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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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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각들

복날이면

김현관- 그루터기 2022. 12. 8. 11:05

복날이면

복날 아침, 창밖으로 굵은 장맛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며칠간 이어진 선선한 날씨에 한동안 여름의 무더위를 잊고 있었지만, 곧 닥칠 찜통더위를 생각하면 잠시의 안도일 뿐이다. 에어컨을 마음껏 켤 수 없는 형편에서야 이 장마가 주는 한낱 시원함도 반가운 법. 남쪽 지방은 이미 삼십 도를 넘는 불볕더위로 고생 중이라니, 우리나라가 작다고는 해도 지역마다 겪는 날씨는 제각각이다. 그마저도 다음 주면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복더위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지금 내리는 이 비마저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밤새 내린 폭우는 약간 잦아들었지만, 아침까지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다. 밤샘 근무로 몸은 피곤하고 눈꺼풀이 무겁지만, 새벽녘에 마신 커피 덕분인지 머릿속은 맑다. 사무실 앞 해송의 솔잎 끝에는 빗방울들이 주렁주렁 맺혀 있고, 그 안에 세상이 거울처럼 투영된다. 마치 작은 만물상을 보는 듯하다. 가늘게 내리는 빗속에서 잠자리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빗속의 고요를 깨우는 뻐꾸기 울음소리는 어쩐지 복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복날에는 으레 몸보신을 위한 음식을 먹는 것이 우리네 오랜 풍습이다. 닭, 보신탕, 그리고 수박이 대표적이다. 특히 보신탕 하면 떠오르는 이는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동석 형이다. 보신탕을 먹지 못하던 나를 동석 형은 종종 "초원집"에 데리고 가서 억지로라도 먹어보라며 권하곤 했다. 짓궂은 그 권유 덕분에 지금은 즐기지는 않더라도 주위 사람들과 함께 보신탕을 먹는 데 거부감이 사라졌다. 어찌 보면 동석 형 덕분이다.

며칠 전 친구를 만나 예전 동석 형과 자주 가던 카페에 들렀다. 카페 주인이 동석 형을 찾는 전화가 오래전에 왔었다고 전해주자, 문득 형이 떠오르며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엊그제 만난 것 같은데 벌써 5년이라니. 시간이 흐르며 점점 잊히는 형의 모습이 아련하게 가슴을 찔렀다.

보신탕과 관련된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오른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큰 외삼촌 댁에 갔을 때다. 숙모님께서 점심상에 차려 주신 소고깃국이 참 맛있었다. 맛있다며 연신 떠먹는 나를 보며 숙모님은 그저 미소를 지으셨다. 그 후로도 며칠간 소고깃국과 수육을 푸짐하게 내주셔서 고맙기만 했다. 그러던 마지막 날, 오산 할아버지 댁으로 내려가려던 나를 붙잡고 숙모님은 그제야 보신탕이었음을 깔깔 웃으며 알려주셨다. 그때의 원망스러움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집 아이들은 보신탕을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다. 특히 큰아이는 강아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기에, 그의 앞에서는 보신탕에 대한 언급조차 할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 복날에 장난 삼아 소고깃국을 보신탕이라 속였을 때, 나중에 사실을 알고 밥숟가락을 들고 대성통곡을 했던 큰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후로는 아예 보신탕 얘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오늘은 전국의 수많은 견공들과 닭들이 사람들의 몸보신을 위해 희생되는 날이다. 장마로 인해 어쩌면 죽어나가는 숫자는 줄어들지 몰라도, 결국 보신탕은 우리 식문화의 일부다. 그들의 숙명이 인간의 먹거리를 위해 길러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고통 없이 보내주는 자비가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름철만 되면 보신탕이 비위생적이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곤 한다. 어릴 적 동네 추녀에 개를 매달아 몽둥이로 때려죽이던 아저씨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잔인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차피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식습관이라면, 차라리 도축 허가를 내어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어정쩡한 규제보다는, 명확한 기준을 통해 관리받는 것이 오히려 옳지 않겠는가.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복날의 아침을 적시고 있다.

20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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