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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여름 오후.. 여름 오후.. 본문

내이야기

여름 오후.. 여름 오후..

김현관- 그루터기 2023. 8. 6. 16:19

참 더운 날입니다. 홧홧함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어느새 등줄기에 주르르 땀 한 방울 흘러내립니다. 선풍기도 지쳤는지 헐떡거리며 더운 숨을 토해 내고 있습니다. 뒤적이던 조그만 월간지에 이런 글이 보입니다.

"여름 오후. 가장 아름다운 두 단어 - 헨리 제임스 - "

여름 오후...
여름 오후...

두 단어를 겹쳐 모니터에 띄어 놓고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슬금슬금 차분해지고, 깜빡이는 커서의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어느 순간 나른해집니다.

어릴 적 외가댁 마당입니다. 논배미 건너 저 편에서 배씨네 작은 아들 유천이가 나를 보며 갈퀴질 하는 손짓으로 건너오랍니다. 제 손에는 여린 대나무를 잘라 파란색 망을 달아 놓은 잠자리채가 들려 있습니다. 유천이에게 가고 있습니다. 신작로도 바짝 말라 강종 강종 뛰는 발밑에서 하얀 먼지가 풀풀 날립니다. 현수네 담장에 걸쳐 있는 미루나무에서 쓰람매미 한 녀석이 저 잡아 보라며 "쓰 - 람, 쓰 - 람" 유혹합니다.. 방죽에서는 용잠자리 야모 떼가 시원스레 공중제비를 돌고 있습니다.

논둑길 끄트머리의 조그만 둠벙에는 진녹색 수초가 얼기설기 하늘을 가렸는데 조그마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매끈하게 미끄럼질 하고, 쌀 물방개 꽁무니 따라 조그만 물결이 퍼지고 있습니다. 어느새 새파란 하늘이 웅덩이 한가득 차 오릅니다.
해는 아직 산 꼭대기에서 빨갛게 불타고 있습니다.

옥선이네 밤나무산에 으스름 그늘이 지고 있습니다. 산기슭을 휘도는 개울가로 유천이와 함께 뛰어갑니다. 조그만 개울이지만 제법 여울이 지는 곳도 있는 실한 개울입니다. 장마 뒤끝이라 그런지 물 흐르는 소리가 제법 커다랗게 들립니다. 엊저녁 담가놓은 어항 속에 송사리 두 마리가 입구를 찾으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분주합니다. 송사리는 아랑곳없이 이내 개울 속으로 뛰어 들어가 멱을 감습니다. 한참 물장난을 치다 보니 한여름의 무더위는 간 곳 없고 딱따기처럼 이를 부딪고 팔뚝에는 하얗게 소름이 돋아 납니다. 언뜻 눈을 떠 봅니다..

여름 오후...
여름 오후...

글자 뒤에는 커서가 아직도 깜빡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름 오후라는 두 단어를 써 놓고 가만히 바라보니 추억이 살아나고, 더위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등줄기의 땀마저 그친 지 오랩니다.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오늘처럼 세상을 푹하니 삶은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이면 여름 오후 두 단어를 써 놓고 가만히 바라보겠습니다. 여름 오후라는 두 단어가 아름다운지는 모르겠지만, 참 좋은 피서법의 하나인 것을 깨달은 것은 내게 있어 행운입니다.

정말 더운 여름날입니다..

2023.8.4 김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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