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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60년대 답십리의 풍경과 추억 본문

내이야기

60년대 답십리의 풍경과 추억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6. 22:08

60년대 답십리의 풍경과 추억 / 내가 살던 신답초등학교 주변을 위주로

어느 날부터 인터넷에서는 사용자들을 위한 아주 고마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 구글 맵 " 에서 위성으로 전 세계의 주요 도시를 25미터에서 50미터 상공에서 볼 수 있도록 촬영한 평면 사진으로, 미지의 도시에 대한 아름다움과 실체를 지구인들의 눈앞에 보여주는 혁신적 기술을 자랑하더니,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얼마 전부터 " 다음 "에서 이름하여 "로드 뷰"라고 명명한, 실제 차량에 카메라를 싣고 거리를 운행하며 주요 간선도로를 찍어 동영상으로 수도권과 광역 도시의 면면을 집 안에서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실로 대단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마운 " 로드 -뷰 "서비스 덕분에 나는 소년기 시절에 살던 답십리의 변화된 모습을 공간을 뛰어넘어 불과 몇십 분 만에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로 인해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가 파노라마처럼 떠 오르며 60년대의 내가 살던 답십리의 모습을 되새겨 보게 되었다.

풍경들!

우리가 답십리 184 번지에 터를 잡게 된 건, 아버지가 일터를 선창산업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주변 환경은 크고 작은 세 동네가 한 무리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으며, 도토리 키재기식의 고만고만한 도시 빈민가적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내가 살던 곳은 약간 규모가 큰 듯한 공장 뒤 편에, 큰 집 이라야 열 평 조금 넘는 판잣집 신세는 겨우 면한듯한 40여 호의 블록 집들이 신답초교가 되어버린 배추밭을 끼고 "ㄷ " 자형으로 골목을 이룬 곳이었고, 인접한 개천 건너 동네는 경원선 둑 밑에 ,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생활오수에 찌들고 오물 투성이인 개천을 따라, 통나무 말뚝을 박아 거무튀튀한 판자로 집을 지은 70여 호의 판잣집 동네다

답십리. 서울. 1975.2 -  이런 모습의 풍경이다

 

반대편 동네는 루핑 지붕이 낮고 비만 오면 진창길로 변하는 공중변소를 끼고 있는 약 100여 호의 열악하지만 규모는 큰 동네로 기억된다. 여름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개를 잡느라 밭으로 난 처마에 까만 전깃줄로 개의 목을 묶어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 흐르고, 개천 건너 집에서 팔던 고소한 양 젖의 맛은 아직도 미각에 남아 있다. 언젠가는 옆 집 담 안에서 뿌려진 초산 벼락을 맞아 새로 산 잠바가 구멍 천지가 되는 황당함으로 어머니와 그 집 아저씨와 대판 싸우던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장마가 지면 집 담을 따라 휘도는 도랑이 넘쳐 하수구로 역류하는 바람에 하수구를 막고 담벼락에 구멍을 뚫어 퍼내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장맛비가 잦아들면 청계천 둑으로 뛰어가 시뻘건 흙탕물에 떠 내려오는 소나 돼지 그리고 온갖 살림살이들을 건지러 긴 장대를 휘휘 젓는 아저씨들의 모습들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쳐다보기도 하고. 아버지의 자전거 짐받이에 매달려 뚝섬과 광나루, 사근다리 근처로 물고기 잡으러 떠나는 재미도 누리곤 해서, 철없는 마음에 장마를 기다리기도 했다.

전농 시장에서 대리석 공장 주변을 항상 어슬렁 거리던 거인이 있었다. 창경궁에서 일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곡마단에서 봤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여기저기 다니며 날품팔이 식으로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거인만 나타나면 온 동네 아이들이 졸졸 쫓아다니며 놀려 대도 씨-익 웃으며 지나가는 천성이 매우 착한 아저씨였다. 어느 날! 굶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그 후로는 보질 못했다. 큰 몸은 저 하나 먹지도 못할 만큼 어려운 그 시절 삶의 궁핍함이었다.

선창산업과 대한제분 그리고..

청량리역 일대와 답십리, 전농동 주변에서 큰 건물이라면 학교와 극장, 그리고 몇몇 공장들을 꼽을 수 있겠다. 그 외에는 대부분 단층 가정집과 드문 드문 서 있는 2-3층의 상가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지금의 " 답십리 한신 휴 플러스 아파트 " 단지 건축예정지 (헐어버린 구 태양아파트)는 아버님의 기술을 납품하던 선창산업이 자리하고 있었다. 70 년대 초반 신답초등학교 정문 앞쪽에 4차선 신작로(지금은 8차선으로 확장되었음)가 건설된 지 얼마 후 선창산업이 월미도로 이전을 한 이후 여러 활용 경로를 거쳐 지금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신답 지하차도에서 신답역 교차로로 향하며 왼편 답십리 우체국 뒤편 일대가 미국의 원조 밀가루 제조 공장이었던 대한제분 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먼 곳에서도 볼 수 있게 악수하는 두 손 뒤에 태극기와 성조기의 상징을 그려 넣은 빨강과 파랑의 강렬함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한제분도 선창산업 근처로 이전되었다. (2009년 여름~이 글로 인해 선창산업 50년 사를 집필하시는 송 연식 선생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대한제분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 나 잘못되었어도 내 기억인지라 내치지 못하고 그냥 놓아둘 테니 이 글을 읽는 분께서는 착오 없길 바랍니다.)

굴다리에서 전농동 쪽으로 약 200 미터 이상 올라오다 보면 오른편에 " 범양상선" 건물이 있었는데 정확한 층수는 모르지만, 5층 이상의 건물이 아닐까 판단된다. 당시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의 하나이다. 신답 초등학교 뒤편의 숭인 중학교 자리는 공장이었고, 바로 뒤편에는 조그만 다리가 있는 개천을 끼고 대리석 공장이 있었다.(지금의 동아아파트 정문 입구 맞은편 동방 노보펌 일대.) 약 1 입방미터 이상의 대리석 원석들을 듬성듬성 3-4층으로 쌓아 놓은 대리석 덩어리의 틈새는
놀이터가 없던 우리들에게 아주 요긴한 숨바꼭질 장소이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대리석 공장 앞 개천 다리 위에서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연탄배달 삼륜차에 치어 바들바들 떨며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고 한 동안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 고생하던 아픈 기억도 있다..

신답초등학교 옆을 신작로를 따라 신설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지금의 홈-플러스 근처에 " 동마장 시외버스터미널 "이 있었다. 지금의 "상봉터미널"로 이전하기 전까지" 용산 시외버스터미널 "과 함께 남동 축을 연결하는 긴요한 교통시설물이다. 들리기로는 " 상봉 터미널" 도 폐쇄된다고 하는데 어디로 이전할까?

그때는 몰랐지만 청량 공고 옆에 " 시조사 "라는 건물이 있었다, 늘 닫혀 있고 사람들의 왕래도 한 번 본 적 없는 아주 비밀스러운 건물이었다. 무슨 용도의 건물인지 몰랐었고. 혼자 생각으로 정보를 다루던 기관의 건물이 아니었나 추측해 보았지만, 이 글을 쓰며 검색을 해 보니 100년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 월간지 "시조"를 발간하는 종교서적 출판사로 확인이 되었다.
나는 단번에 궁금증을 풀어주는 문명의 편리함을 활용할 줄 아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 시절의 놀이!

그 시절 단편적인 놀이의 기억으로는, 배추를 거두어들이고 나면 널찍한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는 밭으로 가서, 우선 배추 꼬랑지를 캐먹고, 밭 한가운데 아이들 서너 명이 들어 가 놀 수 있게 큼직하게 구덩이를 파는 일로 하루 해를 보낸다. 구슬치기와 딱지치기, 그리고 자치기를 하느라 늘 터져있는 손등은 터지지 말라고 발라놓은 글리세린에 붙는 먼지들로 더케가 지고. 한 겨울에 얼어붙은 도랑에서 썰매를 지치다 메기도 잡는 그런 놀이들을 하고 지냈다.

불장난하느라 고무라도 태울라치면 시커먼 연기가 코안을 새카맣게 그을리고, 실수로 머리카락을 태우고 그 고약한 단백질 냄새까지도 좋다고 깔깔대는 개구쟁이들이었다. 철로변 아이들이면 다 그렇듯이 나 역시 반짝거리는 철로길에 대못을 주워다 가지런히 놓은 다음, 못이 멀리 날아가지 않게 침을 뱉어 놓고 동네 아이들과 기찻길 위에 귀를 대고 빨리 기차가 오길 기다리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날이 화창 할 때면 몇몇이 작당하여 영화사 언덕길을 지나, 중랑천으로 놀러 가기도 했다. 중랑천변까지 가려면 광활하게 펼쳐져 있던 채소밭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그 길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가면서도 서로 투덜대고, 그러나 돌아올 때면 이미 장난꾸러기가 돼 있는걸...

그러던 겨울의 어느 날! 널찍한 얼음판을 찾아 미나리꽝으로 썰매를 타러 뛰어가다가 친구의 썰매 꼬챙이가 왼쪽 뺨을 관통하여 , 한 손으로 꼬챙이를 부여잡고, 한 손에는 썰매를 들고서, 엄마를 찾아 울며 집으로 들어가던 어린 내가 보인다.
지금도 내 왼쪽 얼굴 한가운데는 어슴프레 예쁜 보조개가 나있다.

어느 해 추석 무렵에 과외하던 친구들과 화장실에 폭음탄을 던져 넣어 사람을 다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알아버린 과외 선생님에게 정말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한없이 맞았던 아픈 기억도 있다. 지금은 담임 선생님도 자기 반 학생에 대해서도 교육을 위한 체벌이 금지되고 교권이 땅에 떨어져 있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도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그때는 아이들의 잘못을 본 어른들은 누구나 꾸짖을 수 있는 사회인식이 확립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울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훨씬 풍요로운 시절이었다.

친구들!

동네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는 전 상구, 안 중균 두 아이만 기억날 뿐이다. 상구는 소규모 가내 금가공 공장을 하던 집 아이로 유독 기억에 남지만. 어린 시절의 그는 민규와 함께 셋이서 찍은 빛바랜 사진에서만 만나 볼 수 있다. 중균이는 동네 친구이며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나오기도 하고, 참 자주 놀았는데도 애틋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하다. 나 보다 한 살 아래의 성기는 우리 집 으로부터 두 집 건너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아이인데 극성스러운 그의 엄마와 중학교 후배라는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 있다.

한 동네는 아니지만 양 기덕과 장 정식, 이 민규, 남궁 영순, 김 은선 등은 민규만 제외하고는 과외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그중 영순이는 전교 1-2등을 차지하던 재원으로 또랑 한 눈망울과 단발머리가 선명히 기억되던 여자 아이였고 개천변에서 살던 은선이는 양쪽 어머니가 대충 알고 지내던 사이여서 걔 중 친하게 지내며 혼자 좋아하던 맘을 품고 있던 아이였으나, 일찍 결혼했다는 풍문으로 아픈 맘을 내게 던져 준 아이다.

기덕이는 약간 살집이 있는 통통하고 귀염성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민규는 6학년 때 반장으로 그의 집 뒤 편 조그만 동산에서, 석유를 입에 물고 불을 뿜어내며 용가리 흉내를 내던 눈망울이 크고 잘 생긴 아이였다. 정식이는 그중에서 성장과정을 제일 많이 알고 있는 친구로, 경기상고를 졸업하고 서대문 근처 어느 은행에 취직했다는 말까지 그 의 어머니를 통해 들은 바 있는 친구이지만, 앞 선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연락은 안 되고 있다.

지금의 동아 아파트 입구쯤에 살았던 승렬이는 큼직한 한옥 기와집에 사는 중산층 가정의 친구로 당시 인기리에 방영하던 "빅 모로우" 주연의 "전투"를 보기 위해 무시로 텔레비전 보러 가던 기억이 있다. 한 반이며 통학길이 같았던 노 세환의 남자답고 시원한 모습이 그립다. 세환이는 지금의 경신교회 자리에 있던 교회에서 학교를 다닌 것으로 보아 목사님 아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성형수술이 발달되어 전혀 볼 수 없는 언청이(병명 :구순구개열)라는 병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여기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장 씨 성을 가진 친구였는데, 지금의 왕따 학생 중 하나였다. 그 아이는 평생 그 느낌을 가지고 살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모두 다 그립고 보고 싶은 친구들의 면면이다.

동대문 어린이 수영장 가는 길!

경미 극장 건너편 골목에 아버지가 전매청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 그 친구 집에는 50개인지 100개들이인지 원통에 담은 담배가 무척 많아 몰래 한 통씩 구멍가게에다 내다 팔아 그 돈을 주머니에 단단히 챙겨 놓고 답십리에서 동대문 수영장까지 신이 나서 걸어가곤 했다. 수영하고 나오면서 운동장 앞에서 파는 10원짜리 순두부 한 그릇을 청해 먹던 그 맛이라니. 나중에 들통이 나 두 놈 다 그 친구 아버지에게 치도곤을 맞던 아릿한 생각이 난다. 어려운 그 시절! 길거리나 구멍가게에서 개비 담배(일명 까치 담배)를 팔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애 들한테 담배를 사던 구멍가게 주인도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참! 수영장으로 걸어가다 운이 좋으면 기가 막힌 멋진 차를 볼 수가 있었다. 당시에는 시발택시가 다니던 시절이라 일반 승용차도 보기 힘들었는데, 신설동 가는 즈음에서 간혹 빨간색 외제 스포츠 카가 눈에 띄었다, 아주 날렵하고 지붕이 없는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근사한 오픈카였다. 그 차의 주인은 영화배우 신 성일 씨이고 그가 애인집에 놀러 와 있다는 풍문이 돌긴 했지만 사실여부는 그 근처 살던 분들이 잘 아시리라 믿는다.

어린 시절의 극장 구경!

내 생애 처음으로 영화라는 것을 의식하며 영화관에 간 곳은 " 경미 극장 "으로 기억한다. (맞은편에 경미 라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 그리고 위치상- 한진택배 자리로 추정 ) 그곳에서 " 저 하늘에도 슬픔이 "라는 영화를 보았다. 내용은 자세히 기억이 안 나지만 정말 지독하게 슬픈 영화였다. 이 윤복이라는 어린이의 수기를 영화화한 실화라고 하는데 그분들은 지금 어떻게 사는지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영화계에서는 이 영화를 다시 리바이벌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 세대의 옛 추억의 향수를 빌어 상당한 흥행작이 될 것 같다.

당시의 다수의 영화관 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하고, 여기저기 지린내가 진동을 하며 가끔 쥐새끼까지 돌아다니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늘 비 오는 화면과, 말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지직 거림 투성이면서 툭하면 필름이 끊어지고는데다, 그럴라 치면 이곳저곳에서 원망 섞인 휘파람 소리와 고함으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대형화재로 유명해진 청량리 "대왕코너" (지금의 롯데백화점)에 있는 " 대왕극장"에서 "파리 대탈출"이라는 코믹 영화를 단체로 본 것도 기억이 난다. 트럭 뒤에서 독일군에게 호박 던지는 장면이 왜 그리 우스웠는지 전체 학생들이 극장 전체가 떠 나갈 정도로 한 껏 웃었던 유쾌한 시간이었다. 대왕극장에서는 이 후로도 여러 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청량리역을 바라보며 롯데백화점 왼쪽에 지금 민자역사를 건설하는 곳에 "신도 극장 " 이 있었다 ,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그곳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굴다리에서 청량리 쪽으로 나오다 보면 " 시대 극장"(나이트클럽 이 입점해 있는 시대 빌딩 자리)이 있었고 큰길로 나와 오른편으로는 지금의 " 성바오로 병원 " 근처에 " 오스카 극장 " 이 있었다. 그리고 "신답 극장"과 "답십리 극장" 도 있었던 것은 알지만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다. 멀리 신설동 로터리 쪽 "라사라 양재학원" 옆에 "노벨 극장"이 있던 것은 생각난다. 이 외에도 물론 수많은 극장들이 있었겠지만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극장들은 집에서 도보로 다닐 만큼의 지근거리에 있는 극장들만 기억된다.

끝 말

내가 지금의 "신답초등학교 " 터에 살다 인천으로 이사 오게 된 사건이 있던 날은 1972 연 2월 22일이다. 중학교 2학년 봄방학이 시작돼던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흡사 폭격 맞은 것처럼 온 동네가 쑥대밭이 돼 있었다. 학교를 짓기 위해 동네 전체를 철거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선창산업이 바로 그 시점에 인천으로 옮겨져서, 우리 가족은 생활근거지를 인천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 후로 일부러 그곳을 갈 일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동물은 아픈 기억일지라도 언젠가는 확인해 보고픈 그런 알싸한 감정이 있는 것 같다. 일종의 본능인가 보다.

4년 전 어느 봄날! 작정하고 한 번 답십리를 찾아보았지만, 안 가느니만 못했다. 내 기억 속의 장면과 일치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지금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나의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이 서려 있다는 것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공간이 내 인생에서 흘러간 소중한 한 자리였음을..

2009.04.16 13:56

 

# 40여 년 전에 대한 소년의 기억이니 만큼 다소 틀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하시고, 이 글은 나의 집이 있던 지금의 신답초등학교 주변부터 나의 모교 전농초등학교 주변과 어린 시절 생활 반경 내에서 기억에 의한 추억의 기록물이니 전농초등학교 뒤 쪽과 시립대학교 주변 그리고 영화사길 쪽으로는 언급이 없습니다.

혹시 답십리를 잘 아시는 분이 이 글을 보시면 새롭고 멋진 글로 화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 나오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가 이 글을 본다면 내게 꼭 연락을 해 주면 좋겠다. 소주 한 잔 하며 40년간 변한 인생들을 한 번 나누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 중에 혹여 내 생각이 난다면 지금이라도 연락해 주시기를 바라며..

 

 

 댓글..

반갑습니다 저는 답십리 하면 너무 정겹고 반갑고 가슴이 뜀니다 제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그곳에서 결혼을 하면서 떠나왔고 부모님 동생들 3년여간 더 사셨으니 저에겐 고향이지요 그곳에서 광복절,6.25 저처럼 답십리를 잘 아는 사람도 흔하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그곳이 저에겐 꿈을 키우고 희망을 노래하며 작은뚝 큰뚝으로 둘려진곳에 논이 봄 여름은 그린필드 가을엔 고개숙이 황금빛 벼가 물결을 이루고 집 앞엔 맑고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초등학교 에서 돌아 오는길 냇가에 큰 물고기가 물길을 잘못들어 조그만 웅덩이?에 갇쳐 펄떡거리고 민물새우가 떼지어 다니고 장마들면 미꾸라지가 체하나면 뱀장어처럼 큰게 잡히고 나즈막한 야산 뒷동산에 봄이면 딸기가 제것처럼 따먹고, 그후 산허리를 끊고 도로가 나면서 영화 촬영소가 생기고 이승만 대통령까지 오시고 답십리 극장엔 않가보고 그전에 시대극장 오스카극장 가까운 경미극장은 동시상영을 주로 하고 3류극장이지요 동네도 육조 웃말 안말 이렇게 큰동네 3마을이있고 6학년쯤 영단주택이 크게 들어오며 버스 종점도 가까이 왔지요 그전엔 경미극장 조금지나서 종점이고 그때 동네 친구들 모두 어디로 갔을까?흔적도 찿기 어려운그곳을 몇번 찿아 몇몇 사람들 만나고 전화는 하고 있지만 그때 그 소년이 보고 싶네... 속으론 좋아 했으면서 쌀쌀맞게 보냈던 그 사람 한번쯤 만나서 식사라도 해보고 픈... 지금은 머리에 하얀서리가 내려있을 그사람,... 경미극장 주변 현재 태양 아파트 주변은 열악 했지만 그 안쪽 답십리2동쪽은 평온한 농촌마을 그 자체 입니다 답십리를 얘기하면 책으로 써도 1,2,3권이 된답니다 오늘은 이만 두서없이 줄이며 감사 합니다

 

답글 그루터기 2009.11.20 10:51

그러시군요..답글을 보니 답십리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와 닿습니다..
청계천의 맑은 물을 보고 자라셨으니 얼마나 좋았을지 눈에 선하기도 하구요..
글에서 나타나듯 저보다 한참 연배가 높으시네요..

답십리2동쪽의 미니리꽝으로 썰매 타러 가다 생긴 내 보조개가 다시 한 번 옛날을 그리게 합니다.
다시 이 자리에 들리시면 옛 이야기 한 두자락 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www순이  2009.11.20 12:45

답글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는 청계천이 맑은 물이 흐를때는 본적이 없고 헌 책방으로 책을 구입하러 갈때(청량리까지 걸어가서 동대문까지 전차를 타고감) 더러운 물이 약간 고여있고 질퍽하게 걸으며 징검다리?를 건너 다녔어요 답십리는 64년도인가 광화문에서 철거민이 새말이란 동네쪽에 안착했고 인구가 늘기 시작하며 그이후 67?도부터 작은뚝방에도 가 보진 않았지만 뚝방에 이사온 누구 하며 대화 하는걸 듣게 되었으니 그이후 판자촌이 되었는지는 직장 생활 하며 바뻐지고 몰랐습니다 제 기억은 어머니께서 57년도 부터 논과 밭을 사 들이시며 밭에는 늘 옥수수 감자 먹을게 풍족했고 논에서는 일년 양식이 방마다 그득히 쌓여있고 여학교 친구들을 자주 불러 들여 작은 뚝에서 큰 뚝( 중량천) 으로 인심좋은 달구지 아저씨 만나면 올라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거의 논이지만 무우밭이( 몇안되지만 )보이면 하나 쑤욱 뽑아서 손으로 돌돌 껍데기 벗겨내고 돌아가며 한입씩 먹기도한 기억이 생생 합니다 뒷동산쪽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은행주택이 64년도인가 들어오고 동네 친구들 작은순이 큰순이 순박한 친구들모두 어디로 갔을까? 순이 이름이 정겨워 저도 순이라는 아이디가 되었답니다

www순이  2009.11.20 13:22

미나리광이 있엇던곳은 우리 동네도 몇개는 있었지만 새말에서 한양대 지름길인 논두렁쪽에 많았고 그쪽은 인적이 드물어 잘 않가보고 뚝섬 유원지 갈때 여럿이 가 본적은 있어요 그리고 집앞에 맑은 물은 붕어때 버들치 새우등이 떼지어 다니더니 상류에 오리를 낮에 방사 해서 안타깝게도 더러운 냄새나는 물로 변하고 다른 이유는 세대수가 늘어나며 하수관에 문제도 있으며 답십리는 오염으로 변해가고 인심좋고 대문 방문 모두 열어놓고 살던 인심도 사라지며 보따리 장사 엿장사 채장사 비단을 머리에 이고 오면 곱고고운 비단 구경도 하고 언니는16세인데 어머니는 혼수감을 미리 유행하느것 사곤 했지만 언니가 결혼 할때는 모두 안감으로 써야 할정도로 유행이 지나고 알록달록 양단도 유행에는 민감했어요 오늘도 바쁘니 또 들어 와도 되겠지요?

www순이 2009.11.20 16:12

엿장사 보따리장사 꿀장사 비단장사 항상 대문이 활짝 열려있기에 점심을 으례 우리집에서 해결 하고 여름엔 장독대엔 맛있는 고추장 된장 깻잎 고춧잎 마늘 마늘쫑 각종 밑반찬이 가득하고 밭에 심어놓은 쑥갓 상추 실파 한광주리 뜯어서 이웃사람, 지나가는 나그네, 우리집은 쌀이 많으니 밥이 아깝지 않았나봐요 둘러 앉아 어린 상추 손바닥 가득히 올려놓고 쌈장에 밥을 올려 놓으면 입이 터져라 눈을 흘기면서(입에 가득하니 눈도 씰륵이 움직임) 여럿이 먹으니 더욱 맛이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고추장이 항아리 통채로, 빨래널어 놓으면 좋은 옷들이 없어지기 시작하며 대문을 잠그기 시작했답니다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그루터기 2009.11.21 23:39

답십리의 산 증인이시네요.. 옛 마을 이름이 매우 정겹습니다..육조,웃말,안말,새말등.. 지금도 이런 마을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큰뚝이 중랑천을 칭한다는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여유있고 복 있는 집안의 분위기도 느낄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 시절이면 대부분이 힘들고 어려운 때였는데.. 유익한 글 고맙습니다.

www순이  2009.11.22 12:07 신고

감사 합니다 이렇게 답십리의 추억을 얘기 하라면 너무 행복 합니다 혹시라도 50~60년대 답십리 사셨던 분을 보시면 관심으로 제게 글 한번 주시면 감사 드립니다 늘 그곳 사람들이 남여 노소 모두 그리운 사람들 입니다 사람사는 모습도 너무 소박하고 재미 있었던 한권에 책으로 남아있는 저에게 답십리라는.. 잠시라도 덧글로 행복한 시간을 갖게 해주셔 감사합니다

23회 김선희 작성시간12.03.26

김현관 후배님의 글을 읽고, 잊었던 옛기억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 주시니 참 고마웠어요. 그런데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전농초등학교에 이렇듯, 그시절의 기억들을 생생히 글로 남기시는,후배님이 계시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네요. 반가워요. 앞으로 자주 카페에 방문해 주시고 글도 많이 올려 주셔서, 전농 초등학교 총동창회 카페가 활성화 되어 동창들이 많이 모였으면 좋겠네요.

26회 김영수입니다 14.12.08

선창산업 대한제분 기타 오랜세월 잠든 기억이 확 깨어납니다 26회생들도 다음카페에 "전농초등학교26회친목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선 후배님들 모두 많이많이 들어와 보시고 옛 이야기와 현재의 좋은 얘기 많이 나누시길 바랍니다.....

 

작성자26회 홍명호 15.09.15

선배님 말씀 하신 그 동네에 살던 기억이 나네요. 배추밭을 앞밭이라고 불렸던거 같으네요, 철다리 쪽에서 배추밭쪽으로 들어오는 초입쯤에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만화가게 하나 있었고, 만화가게 앞에 손잡이 돌려서 하는 축구게임기 하나 있었고,아마도 28회 졸업생일건데요 손녀딸이 있었지요. 양영희 던가? 골목이 6개던가? 있었는데 제일끝 골목을 돌아서면 개천가 동네로 가는 길이지요. 왼쪽으로 집들이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공장 담벼락이 있던... 아마도 그 공장이 무슨 철공소 공장으로 기억되는데요.. 태양아파트 앞쪽 길에서는 그 공장터가 삼융산업이라고 아크릴 공장이 있었고 그 옆으로 봉제공장이 있었구요.

전매청창고가 있던 자리는 지금 간데메 공원이 되었구요. 경미극장 건너에 있던 높은 건물은 한성실업이라고 봉제공장이었지요. 선창산업에서 청량리로 가는 철뚝길 오른편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 건너편으로는 술집들이 굴다리 까지 20개쯤은 있었던듯... 청량리쪽에서 굴다리를 지나면 오른편으로 일미분식집이 있었고, 몇집건너서 방앗간... 술집들.. 선배님 덕분에 회상에 젖어 보네요.그림좀 그릴줄 안다면 그 동네 모습을 잘 그려 보겠는데 ㅎㅎ 5학년 여름때던가?? 그 동네에 살던 두세살 정도 많은 동수형??? 따라서 뚝섬에 아이스께끼 장사하러 갔다가 아버지가 아시고는 DG게 얻어 터진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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