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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본문
아리랑
아리랑 / 김 병종의 화첩기행 中
삶이 너무 고단하고 힘겨울 때마다 그렇게도 나를 좀 보내달라고 넘겨달라고 절규처럼 애원하던 그 이상향 '아리랑'은 대체 어디일까. 산 넘고 강 건너 아득히 찾고 또 찾아가야 할 그 '아리랑'은 이승에는 없는 것일까.
고갯마루를 내려올 때 문득 아리랑 한 가락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없다. 방금 넘어 온 고갯길에 햇빛이 쏟아지고 있을 뿐이다. 유난히 고개가 많은 정선. 태백산맥 첩첩 산중고개도 많아 비행기', '섬마령고개' 다 넘어와도 백봉령 아홉고개' 넘다가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산이 많으니 자연 '고개' 도 많은 것이다. 그러나 비단 산길 오르내리는 현실의 고개만이 고개는 아닐터이다. 변변한 땅뙈기 하나 없이 도란도란 세끼 식사마저 자유롭지 않은 가난 속에서 삶의 무게를 지고 오르내려야 할 인생의 고갯길인들 오죽 많았을까.
정선아리랑은 그 태반이 여성들의 구전(口傳) 노동요 천여 수에 육박한다는 가사들 중에는 독백처럼 자기 심정을 노랫말로 털어놓은 것이 유독 많다. 지금은 구절리(九切里) 깊은 산 속까지 도로가 뚫려 있지만 옛날의 정선은 한번 시집오면 평생 외지로 나가기조차 어려웠던 곳이다. 삶이 너무도 고단하고 힘겨울 때마다 나를 좀 보내달라고, 아리랑 고개로 넘겨달라고 노래로나마 애원했던 것이다.
흔히들 우리를 한많은 민족이라 한다. 그래서 한의 노래인 '아리랑' 이 우리땅 곳곳을 적시며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라고 하긴 우리 나라 아리랑은 우리 나라 산천의 토종꽃 가짓수만큼이나 많다. 백 가지 넘는 아리랑 중 아직 살아 있는 것만도 서른 개가 넘고 정선아리랑만 해도 채집된 것만 천여수에 육박한다 하니, 이 나라는 가히 아리랑의 땅이요 우리는 아리랑의 민족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리랑은 징징 짜는 슬픔의 노래나 한의 가락만은 아니다. 단장의 설움마저도 한사코 가라앉히고 곰삭여내어 마지막에는 마알갛게 우러나오게 하는 그런 화사한 민족의 노래이다. 사랑과 그리움과 슬픔과 이별과 놀이가 뒤섞여 있지만 거기 미움과 증오는 없다. 갈등은 있어도 원망과 비탄은 없다. 끌어앉고 감쌀 뿐이다. 하물며 이데올로기 따위의 셈법이 있을 리 없다. 여기에 민족의 노래 아리랑의 위대성이 있다. 정선아리랑은 더욱 그렇다. 그냥 자연스럽고 순한 가락이다. 박지원이 양반전』에서 순하고 .무던한 '정선 사람'을 말했지만, 정선 사람처럼 노래도 순하다.
같은 아리랑이면서도 정선아리랑은 진도아리랑 같은 질펀한 해학이나 가락의 격한 높낮이가 없다. 논보다 밭이, 그것도 비탈밭이 많은 정선에서 힘겹게 일하며 빠르고 현란한 가락은 어려웠을 터이다.
일하다 허리를 펴고 산 넘어 몰려오는 구름을 보며 “눈이 오려나/비가 오려나/억수장마 지려나... 무심중에 중얼거리다 가락이 되곤 했을 것이다.
상념에 젖어 걷는 사이에 '정선아리랑의 유적지 아우라지' 라는 돌비가 나타난다. 논길을 가로질러 강과 만난다. 열 겹의 산을 열 가지 색으로 내비치며 아픈 사랑과 이별의 전설을 안고 강물은 흐른다.
아우라지란 골지천과 송천이 서로 어우러져' 강이 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두 물이 만나 이루어졌다 해서 '두물머리' 라는 예쁜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 강에는 정선아리랑에 설움 하나를 더 보태는 사연이 흐른다. 어느해 혼례식을 앞두고 건너편 마을 사람들이 신부와 함께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오다가 그만 배가 뒤집혀 버린다. 가마에 갇혀 나오지 못한 신부는 그예 강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죽은 목숨으로 떠올랐다. 그 원혼을 달래느라 강 언덕에는 처녀의 동상을 세우기에 이른다.
아우라지강에서는 흐르는 강물에 눈길을 보태지 말라 했던가.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랑도 인연도 우리네 인생마저도 결국엔 저렇게 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쓸쓸해지기 때문이라 했다.
수려한 풍광 속에 엎드려 있는 아픈 삶의 흔적들은 아우라지 말고도 곳곳에 있었다. 폐광되어 을씨년스럽게 남은 석탄만이 쌓여 있는 '구절리역'부근은 오래된 흑백영화 화면처럼 쓸쓸하기만 했고, 남면 낙동리 거칠현동(居七賢洞)의 ‘칠현비(七賢碑)’는 숨어 살다 죽어간 일곱 선비의 나라 사랑의 외로움과 고달픔이 처절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정선아리랑은 그 가락이 멀리 왕조를 비키어 의로운 사연을 안고 칠현동으로 들어왔던 고려말 선비들의 의가(義歌)로부터 시작하여 숱한 민초(民草)들의 애원성(哀怨聲)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그 사연의 폭이 넓고 깊다.
저녁 짓는 연기 오르는 산골 마을을 돌아 숙암천 앞 아라리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다. 잔잔하던 숙암천은 장마로 하진부쪽 물길을 보태양자강(揚子江)처럼 도도하게 흘러내린다.
밤이 이른 산골에 성근 별이 떠오른다. 마당의 매캐한 모깃불을 사이에두고 안주인은 당귀, 천궁, 오미자 같은 약초에 구렁이까지 나온다는 정선장 구경이 볼 만하다고 일러준다. 저 앞 숙암천에 어항 몇 개만 넣어두면 밤새 메기, 쏘가리, 가물치가 가득 들어온다는 말도.
강 건너 산가(山家)에 불빛이 깜박인다. 멍석에 누워 하늘을 본다. 어느새 와르르 쏟아질 듯한 별무리. 한을 노래로 바꾸어 불러온 이름없는 얼굴들이 별되어 떠 있다. 서늘한 한줄기 바람이 지나간다. 정선에 누워 나는 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이 된다.
정선아리랑비(碑)와 예인(藝人)들과 아리랑학교
정선에는 아리랑비(碑)와 도원가곡비 등 아리랑과 관련된 노래비가 많다. 거칠현동의 칠현비(七賢碑)도 그 중 하나. 정선아리랑을 원산, 회령 등지까지 전파시킨 전설적 인물 사돌이 박순태(朴順泰)를 비롯, 수많은 아리랑 명인들이 가락을 이어왔다. 끊어질듯 이어지던 정선아리랑은 근자에 정선아라리 문화연구소 진용선 소장에 의해 새로이 힘을 받고 있다. 시인이기도 한 그는 흡사 정선아리랑을 위해 태어난 아리랑 전도사처럼 귀향하여 이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1993년 이후 여름마다 아라리학교' 를 열어 정선 일대 아리랑 유적지 답사와 아리랑 배우기를 통해 정선아리랑을 보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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