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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미리보는 경인철도 120년 전시회 본문

인천풍경

미리보는 경인철도 120년 전시회

김현관- 그루터기 2023. 1. 31. 00:24

경인철도 위로 역사가 흐른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차가 달린 곳이 바로 인천이다. 내년 경인철도 개통 120년을 맞이해 9월 3일부터 9월 12일까지 인천개항박물관 전시실에서 제9회 기획전시전 ‘미리 보는 경인철도 120년’을 개최하였는데 지난 세월동안 변화한 경인철도의 모습을 소개하고 오래전의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였다.

이번 전시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을 비롯해 한국 철도사와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였는데,. 경인철도가 개통할 당시의 기관차 모형과 승차권, 열차를 운행하는 증표의 역할을 하던 통표, 전호등과 같은 철도 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1부에서는 1900년 9월 경인철도의 시작과 현재를 연표로 정리해 전시의 개괄적인 내용을 소개하였으며  2부에서는 최초의 열차 모형을 전시하고, 내부 객차 모습을 구현하였고, 이어지는 3부에서는 소장유물을 중심으로 학술적인 자료를 전시하였다.

경인철도의 부설과 개통

경인철도는 1897년 3월 29일 기공되어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에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다. 경인철도의 완공으로 육로로 12시간이나 걸리던 서울과 인천 간의 거리가 1시간 정도로 줄어 서울과 인천이 1일 생활권으로 변모하였다. 경인철도가 놓이기 전까지 서울과 인천 간의 왕래는 경인도로와 인천~용산 간의 항로를 이용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당시 경인도로가 불편하였기 때문에 육로보다는 인천~용산 간 항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경인철도의 기공과 완공에는 조선이 처한 경제적 질곡과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이중성이 교차되고 있다. 재정 상태가 열악했던 조선정부는 자체적으로 철도를 놓을 만한 여력이 없어 외국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경인철도부설권을 처음 획득한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미 1894년 경인철도부설권을 확보하였으나,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되어 1896년 3월에 이를 미국인 모오스에게 넘겼다. 그러나 모오스는 자금이 부족한데다 철도 부지 문제로 일본인 지주와 갈등을 빚게 되어 결국 1899년 1월 31일, 일본이 구성한 경인철도인수조합에 경인철도부설권을 완전히 넘겼다.

일본은 인수조합을 경인철도합자회사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나머지 공사를 재개하여 1899년 9월 인천과 노량진 사이를 운행하는 경인철도의 임시영업을 시작하였다. 1900년 7월 5일에 한강철교가 준공되었고 7월 8일, 노량진~서울(당시 서울역은 서대문으로 현재의 이화여고 자리)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철도의 시발역은 처음에는 탁포(신포동)를 매립하여 이곳에 인천역을 설치할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철도 부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과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현재의 인천역으로 결정하고 전환국(인천여고자리였던 현 중구문화원 자리)과 응봉산(자유공원) 뒤를 우회하는 선로로 변경하였다.

개통 당시 경인선은 증기기관차 4대와 객차 6량, 화차 28량으로 운행되었으며 인천역~축현역~우각동역~부평역~소사역~오류역~노량진역 등 7역을 두었다. 경인철도의 길이는 총 33.2㎞였고,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였으며 오전, 오후 하루 2차례씩 왕복했다. 하루에 2번 왕복 운행하던 것을 12월 1일부터 하루 3번 왕복으로 증차하고 이듬해 3월 16일 부터는 4번 왕복으로 증차했다가, 경인철도 전구간의 개통과 동시에 5번 왕복으로 증차하였다.

경인철도 부설 당시 설치된 우각동역(도원동)은 1906년 4월 폐지되었다. 축현역은 현재의 청과물시장 부근에 있었으나 선로 변경으로 1908년 12월에 현재의 동인천역으로 신축 이전되었고 1926년 4월 25일에 상인천역으로 개칭되었다.

지금의 수도권 전철요금은 비교적 저렴한 편이지만, 경인선 개통 당시 열차요금은 일반 서민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비쌌다. 객실은 3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1등 객실의 요금은 1원 50전으로 외국인과 귀족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2등실은 80전으로 형편이 그래도 나은 내국인이, 그리고 3등실 요금은 40전으로 여성과 서민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 이를 당시의 물가 시세로 환산해 보면 면포 한필 값이 1원으로 1등실 요금보다 더 쌌고, 2등실 객실 요금은 계란 100개, 3등실 요금은 닭 두 마리의 값어치와 같았다고 한다.

경인선 개통 이후 인천에서 활동하던 많은 외국인들이 서울로 옮겨갔고, 정치, 외교, 경제의 중심이 서울로 이동되었다. 1901년 8월 21일에 경부철도가 개통되자 경인철도는 1903년 10월 30일, 경부철도주식회사로 합병되어 경부철도주식회사 경인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지난 8월에 전시회를 다녀 오긴 했는데, 게으름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서야  올린다. 2018.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