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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신흥동 80년대의 풍경과 사람들 / 풍경 본문

내이야기

신흥동 80년대의 풍경과 사람들 / 풍경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1. 25. 21:13

신흥동! 80년대의 풍경과 사람들 / 풍경

긴담 모퉁이 길!

싸리재 고개 언덕을 지나 송도중학교로 나가는 작은 길, 나이 든 인천사람들에게 정겨운 이름! 그곳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지금은 행인들 편하라고 오른편에 작은 인도를 앙증맞게 만들었으나, 나는 예전에 생긴대로의 하얗게 바랜, 먼지 날리는 아스팔트 길이 더 정겹다.

길 중간으로 빠지면 옛 영화를 그리는 "부윤 관사"집이 갈래길에 무심히 서 있다. 세월의 더께를 느낄 수 있는 건 전형적인 2층 일식집의 형태와 낮으막한 축대와 나의 감성뿐 세월과 권력의 덧없음을 본다. 대로변으로 나가는 왼편 끄트머리쯤에서 자주 신세를 지고 있던, 국제 인쇄소 사장과 바로 옆의 구멍가게 아줌마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허공으로 사라진다.

왼쪽으로 돌아서서 조금 걷다 보니 겹쳐진 턱밑 주름과 소리 없이 히-- 하며 특이하게 웃는 "개뱔위원장" 직함을 가진 이 창원 원장의 병원 건물이 꿋꿋하게 서 있다. 병원 건물 앞에서 "오양 기념사" 김 식길 사장 (후에 시 의회 부의장 :지금은?)과 ,
달마도사의 풍모보다는 조금 갸름한 얼굴에 기다랗고라고 풍성한 흰 눈썹이 일품인 , 아버지보다 연세가 더 드셨으면서도 나와 막걸리를 즐겨 드시던 , "김 정일" 위원장(?) 께서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심각하게 의논하고 있다.

무슨 일일까 참견하려다 그냥 지나치며. 내 존재를 알리듯 휘파람을 힘차게 분다. 이윽고 지금은 널찍하지만 "해광사"를 오르는 좁은 계단을 만난다. "저 계단이 몇 계단이나 될까" 하고 헤아려 보려는데, 길 건너에서 "광덕사" 복덕방의 용진형이 배포도 좋게 무단 횡단하며 내게 뛰어와 "삼성전자 신흥 대리점" 유 사장께서 내가 일전에 부탁한 T.V 가져가라는 희소식을 전한다. 원가에 24개월 할부를 부탁했더니 그냥 기증해 주신단다.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유 민영 사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와! 주정뱅이 송씨네 아들이 내일부터는 "뽀뽀뽀"를 볼 수 있겠다. 빨리 가서 이 소식을 알려 줘야겠구나! " 며 바삐 걷는 내 모습을 보고 나와 처음 대면하자마자 족보로 한 항렬 위임을 유난히 강조하시던 " 항구 화원 " 현생이 아저씨께서 "얘! 무슨 좋은 일 있느냐? " 고 묻길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당신 일처럼 기뻐하신다.

칠성 이발관 주인과 정류장 앞 건물주인 영서 형님도 함께 즐거워하신다. "흥성 상호신용금고" 건물에 달아 놓은 " 86 아시안게임 인천에서"의 홍보 현수막도 함께 춤춘다. "시립병원"후문에 위치한 "크라운 소시지"공장 한편에 블록과 합판으로 얼기설기 대충 져놓은 조막만 한 집은 주정뱅이 송 씨와 국민학교 2학년 짜리 아들 둘이 살고 있다.

여자는 송 씨의 술주정으로 애가 4살 때 도망가 버리고 송 씨 혼자 새벽 어시장 허드렛일로 애를 돌보며 살고 있다. 우연히 들러 본 송 씨 집 앞에서 애 혼자 풀 죽은 채 훌쩍이며 땅바닥에 낙서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여 말을 걸어 본 게 결국 T.V. 하나 사줘야겠다는 맘을 먹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날 저녁 주정뱅이 송 씨는 내게 술 안 먹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으나, 그 버릇은 여전했다. 그로부터 3년이나 지난 후 어느 가을! 그 동네를 떠나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송 씨가 사무실로 느닷없이 찾아와서 실한 조기를 한 두름 턱 하니 내놓고는,

" 김 형! 나 1년 전부터 술도 끊고, 어시장에 좌판 하나 얻었습니다. 아들도 안 때립니다! 김 형이 나와 창기를 살려 주셨습니다 지금은 정신 차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라면서 그 넙데데하고 다부진 얼굴에 큼직한 눈물 흘리며 거듭 고맙다는 인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창기도 이젠 서른이 다 되었을 텐데, 결혼은 했나 모르겠다. 그나저나 송 씨는 진짜 술을 끊고 잘 살고 있는지. 우연이라도 길에서 한 번 마주쳤으면...

시립병원!
지금은 인천교 옆 번듯한 공간을 차지한 대형 병원으로 자리매김을 했지만, 옛날부터 인천 서민들의 수많은 사연이 거쳐 간 곳! 지금은 은퇴하신 원무과 문 부장과의 소소한 인연으로 내게 몇 가지의 사연을 품게 만든 곳이다. 병원 바로 뒤에는 "경기 간호전문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여동생과, 안산에 사는 막내 처제가 졸업한 학교라서 퍽이나 정감이 가는 학교 이름이다. 지금이야 다른 곳으로 이전도 하고 이름까지 바뀌었지만 말이다.

학교 뒤에는 간질환자를 위한 "장미의 집"이 있다. 겉으로 보면 일반 가정집처럼 보인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이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인 그곳은 한 번도 들어 가 보지는 못했다. 아주 친한 누나 한 분도 처녀 때 그 병으로 기나긴 시간 속앓이를 했다. 오래전 완쾌되어 지금은 너무도 왈가닥이 되어 버린 누나는 만나면 반갑다며 머리카락 희어진 나이 든 동생을 매운 손 맛으로 길 들이곤 한다.

시립병원 앞 길 건너편에는 "삼화곡산" 건물이 있다. 안에 들어서면 어두 컴컴한 쇠락한 이 건물은 날이 갈수록 육중한 철문이 열려 있는 횟수가 점점 띄엄해지며 이곳저곳에 거미줄만 늘어간다. 신흥 로터리 쪽으로 조금 나오다 보면 창숙 이모가 운영하던 "태화 여관" 이 있다. 참 고운 얼굴과 자태를 지닌 이모다. 지금은 강원도 어느 곳에서 살고 계신다는데 보고 싶은 얼굴이다. 이모님은 내가 가면 바로 옆의 오래된 중국집 “신일 반점”으로 전화하기 바쁘다.

바로 왼편으로 신흥시장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값싸며 맛있는 “성원식당”의 게장 맛이 아른거린다. 식당을 지나면 바로 "오래된 "신한제분"이 있다. 주정뱅이 송 씨에게 애를 봐서 간혹 국수가락이라도 주기를 부탁해서 친분이 있는 곳이다. 그 마저도 송 씨가 앞 구멍가게에서 술로 바꿔 먹는 통에 고개를 설레설레 짓던 사장님의 황당해하는 얼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시장 옆구리 쪽이 일제강점기시절의 "유곽" 자리다. 간혹 보이는 일식 건물들이 그 옛날의 아린 기억을 보여준다. 시장에서 조금 벗어 난 곳에 미군부대에서 양식요리를 배운 사장님께서, 나이 든 식도락가들의 구미를 맞춰주는 "국제경양식"이 있다. 적당히 잘 익힌 살진 "스테이크"와 업소에서 직접 구워낸 따끈한 "모닝 빵"에 자르르 기름기 흐르는 노란 버터를 발라 먹는 그 고소한 맛은 지금도 입맛을 돌게 한다.

조금 앞에 낡은 "신선동 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고, 맞은편에는 마포갈비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 대포" 집에서 돼지갈비 냄새와 연기가 들창 밖으로 사정없이 쇠어 나와 소주 한잔을 생각나게 한다. 지금은 가좌동으로 이사를 갔다. 조금 떨어진 곳의 파출소 옆에 있는 감자탕집 " 주마등 " 의 동그란 원통형 간판이 뱅뱅 돈다. 푹 익은 돼지등뼈는 힘 안 줘도 툭툭 잘도 벌어진다. 제주도 감자의 고소한 맛은 아는 사람만 안다. 등뼈에 푸짐하게 붙어 있는 살코기는 어느 집도 흉내를 못 낸다. 시원한 국물과 구수한 시래기의 맛을 아직도 못 잊겠다. 이젠 추억에만 존재하는 상호 그대로 세월의 흐름과 같이 "주마등"처럼 흘러간 옛 이름이다.

3류 영화관의 대명사였던 "자유극장"에서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건너가면 이사 간 전화국 담장이 보인다. 블록담장 너머에서 풍겨 나오는 휑한 느낌은. 지금의 철망 휀스로 안이 다 드러난 황량함보다 더 을씨년스럽다. 언제까지 저렇게 방치할까 모르겠다. 전화국 철망 휀스를 통해 "정원식당"이 보인다. 20년가량 단골집이다. 매우 신선한 선지 해장국을 제공한다. 두 어달전 깨끗하게 3층 집으로 단장하고 생경스럽게 손님을 맞고 있다. 나이 들어가며, 너무 깨끗함 보다는 예전의 묵지근하게 열리는 유리 여닫이문과 낮은 천장에서 느끼는 안온함과 , 좁으면서 약간은 불편한 화장실에서 더 정겨움을 얻는다.

가자! 장미촌으로! 장미촌은 정말 역을 중심으로 퍼져 나갈까? 수인역 앞의 “노란 집-옐로 하우스” 하인천역 뒤의 뱀골목,동인천역 광장 옆, 영등포역 옆 주변과 용산역 앞, 청량리역의 588, 수원 고등동 구 터미널 앞” 등등을 보면 맞는 것도 같지만… 끽동으로 불리던 학익동 특정 골목이나, “종삼”이나 미아리 “장안동”과”천호동 텍사스” 그리고”용주골”을 보면 아닌 것도 같다. 완월동이나 자갈마당 들은 역 근처에 있을까? 결국 마초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사연 많고 슬픈 장미들은 꼬이기 마련인가 보다.

"옐로 하우스"옆에는 붉은 등과 푸른빛을 띠는 하얀 형광등과 어울리지 않는 공장 건물 하나가 서 있다. 전국 어느 곳의 공장이나 지붕을 파란색과 흰색의 바둑판무늬로 칠한 “퓨리나 사료” 공장은 시라소니 마냥 거친 세상에 홀로 내 던져진 쓸쓸한 모습이다. 재작년인가 돌아가신 "알파 항공" 이 사장께서 한 때 경영하셨던 곳이다. 새삼 이 사장님의 인자하신 목소리와 세련된 몸 짓이 눈에 밟힌다. 그 쓸쓸한 모습은 “삼화곡산”에 다름 아니다.

신흥동의 끄트머리 쪽이다. 이젠 신흥 로터리 방향으로 되돌아가야겠다. 건너편에는 박 대통령 시절 4대 의혹 사건으로 지탄을 받았던 "제일제당" 설탕공장이 있고, 수인선 철로 변에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안역 앞의 “제일연탄”공장과 더불어 인천사람들의 겨울난방을 책임지던 연탄을 찍어내는 “강원연탄”공장이 있다.

수인선을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곡물시장은 아직도 철도연변에서 단골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철로집”을 비롯한 보신탕집들도 열 집 안팎인데 제법 유명세를 타며 영업하고 있다. 신흥 로터리 주변에는 도로부지로 편입되어 케이크를 8분의 1로 자른 모양의 긴 삼각형 대지에 지은 3층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에는 “아카라카 인쇄소”가 있었고, 두 개 층을 영업장으로 3층을 가정집으로 써도 채 10평이 안 되는 기형적인 건물이었다. 그곳의 김 사장이 종종 영화 시사권을 챙겨주곤 했다. 결국은 없어지고 말았다.

인쇄소 옆 골목 초입에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경기은행 건물과 함께 사라진 아주 오래 운영했던 중국집 “ 혜빈 반점” 이 있고, "혜빈 반점" 앞에는 싸구려 니나노 집과 호프집을 합쳐놓은 형태의 실비 색시 집들의 나이 든 퇴물 아줌마가 퇴근길 내 호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렸다.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대로변과 연결된 조금 넓은 골목에 “처녀 목욕탕”과 “신흥 한증막”이 있다. 목욕탕 사장인 경찰간부 출신의 송 호석 씨는 머리를 까만색으로 염색을 하고 포마드로 빗어 넘긴 늘 똑같은 스타일로 천천히 동네 마실 다니는 게 일과였다. 송 사장님의 작은 아들 남일 형과는 신흥동에 오기 전부터 호형호제하던 사이로 하인천에서 “화신 제과점”을 운영하던 영성이 형과 대한항공 다니던 철이 형 들과 친구였고 종종 술을 사주던 물주형이었다. 꽤 오래전 우연히 석바위 지하상가에서 메이커 양복 대리점 할 때 보고는 연락이 끊어졌다.

골목길 중간쯤 왼편 좁은 골목에는 내 총각시절 한참 드나들던 "뉴 반도"나이트클럽에서 이제는 나이 든 아저씨 아줌마들의 만남의 광장이 되어버린 "신흥 카바레"가 자리하고 있다. 카바레 사장인 윤 사장과는 업무관계로 종종 볼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곳 지배인이 징병검사를 못 받게 된 사연부터 10여 년 동안의 파란만장한 살아온 인생사를 털어놓으며 도움을 주기를 청하길래, 병무청으로 확인해서 고령으로 인한 "소집면제" 처분 통보서를 손에 쥐어주자 그 험악하게 생긴 단단한 양반이 나이도 어린 내게 "형님" 하며 그동안 말 못 할 고생과 마음 조림을 회한의 절규 어린 눈물로 보여주었다. 이후 신흥동을 떠날 때까지 내가 당직하는 날이면 종종 술과 안주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옮기고도 한참을 연락하더니 어느 날부터 뚝 연락이 끊긴 채 20여 년 소식을 모른 채 지내고 있다. 부디 잘 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신흥 카바레"에서 해광사 쪽으로 나오는 좁은 골목길 왼쪽 귀퉁이에 아주 낡은 2층짜리 신흥동사무소가 있고, 그 앞에 소탈한 규모의 "태양당 한의원"이 있다. 원장님 사모님의 칼국수 끓이는 솜씨가 아주 기막히고 유독 겉절이 김치를 맛있게 담그셔서 비 오는 날이면 신세를 지고는 웃음으로 셈을 했다. 맞은편 지하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운영하는 전자오락실이 있었는데! 그 시절 한참 유행하던 "갤러그"에 미쳐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 간 동료 금복이와 함께 점심시간이면 밥도 안 먹고 그곳에서 지냈다. 그래 봐야 100만 점을 넘기기가 힘들었고 한계를 느낀 나는 결국 그곳에서 처음 시작된 내 인생의 전자오락 게임은 끝을 보았다 지금도 오락은 안 한다.

골목길 끝 무렵에 중국집 "신동양" 이 있다. 중국인 가족이 운영을 했는데 음식을 참 잘했다. 부부와 두 아들과 어린 딸이 있었는데, 엄청 뚱뚱한 작은 아들의 선한 웃음이 지금도 내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큰 아들의 부모님 모시는 정성이나, 두 부부의 성실함은 인생을 사는 누구든 본받을 점이다. 골목 안이라 일부러 찾기 힘들어 차가 그곳을 지날 때면 목을 길게 빼고 보고는 하지만 큰길에서는 잘 안 보인다. 부디 그들 가족에게 영원한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신흥동과 사동 경계길에는 김 학균 시인과 동인들께서 자주 들린다던 "정원 목욕탕"이 있었다. 경계길에서 "국제여객선터미널" 방향으로 나오면 ,  "삼화 정미소"가 있다. 일본 식민시절부터 수탈의 현장에서 채찍질을 받고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던 녹이 슬고 덩치만 큰 정미기도 기력이 다 했는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꼼짝을 안 한다. 골방에 누워 가랑거리는 목울대의 울림을 지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더니 결국 "경기은행"과 "누리 타워" 자리에 있던 "고려 정미소"와" 함께 기나 긴 욕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일대의 창고 건물과 정미소 담장들의 붉으죽죽한 적벽돌 담장들의 모습이 흉물스러워 "고려 정미소"부터 "국일관" 맞은편 "상공회의소"까지의 담장에 구청의 협조를 받아 동네 아저씨들과 "담쟁이덩굴"을 심었다. 세월이 가며 그곳을 지날 때마다 쭉 이어진 담장과 창고 건물을 뒤덮은 초록색 잎의 운치 있고 시원한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 아파트와 " 이 -마트" 등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며 죄다 없애고 말았다.

그래도 마지막 딱 한 군데 남아 이 겨울 동면을 하고 있는 갈색 줄기들이 매년 초록색 잎을 벌려 바람과 함께 박수를 치면서 나와 함께 "담쟁이덩굴"을 심으며 함박웃음을 짓던 그리운 분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하기 바란다. (끝)

2008.12.17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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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지금 너무도 빠른 변화의 시기에 당면해 있다. 90년대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나마 남아있던 운치 있는 주택들의 정원들을 부숴 버리고, 성냥갑 같은 빌라 천지로 만들더니 , 이젠 그 빌라들마저 재개발과 재정비 사업 등으로 철거해 버리며 온통 아파트를 지어놓아, 하늘 구경하기가 힘들다. 별을 보며 낭만을 얘기하는 건 애초에 글러 먹었다. 그 통에 남겨 두어야 할 건물도 헐리고, 개개인 추억을 가진 무수한 집들이 사라졌다.

어릴 적 뛰 놀던 동네와 골목길이 송두리 채 없어져 내 가 살던 곳이 어디였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편리함과 쾌적함의 추구가 추억과 인성을 앗아버린다. 삶이 팍팍해져 가고 정이 메말라감을 느낀다. 먹고 자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닐터인데, 정신의 풍요로움을 함께 느끼며 살아가야 할 텐데, 세상살이 점점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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