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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 / Ticket / 1986 본문
티켓 / Ticket / 1986
知識 ,知慧 ,生活/영화이야기
2022-05-17 00:21:57
비루함, 20대의 장식
티켓 | Ticket 1986
이 충걸 월간 편집장
<티켓>을 다시 빌려 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방부된 기억이 공기에 노출되면 부식될 것 같아서였다. 스물다섯 살 때 읽었던 하라다 야스코의 <만가>도 그랬다. 며칠 전 그 책을 다시 꺼냈는데, 그게 해피엔드라는 걸 알고는 차라리 막연해져 버렸다. 젊은 기억 속에서 그토록 명징했던 침울함이 한순간 미지근한 식욕처럼 추레해졌으니.
<티켓>을 생각하면 11월 같은 황량한 무드가 떠오른다. 낮고 길게 누워 있는 하늘, 빗속에 눅눅해진 고기 비린내 하지만 그보다는 나의 비루한 20대가 먼저다. 막 제대한 뒤, 독산동 오래된 동시상영관의 젖혀진 모노륨 바닥, 나뒹구는 자판기 종이컵들, 신발 접지 면마다 끈적거리던 캐러멜의 시체들, 나 자신, 전선줄을 갉아먹는 설치류 같다는 자의식, 텅 빈속, 창피를 당해도 좋다는 굳은 의지. 하나같이 추잡한 후렴구들로만 둘러쳐진 헤르페스 성병 보균자 같던 나이였다.
그때 <티켓은 건전가요 가사 그 자체였던 친구와 함께 보았다. 그는 <티켓>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혜영이 커피포트 들고 엉덩이 살랑거리면서 차 배달나가는데, 남자들이 뒤에서 야유하니까 치마를 살짝 걷어 올려 보여주잖아. 아주 대차게 나오는 장면도 많았어. 여관에서 남자애 뺨따귀를 갈기고, 안소영 하고도 싸웠잖아."
"또 다른 건?"
"화면에 비 내렸지, 뭐."
그는 더 어렸을 때 연극 공연장에서 보았던 이혜영을 스크린에서도 보자 살짝 흥분했었다. 그러나 나의 뇌엽 속엔 다른 신이 남아 있었다. 관절 앓기 딱 좋게 꾸물꾸물한 날씨, 다방 문 닫고 지네들끼리 작파해 술판을 벌이던 신 말이다.
모래 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것 같은 김지미가 여급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안소영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라고 어설프게 노래하면 중간에 딱 끊고 들어가 "그래, 내가 그저 바라만 보다가 피본 년이다. 이년아"라며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목소리로 핀잔을 한다. 전세영이 순진한 목청으로 '인생은 미완성'을 부를 때도 그녀의 목멘 지청구가 급습한다. "네가 무슨 인생을 안다고 미완성이라느니 마느니 지랄이야."
그 장면은 날 철봉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힘들게 했지만, 이상하게 온화한 기분도 함께 주었다.
좋은 영화를 보지 않는 건 인생의 손실이라는 전 혜린의 경구와 상관없이 난 영화 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의 모든 신마다 나의 개인사가 겹쳐 길고 긴 장탄식이 비어져 나오고, 워낙 영화에 몰입할 수 없는 성정인 데다 끝나는 시간을 10분마다 확인하느라 수족이 다 고달프니, <티켓>처럼, 안락한 삶의 원형질들을 빠져 달아나게 만들고, 가차 없고, 퉁명스럽고, 또 꾸리꾸리 한 영화를 보는 건 그야말로 가슴이 헤질 것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매캐하고 꿉꿉한 영화들은 윤락한 타임캡슐로서의 그때 내 사고의 틀을 보여주지만, 지금 나에겐 〈A.I.〉처럼 몽상을 주는 영화가 가장 행복하다.
그때 나는 20대 중반이나 됐는데도, 읽고 보고 겪고 느낀 건 지겹도록 많았는데도, 지적인 면에선 제한된 기능만 보였다. 나는 무감동한 청년이었고, 일생은 비닐 백에 담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 백 속엔 1초마다 나태와, 감상과 감성사이의 모호한 이음새와, 불필요한 자책이 구질구질 고여 있었다. 나한테는 냄새가 났다. 탈취제를 온몸에 뿌려도 그 악취는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녀들보다 먼저 몸을 팔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자신, 끝나 버린 잔치에 찻잔만을 치우는 사람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고, 내 딸이 쇼걸이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편의 영화로 그렇게까지 극렬한 감정들을 불러 모으고 나만의 잔치를 벌였던 건, 모든 음조를 소리 내보고 싶었던 나의 순수한 비속함 때문이다. 비루함은 나의 검소한 장식. 그게 나쁘진 않다. 어차피 인생은 이류 호텔에서 보내는 하룻밤만 못한 거니까.
감독 임권택 | 출연 김지미, 이혜영, 전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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