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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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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 遊 回 想 (용유회상)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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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가을 햇살은 유난히 따가웠다. 구읍나루터에서 출발한 버스는 가르릉 거리며 돌팍재를 넘는다. 넙디를 지나 진등고개에서 낡은 버스의 거친 숨소리가 여전한데, 이 과장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 한 일 년 푹 쉰다 생각하고 다녀와라~! ” 남보다 빠른 진급이라 좋긴 하지만 왜 하필 섬인가 하는 생각과 그대로 눌러 앉히지 않을까 하는 적이 걱정스러운 내 생각을 읽듯 위로하는 목소리에 큰맘 먹고 가는 용유 길이다. 덜컹이던 버스가 별안간 차분해지며 눈앞에 바다를 가른 십리길의 연도교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좌우에 출렁이는 물결과 갈매기들의 끼룩거리는 모습이 조금 전의 걱정을 덮어버린다. 버스에서 내리니 야트마한 둑 길 너머로 인적 없는 백사장이 끝없이 보인다.

출장소 입구의 좌우에는 해송이 그득하다. 별안간“푸드덕”하며 장끼 서너 마리가 나무 사이로 사라지고,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인적이 없다. 쏴 하는 파도소리와 눈 시린 가을 햇살만이 나를 반긴다.

“김 계장~ 회는 드시나?” 자그맣고 땅딸한 출장소장의 한 마디에

“물 뽄(은어:고기잡이 조황) 보러 가는데 함께 갑시다.”  연세 지긋한 산업계장께서 맞장구를 치며 나를 챙겨주신다.

“네 좋죠! 숭어가 참 좋았는데 지금이 철인 가요?”  그렇게 용유와 1년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인구수 2천 명이 조금 넘는 용유도는 어업과 농업을 주로 하는 섬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여름 한 철 을왕리 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늘 조용한 마을이었고, 젊은이들은 인천에서 생활을 하는 관계로 주로 50대 이상의 주민들이 살며 그분들이 동생처럼 대해주어 스스럼없이 업무를 꾸려 나갔다.

용유도에는 여덟 가지 볼거리가 있다. 오성산의 화려한 단풍, 팔미도를 돌아오는 돛단배, 비포 포구에 우뚝 솟아있는 장군석, 남북 10리에 걸쳐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 볼 수록 묘한 을왕리 선녀암, 왕산에서 바라보는 낙조, 무의도 아침에 피어오르는 고운 아지랑이, 회항해 거잠포구에서 쉬고 있는 고기잡이배의 불빛... 이를 가리켜 사람들이 '용유 8경'이라고 한다. (주: 용유 8 경중 인천 국제공항의 건설로 "비포 장군바위"가 고립되었고 "거잠어화"는 포구 자체가 매립되었으며 , "오성산의 단풍"은 오성산을 밑둥이까지 잘라내  볼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다)

이런 절경인 아름다운 백사장 주변과 '왕산낙조'에 동화되듯 함께 노니는 천연기념물인 “후투티”와 “재두루미” “노랑부리백로”가 한가롭고, “산비둘기”“말똥가리”“해오라기”들이 함께 놀자며 날개 짓하는 용유도의 모습에서 여유로움을 얻었으며, 철이 바뀔 때마다 “을왕포구”와 “왕산포구”그리고 무의도 “광명항”에서 꽃게와 숭어, 농어, 우럭과 노래미, 그리고 간자미와 복어, 삼치, 망둥이로 입맛을 돋우곤 했다.

뻘에는 쫄깃한 낙지가 지천이며, 소라와 바지락, 굴, 김 등 수산물이 늘 넘쳐나던 풍요로운 동네이다. 막 섬 생활에 적응할 무렵 마시안 해변에 쳐놓은 그물에 몰려든 산더미같은 숭어떼들로 인해 8트럭 이상을 페이로더로 실어냈다는 40 년만의 풍어를 앉아서 만끽하는 행운까지 깃든 마을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욕심 없는 착한 마음씨를 가져서인지 이 동네 주민들은 인심들도 좋다. 그분들 중에서도 특히 늘 챙겨 주기를 좋아하는 을왕리 기선 아저씨, 선녀바위 쪽의 정 씨 아저씨, 무의도 차씨네, 신설동 석 씨 아저씨와 덕교동의 삼거리 식당 내외분과 윤 선장, 그리고 어머니 같이 보살펴 주시던 하숙집 아주머니 등의 면면이 가슴속에 아련히 떠 오른다.

특히나 석 씨 아저씨 딸내미는 나의 어설픈 중매에도 선뜻 결혼까지 하고 잘 살고 있어 지금도 뿌듯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산업계장님께서 몇 년 전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함께 일하던 최 양이 전해 주기도 하였다. 사람들의 삶에는 언제나 굴곡이 있고 그런 부분들이 모여 우리네 인생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용유에서 있는 동안 도심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할 독특했던 몇 가지의 경험을 하였다. 논두렁가에 쑥이 한창 피어나던 어느 봄날! 늘목 염전 뒤쪽 언덕배기에 살던 정 주사네 암소가 배가 터져 죽는 어이없는 일이 생겼다. 외양간과 광 사이에 옥수숫대와 짚풀로 이겨 진흙으로 막아놓은 벽이 오랜 세월이 흘러 무너지면서 광에 쌓아놓았던 몇 자루의 콩을 먹고 배가 터져 죽어 있는 소를 보신 정 주사 어머니가 그만 실신까지 하셨다. 집안의 큰 재산인 암소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지만 소의 처분 문제로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소를 잡기로 결정을 보았고,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 고기를 구입하여 그럭저럭 송아리 한 마리 살 돈을 마련하게 되어 큰 시름은 덜었고, 배가 터지도록 콩을 먹은 미련한 소 덕분에 한동안 한우고기를 원 없이 먹어본 일이 기억난다.

해넘이 쪽! 경작하지 않던 논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논 우렁이를 잡던 일도 생각이 난다. 섬사람들은 대체로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어물에 입맛을 고정시킨 터라 민물 것들은 잘 안 먹는 습관들이 있다. 논 우렁이도 그러해서 경작하지 않던 논 바닥에 새카맣게 깔려 있는 우렁이를 몇 가마니나 수확하여 말려서, 이웃들도 주고 두고두고 된장찌개에 넣어 먹던 맛있는 추억도 그리워진다. 어느 날은 운전하는 김 씨가 남북동 자기네 논 웅덩이 물을 다 퍼내고 잡았다며 민물장어를 가져다주어 비싸서 먹기 힘든 민물장어로 포식한 일도 있었다.

덕교동에 사는 어 씨도 내게 한 가지의 체험을 하게 해 주었다. 성이 물고기 ⿂씨라서 그랬는지 근동에서 낙지잡이 하면 어 씨를 첫손가락으로 쳐주었다. 일요일 새벽 물 때가 좋으니 낙지 잡으러 가자는 꼬임에 넘어가 토요일 저녁을 술로 잔치를 한 녁에 다음 날 새벽!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마시안 해변으로 나갔다. 전 날 술로 떡을 친 사람답지 않게 날쌔게 돌아다니며 뻘속에 팔뚝을 넣을라치면 한 마리씩 잡아내는 신기와 체력에 연신 감탄하며, 어 씨가 잡은 낙지를 받아 허리에 매어놓은 대야에 넣기를 수없이 반복하여 걷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질 무렵 내 숨은 턱에 닿을 지경이었다. 더 잡길 포기하였어도 이미 근 60여 마리나 되는 낙지를 잡은 덕분에 그날 오후 당시 살던 동네 어른들은 푸짐한 낙지를 안주로 포식을 하였다. 지금이야 이런 일들은 꿈에도 못 꿀 정도로 이악스럽고 번잡스런곳이 되어버렸지만 불과 이십 년 전에만 해도 아주 흔한 일상이었다.

이러구러 일 년여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섬 생활의 나른함을 즐기면서, 당신들의 환경에서 순박하지만 진실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여러 어르신들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듬뿍 받아 가며 지냈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그 시절에 겪었던 사소한 경험과 사람들 과의 부대낌들이 그동안 살아오며, 앞으로 살아가며 커다란 인생의 자양분이 됨을 느낀다. 일상의 생활이 아닌 전혀 생소한 환경에서의 경험들은 한층 삶에 대한 폭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고, 뱃사람들의 거칠면서도 배포가 큰 커다란 마음 씀씀이를 보고 느끼면서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찾아보게 하는 전환점의 역할도 하였다.

먼지와 함께 다니던 그 돌팍재길과 넙디, 삼목도, 연도교 길들은 인천 국제공항도 들어서고, 영종 경제 자유구역이 들어서며 상전벽해가 되어 많은 길들이 훼손되고, 잠기고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늘 그 길들에 대한 추억과, 짧지만 큰 성장을 안겨준 용유에서의 생활에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시던 용유 어르신 들과 함께 늘 함께 자리할 것이다. 아직도 통개, 산디, 늘목, 입구지, 관청 말, 나루 개, 마시안, 거잠포, 큰 무리, 개안 부락, 샘꾸미, 오성산과 잠진도, 매 도랑과 조름 섬, 해녀도와 사렴도들의 친숙한 그 이름들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 아름다운 섬, 사랑스러운 나의 용유여.

2009. 11. 9 - 그루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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