 지금도 아련하다. "신세대주유소" 뒤편의 넓은 분지 같은 곳에 살던 윤애 누나가 합창단의 정기발표회에서 부르던 풍부한 음색의 "아베-베룸"이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듯하다

수봉산 꼭대기에는 지금도 검단을 오고가는 17-1번 버스종점이 있다. 백석에 할머니의 묘가 있는 관계로 설과 추석, 한식에는 그곳에서 떠나는 버스를 타고, 성묘를 다녔다. 지금이야 자가용이 많아 버스를 타고 성묘 다니는 가족들이 별로 없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성묘를 갈라치면 그 보다 더한 고통이 없었다. 새벽부터 준비를 하고 "백석 천주교 공원묘지"를 다녀오면 하루해가 다 질 정도였으니 참으로 고 되었던 성묘길의 시발점이었다.

수봉산의 정상 바로 밑에는 어린이 놀이 시설 있다. 아직도 놀이기구는 남아있지만, 운영은 하지 않고 있다. 성당 어른들이 운영을 하던곳인데, 시의 방침으로 운영을 못하고 있다. 군에 가기 전 쌀밥 형님네서 운영하던 일명 "배터리-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인데 참으로 안타깝다. 저렴한 가격에 아이들이 즐겨 뛰놀 수 있는 놀이터였기에 그 아쉬움이 더하다.

학창 시절에 이런 사연이 있었다. 그 시절은 가을이면 학생들 주관으로 이곳저곳에서, "문학의 밤"과 같은 행사를 주최하곤 했다. "도화동 성당"에서도 매 해 가을마다 Y.C.S주관으로 개최하던 "마돈나 율림제"라는 행사가 있었다 그 해에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고자 성당에 처음 발을 디뎠던 나는 "마돈나 율림제"에서 가곡 "수선화"를 너무도 가슴 저리게 부르던 여학생과 어떻게 어떻게 하여 연이 닿아 사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서라벌고를 다니던 친구 은찬이에게 실토를 하고 자랑삼아 첫 소개 하던 날! 제물포 역 앞의 "거북당" 빵집에서 단팥빵을 베어 물던 찰나에 그 애의 벼락같은 절교선언이 있었다. 나 혼자도 아니고 친구를 불러내 기분 좋게 소개하려던 나는 배신감과 창피함으로, 수봉산 중턱의 지금의 "프린스 아파트" 근처의 무덤가에서 술을 들이키며 절규하던 가슴 아픈 추억이 있다.

"제물포역"앞의 "뽀빠이제과점"도 자주 다니던 곳이다. 그곳은 음악다방과 마찬가지로, D.J가 있어 신청곡을 받아 틀어 주던 곳이었다. 친구 성환이와 종종 들렸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사랑의 종말을 위한 협주곡" 하나만을 신청하여 듣고는 하였다. 그 노래에 어떤 사연이 있는듯하여 물어보아도, 그냥 허허 웃고 말아 아직까지 그 사연을 모르고 있다. 언제 생각나면 한 번 물어보아야 하겠다. 한참 뒤 바로 그 자리에 "청송갈비"집 이 들어서 있을 즈음 아버님의 회갑잔치를 그곳에서 치렀다.

제물포역은 57년도 말경에 숭의 간이역으로 시작되어 제물포역으로 변경된 후 70년대 후반에까지는, 지금과 같이 지하도와 역사 계단과 에스컬레이트를 통해 다니질 않고, 남북 역 광장 구분이 없이 차단기와 땡땡이 소리와 함께 그냥 철로 위를 걸어 다녔다.

지금도 북광장쪽에는 예전 내가 다니던 튀김집들이 이름을 달리해 영업을 계속하는 두어 집 눈에 뜨인다. 스무 살 즈음의 일요일 어느 하루! 미사를 끝내고, 그곳 튀김집에서 튀김을 먹던 중, 발 밑으로 기어 다니는 튼실한 쥐 한 마리 덕분에 같이 있던 선희가 놀라 내 품에 안기는 기막힌 행운도 있었다.

튀김집 바로 앞에는 "덕일탁구장"과 "덕일 문구점"이 있다. "사라예보"에서 울려 퍼진 "이 에리사"의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전국은 탁구 광풍이 불었다. 그 여파로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곧 잘 탁구를 치러 다녔고, " 덕일 탁구장"도 꽤나 들락거렸다. "덕일 문구점"은 학비를 벌고자 청계천에서 그림을 사서 패널을 제작해 겨울방학 동안 한 귀퉁이를 빌어 팔던 곳이어서 매우 소중한 기억을 갖고 있는 곳이다.

튀김집 조금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허름한 흙벽돌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덜컹이는 미닫이 나무 문짝에 유리에는 누런 창호지가 붙어 있던 우리들의 소중한 청춘의 정거장! "대지기 주점"이 있다. 미닫이 문 사이의 약간 비틀린 나무기둥 위 편에 널빤지에다 대충 적어놓은 상호가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그 집에서 푸짐한 인심과 막걸리를 동이 채 놓고 마시던 젊음은 아직도 그곳에 놓여 있다. "대지기"라는 지명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대지기"가 지명인지도 모를 터인데! 우리들의 소중한 옛 지명 들을 인천사는 이들은 알아야 할 터이다.

그마저도 내가 사는 이 곳이! 30여 년간 변화가 없던 이곳이, 이젠 상전벽해가 될 모양이다. 수봉산 주변이 "제물포 재정비구역"으로 지정되어 몇 해 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다. 인천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던 "A.I.D차관 아파트" 도 이미 헐려 기억에서 사라질 판이고, 고급스럽던 이미지의 "동일주택"이라는 명칭도 빌라 천지가 되며, 허명으로만 남더니 , 그 마저도 세월의 뒤안길로 숨어버릴 참이다.

아직도 아버지의 문패가 남아있는 내 집도, 내 동네도, 유풍이와,광덕이,국수집,공장집, 골목 안의 우물에 살던 가물치를 보며 신기해하던 상윤이와 골목가게 지연네, 현권이 친구 용일이 아버지, 고향 여관 아줌마, 내 겨울 외투를 멋있게 만들어 주었던 미라 엄마와, 얼마 전 소식 들은 돌아가신 세명 슈퍼 아저씨 등등 모든 이웃들과의 주저리주저리 얽힌 인간관계의 끈도 불과 삼 사년이면 모두 헤어지고 떠나고, 이 동네를 기억의 한 켠에서 반추하리라.....

2008년 12월 대설이라는데 인천에는 비만 내린다.

 

대지기의 내일 / 오 광철의 전망차

지금 대지기라면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그 곳에 사는 주민이라도 알아들을 사람 별로 없겠다. 그 곳을 제물포역 뒤라고 하지만 그것은 경인국도를 중심으로 하는 설명이지 제물포역의 앞뒤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인천대학교가 자리한 위치라는 설명이 제일 간단하겠다. 예전의 대지기는 현재의 인천대학교 언저리였다. 인천 개항때 경인국도였다는 우각리 쇠뿔고개를 넘어 박문삼거리에 이르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졌었다.하나는 제물포역을 건너 경인국도로 해서 서울로 가는 길이요 또 하나는 오늘날 주안역 뒤로 해서 주안염전 뚝에서 좁은 바다로 끊어지는 길이었다.

그리고 일대는 선인체육관까지 공동묘지였다. 제물포역 정면도 중국인 묘지였다. 1912년 중구 내동에서 이전해 왔다.
우리처럼 봉분이 아니라 붉은 벽돌의 사각형 묘실이며 그 시절 중국인의 장례 행렬도 가마를 메고 가는 모습이었는데 아마도 굴장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아무튼 오랜만에 그 옛길을 걸어 보았다. 새로 난 널찍한 대로 까닭에 끊어졌지만 그런대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선 박문주유소를 지나 들어서면 더러 낡은 옛 대폿집들이 보였다. 얼마나 빗물이 샜었던지 아예 지붕이 천막으로 덮여 있었다. 70년대 초만 해도 동구밖 주막처럼 드나들던 곳이다.

그러나 역 주변에서 옛 도로는 제법 활기를 띠었다. 대학가 주변은 이런 곳인지. 비좁은 골목 안은 젊은이들을 부르는 듯 간판들로 가득했다. 복사점에 PC방 그리고 싸구려 간이식당이요 어느 집 대문에는 ‘자취방’이라는 팻말도 붙어 있었다. 세탁소가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옛길은 역광장에서 잠시 끊어졌다가 인화여상 교문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학교의 벽돌담장을 끼고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도화시장으로 인해 미로가 되고 그 안에 갇힌 미아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 제물포 역세권 재개발지구로 지정될만도 했겠다.인천시가 도화5거리에서 제물포역 도원역으로 이어지는 제물포역 역세권을 주거와 업무 교육 문화 등의
복합기능 입체도시로 건설키로 했다고 한다. 오랜 잠에서 깨어날 앞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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