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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섬에서 보낸 엽서 본문

사람들의 사는이야기

섬에서 보낸 엽서

김현관- 그루터기 2023. 7. 16. 08:42

섬에서 보낸 엽서

知識 ,知慧 ,生活/배움-문학,철학사
2022-05-17 00:39:02


 

섬에서 보낸 엽서


나트륨 등 몇이 주황색의 빛을 뿌리는 선창에 서 있습니다. 해가 진 뒤, 완벽한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의 시각, 바다가 아주 신비한 푸른빛으로 빛날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은 아주 짧아서 경험 많은 뱃사람이라 할지라도 평생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요.

오래전, 처음 그 푸른빛을 보게 되었을 때 바다의 신에게 물었지요. 당신의 나라에 축제가 있나요? 그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형제여, 그대의 나라에서는 술렁이며 빛나는 시간들을 모두 축제라 부르는가? 그렇지 않은 시간들도 있습니다. 한 가지만 내게 얘기해주게.

그렇지 않은 시간 말이야. 어느 순간 내 영혼이 아주 맑고 따뜻해져서 노래를 부르게 될 때가 있지요. 시 쓰는 일을 말함인가? 참으로 신비했습니다. 그는 이미 시 쓰는 일을 알고 있었지요. 시 쓰는 일로 치자면 우린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 파도들의 역사를 이름인가요? 형제여, 그대 또한 이미 알고 있군. 그러나 모든 설레는 것들의 노래가 축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진정한 축제의 시간이란 온몸으로 자신을 느끼는 시간을 이름이지. 온몸으로 자신을 느끼는 시간. 그의 말을 들으며 왠지 행복해졌습니다.

오랫동안 그 신비한 푸른빛의 저녁 바다에 대해 생각했지요. 어느 순간 그 푸른빛을 볼 적마다 그가 지금 시를 쓰려하는군. 바닷속의 한 어두운 책상 위에 등 하나를 켜려는 거지…… 하곤 생각했지요. 나는 바다의 신이 그 자신의 영혼을 따뜻하게 적실 시를 쓰기 바랐습니다. 그 순간이 모든 시 쓰는 자들의 영혼이 가장 설레는 축제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주름살 많은 얼굴이 참 편해 보이던 당신.

푸른빛의 어둠을 뚫고 배 한 척이 다가옵니다. 나는 천천히 그 배에 오릅니다. 얼굴을 알지 못하는 몇몇의 사람들과 함께.... 그들과 나 사이에도 푸른빛의 어둠이 흘러 지나갑니다. 날개가 없는 시간들, 언덕이 없는 꽃들, 바람이 없는 춤들……. 배에 오르는 순간 내 마음이 잠깐 술렁였습니다. 선실에 켜진 희미하고 낡은 등 때문이었지요.. 어디선가 그 등을 본 것 같았습니다. 안녕, 너도 시를 쓰니? 배는 천천히 바다를 향해 나아갑니다. 배는 많이 낡았습니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디젤 기름 냄새가 자욱합니다. 이 신비한 푸른빛의 시간 속에서는 덜 연소된 기름 냄새조차도 포근하게 느껴지는군요. 뱃머리 쪽으로 나아가다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작은 선실 벽에 배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해신' 너무 놀란 나는 하마터면 뒤로 넘어져 바다에 빠질 뻔했습니다. 이 우아한 해후라니요.

오랜만에 보는군요. 늘 당신 생각을 했지요. 당신이 바닷속 깊은 어딘가에서 아주 근사한 시를 쓰고 있을 거란 생각을 했지요. 아주 깊은 바다 어딘가에 당신이 시를 써서 읽어주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극장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가끔은 그 극장에 가고도 싶었답니다. 건강하게 잘 지냈나요? 온몸으로 자신을 느끼는 시간, 축제, 꿈, 기억, 방랑...... 당신이 일러준 삶의 비밀 하나로 나뭇잎 같은 내 인생이 가끔은 파도처럼 술렁이는 꿈을 지니기도 했지요.

짧은 항해 끝에 낡은 배는 한 섬에 닿습니다. 바다 위의 신비한 푸른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나는 천천히 선창의 끝으로 걸어갑니다. 그곳에 키 작은 가로등 하나가 서 있습니다. 오래전, 이 가로등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하룻밤을 새운 적이 있습니다. 밤새 파도소리를 들으며 별을 보았지요.

당신, 한데잠을 자본 기억이 있나요? 바닷속 어느 나라에도 너무 춥고 쓸쓸해서 단 한 시각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늙은 해파리 같은 영혼들이 있나요? 한때 한데잠을 자본 영혼만이 인생의 쓸쓸함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수없이 많은 한데잠을 잔 뒤에야 별처럼 맑은 영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생각했지요. 혹독하게 추운 한데잠을 잔 뒤에야 인생의 허름한 욕망들을 훨훨 날려 보낼 수 있다 생각했지요.

그날처럼 가로등 기둥에 등을 대고 앉습니다. 문득 깜깜한 바다. 한가운데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빛 하나가 보입니다. 그 불빛은 내가 앉은 가로등 밑둥까지 천천히 다가옵니다. 작은 배 위에 한 노인이 등불을 들고 서 있습니다. 그가 내게 삿대를 내밉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배 위에 오릅니다. 세월이 가고 다시 세월이 오고, 그 속에서 밥을 먹고 시를 쓰고 파도소리를 듣고, 그러다가 그 길목 어디에서 우연히 시의 신을 만나 함께 배 위에 오를 수 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요.

세월이 오고 다시 세월이 가고, 천형인 그 시간들을 운명처럼 바람처럼 따뜻하게 껴안는 축제들의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2002년 가을 곽재구 - 곽 재구의 포구기행 머릿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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