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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사는이야기

당신도 혹시 북곽선생입니까?

김현관- 그루터기 2023. 7. 14. 00:03

당신도 혹시 북곽선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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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혹시 북곽선생입니까?

고금변증설


범이 창귀(범의 앞잡이)들을 모아 놓고 저녁거리를 걱정하자, 그 중에 한 놈이 썩 나서며 아주 괜찮은 먹을거리가 있다고 한다.

 “저 숲에 고기덩이가 있는데, 간은 어질고 쓸개는 의로우며, 가슴 속에 충성심과 고결함을 가득 품고 있습니다. 게다가 음악이며 예가 몸을 흠뻑 적시고 있습니다. 거룩한 학자들의 말을 줄줄 외우고, 만물의 이치에 통달했기에 사람들이 큰 도덕을 갖춘 선비라 일컫습니다.” 이런 훌륭한 분이니, 그 고기 맛도 좋을 것이란 말이다. 이 말에 범은 어깃장을 놓는다. “무슨 소리야. 그 자들이 내뱉은 소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 허황된 것이야. 그런 자들의 고기를 먹으면 체하고 말 것이야.” 그리고 범은 유학자들이 설하는 음양오행설 등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범과 창귀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을 즈음, 세상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유학자 북곽선생이 등장한다. 북곽선생은 앞서 창귀가 권하던 큰 도덕을 갖춘 선비의 전형이다. 그 북곽선생이 절의로 이름 높은 과부 동리자를 찾아간다. 동리자는 과부이건만, 성이 다른 아들이 다섯이다. 동리자는 오랫동안 연모해 왔노라면서 북곽에게 책을 읽는 낭랑한 음성이 듣고 싶다고 한다. 북곽이 막 책을 읽으려 할 찰나, 동리자의 다섯 아들이 “예에 ‘과부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였는데 북곽선생은 현자이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여우일 거야”라고 하면서 여우를 잡아 신통력을 얻자며 방으로 달려 들어간다. 북곽은 놀라 달아나다가 거름통에 빠진다. 머리를 들어 보니, 범이 앞에 버티고 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첨을 늘어놓자 범은 북곽을 호되게 나무라고 떠난다.

알다시피 박지원의 <호질>이다. 범이 북곽을 꾸짖는 말 곧 ‘호질’은 유가의 윤리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절절한 조소다. 하지만 여기서는 줄이자. 나로서는 무엇보다 북곽 같은 인간형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북곽은 그 이름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은 인물이다. 가짜인 것이다.

이광정의 <눌은집>에 희한한 이야기가 있다. 줄이면 이렇다. 가난하게 살던 부부가 있었다. 그 이름은 갑남이와 을녀라 해 두자. 부부는 갑자기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오직 을녀의 재주로 인한 것이었다. 아마 주식이나 땅투기라도 했던가 보다. 한데 돈은 모았지만, 명예가 없다. 어느 날 을녀는 갑남이에게 말한다. “우리는 돈은 많지만, 명예가 없잖아요. 당신, 서울로 올라가서 이름을 취할 생각은 없나요?” 갑납은 을녀의 말을 따라 서울로 갔다. 권세 있는 재상 집 옆에 집을 하나 얻고, 성리학에 관련된 서적은 물론 여러 유가의 고전들을 비치했다. 을녀는 갑남에게 도학자에게 걸맞은 표정이며 행동거지를 가르쳐주고, 사람들이 찾아와 무엇을 묻거든 근엄한 표정으로 무조건 모른다고만 하라고 단단히 당부했다.

을녀는 값비싸고 진귀한 물건을 구해 재상집을 들락거리며 안식구들에게 적절히 뿌렸다. 여자들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왔고, 드디어 재상까지 알게 되었다. 재상집 자제들이 여자의 남편, 곧 갑남이를 찾으니, 갑납은 늘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독서와 궁리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 공부의 의문처를 물었으나, 오직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 아닌가. 이 이야기를 들은 재상은 갑남을 벼슬에 천거했다. 하지만 갑남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응하지 않았다. 재상은 더 높은 벼슬에 천거했다. 물론 거부다. 천거와 거부가 몇 번 진행되어 마침내 명예로운 청현직에까지 올랐다. 을녀는 갑남에게 ‘더 있다가는 발각될 수도 있으니, 돌아가자’고 한다. 을녀는 돌아가면서 속여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으나, 재상은 여전히 갑남을 어진 군자로 알았다고 한다.

북곽선생은 도덕군자인 체하였으나 도덕군자가 아니었고, 갑남은 도학자인 체하였으나 도학자가 아니었다. 동리자는 절부(남편 사후 개가하지 않은 여성)로 이름이 났지만, 성이 다른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절부가 아니다(물론 나는 절부를 생산하는 가부장제에 대해 반대한다). 북곽선생은 그래도 속에 문자가 있었으나, 갑남은 아무 것도 없다. 더한 가짜다. 북곽과 동리자, 갑남은 사실상 동일한 속성의 인물이다. 곧 이름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정말 가짜인 것이다.

대학 선생을 하다 보니, 학교 안팎에서 학벌이 뜨르르한 분들을 적지 않게 만난다. 말만 하면 다 아는 국내외의 유명한 일류대학이다. 한데 그 중 적지 않은 분들이 과연 자기 명함에 적힌 직임, 혹은 직업에 상응하는 내용을 갖추고 있는지 왕왕 의문이 든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북곽선생이 뇌리에 떠오른다.

가짜 증명서는 진짜 증명서와 관계된다. 가짜 증명서는 구별해내기 어렵지 않다. 좀 귀찮아서 그렇지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고 발행처에 문의해 확인하면 가짜임을 밝혀낼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증명서를 가진 사람들 중 그 증명서가 보증하는 내용을 갖추지 못하는 가짜들은 속수무책이다. 특히 사회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즉 권력이나 돈이나 언론의 힘을 소유한 가짜들일수록 그들이 갖는 힘으로 인해 더더욱 구별해내기가 어렵다. 공자는 자신의 사명을 ‘이름을 바로잡으려는 것’(正名)이라고 말했다. 공자 같은 성인이 나와야 가짜 시비가 없어질 것인가. 갑갑하구나.

사족 한 마디. 요즘 세상을 사는 북곽선생님의 가장 큰 특징은, 대개 19살이나 23살, 즉 고등학교 3학년 혹은 대학 4학년 때의 ‘지성’을 그대로 간직한 순수한 분들이라는 것이다. 왜냐? 이분들은 19살의 학력으로 이른바 일류대학을 진학한 이후, 혹은 23살에 일류대학을 졸업한 이후, 전혀 ‘지성’에 변화를 전혀 겪지 않고, 늘 19살, 혹은 23살의 성취만을 죽을 때까지 읊조리고 사시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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