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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야기

수봉산에 눈이 내렸다.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15. 00:17

수봉산에 눈이 내렸다.

언제 내렸는지 모르게 두어 송이쯤 내리다 그저 녹았는지 희끗한 잔설만 보이는 인색한 눈이다. 코로나에 시달리고 지친 사람들이지만 첫눈을 기다리는 순결한 마음은 어느 구석엔가 남아 있다. 이 나이에 감성이 남아 있다고 웃을지 몰라도 이런 천진한 마음마저 없다면 지금 같은 세상에서 어찌 꿈이나 꾸며 살아 낼 수 있을까!

소시민의 꿈은 그리 위대한 것이 아니다. 소위 작은 행복에 이끌려 살아간다. 조그만 책장 하나 들여놓고 거기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고구마의 구수함에서, 그리고 서랍 속에 간직한 오래전 편지글을 찾아보며 친구의 따스함을 느낀다. 이런 작은 행복 가운데의 하나가 첫눈인 것이다.

첫눈이 내리면 건강한 사람도 헛기침을 한다. 창가에 기대어 잠시 눈송이를 쫓다가 눈 속에 얽힌 그리운 이의 얼굴을 떠 올려 본다. 크리스마스 카드의 겨울 풍경과 같은 동심의 세계가 눈발 속에 어른거린다. 사슴의 발자국 같은 것, 할머니가 짜서 내주시던 벙어리 털장갑의 따스한 촉감 같은 것, 밤늦게 두런거리던 동석 형님의 나직한 목소리 같은 것, 이런 것들이 한 송이 눈발 속에 묻혀있다.

이런 작은 행복마저도 올해에는 제대로 맛볼 수 없는가 보다. 첫눈답지 않은 첫눈! 그것도 무슨 큰 복이라고, 변변하게 누릴 수 없으니 아쉽다. 흰 눈이라도 펄펄 내린다면 코로나로 갑갑한 세상에 위안이라도 받을 텐데, 하늘은 이만한 행복마저 내려 주지를 않는지! 12월 중순에 접어들었는데 눈 없는 겨울이 삭막하다.

"하느님! 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때때로 눈을 내리시어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덮어 주소서 금세 녹아 버린다 해도 불평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오염된 악과 거짓된 인간의 마음에 순결한 백색의 은총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눈 없는 겨울은 참 춥습니다. 너무 살벌합니다. 위안을 주시고 잊게 하소서 지금 우리는 너무 지쳐있습니다."

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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