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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형상의 탐구(아리스토텔레스) 본문

철학,배움,지혜

형상의 탐구(아리스토텔레스)

김현관- 그루터기 2023. 7. 13. 00:34

형상의 탐구(아리스토텔레스)

知識 ,知慧 ,生活/배움-문학,철학사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형상의 탐구(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철학 역시 그 이전은 자연철학시대 이후는 아테네 철학 시대이다. 마라톤 평야의 결전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섬멸시킨다. 이후 정치.경제.문화 등 그리스의 황금기가 도래한다. 이 시기의 중요한 사상적인 변화는 자연철학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고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과거엔 극소수의 철학자들이 우주의 원리를 연구했지만 이후 아테나가 그리스의 중심이 되고 아테나에서 모든 문화가 펼쳐지면서 문화가 대중화가 된다. 우주의 섭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문화적 영향에 대한 욕망이 분출된다. 그러면서 근원적인 우주와 세계의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실세계 속에서 지적이 사람이 되고 싶은 대중의 욕망의 충족시켜줄 지식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사회과학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풍토에서 나온 사람들이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말을 잘하는 법, 토론에서 이기는 번. 글을 잘 쓰는 법 등 문화적 욕망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면 인기를 얻었다. 인간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다. 그리스문화가 쇠락하면서 소피스트들이 타락하게 된다. 내용보다는 학문 외적인 것을 강조하게 된다. 지식장사꾼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와 대립하게 된다.

1. 고르기아스(소피스트)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허무주의). 존재해도 알 수가 없다(회의주의). 알 수 있다 해도 전달할 수 없다고(상대주의) . 이 세계는 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다.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라고 이해함. 서양의 그 이후의 적극적인 사상들은 고르기아스의 사상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 있음을 탐구하고 연구한 것은 형이상학, 존재론, 어떻게 우리가 알 수가 있는가를 연구한 것이 인식론이고. 어떻게 사람들이 소통을 하는가를 연구한 것은 정치 철학이다. 이후 고르기아스의 체재에 대한 서양 철학의 가장 전형적인 3가지 답이 나오게 된다.

-하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대변되는 형상철학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 있다. 형상을 어떻게 아는가. 로고스를 통해 형상을 안다. 어떻게 전달하는가 로고스는 만인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물질을 내세우는 유물론(스토아학파, 에피크로스 학파)

지각을 공유함으로써 알 수가 있다.

-마지막은 신을 내세운 유태기독교전통(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신이 존재한다. 어떻게 신을 아는가, 계시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어떻게 전달하는가, 신국(신의나라)에서는 모든 이들이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통한다.

철학적으로 보았을 대 유태교는 철학적으로 보면 형상철학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은 철학은 형상철학과 유물론의 대결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중세철학의 주류는 형상 철학이었다.

1.플라톤

플라톤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있고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있다.’ 오감으로 느끼는 형상세계가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형상세계는 이차적인 세계이다. 진짜 세계는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 감촉도 없지만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깊이 있게 보려면 감각을 버리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3’이라는 수가 우리 눈에 안보이지만 존재하듯이 이데아라는 것은 보이지는 않으나 존재하고 있다.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의 그림자, 즉 모방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의 가치는 이 이데아를 얼마나 닮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2.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제자)

플라톤의 형상개념은 인정하지만 그 형상의 세계가 우리가 사는 감각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질료와 형상은 개념적으로 논리적으로 구분되는 것이지 실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서양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과학적 행위와 예술은 기본적으로 그리스 적인 형상철학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고전문화 전체가 형상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이 무너지면서 모더니티의 세계가 도래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 북부 스타기라에서 BC 384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왕 아민타스 2세에게 고용되었던 의사였으며, 프록세노스라는 후견인에게 그를 남겨놓고 죽었다.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 그는 의사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세 때인 BC. 367366년에 아테네에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플라톤이 죽자(BC. 348) 그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그 학파의 수장으로 임명받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아시아의 연안에 위치한 아쏘스로 옮겼다. 그는 헤르메이아스의 조카딸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였다.

BC 342년 경에 필립 왕으로부터 13세의 어린 알렉산더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초대받은 그는 마케도니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뤼케이온(뤼케이온이라 불리는 아폴로 신전 옆에 있었기 때문에)또는 페리파토스(차폐물이 있는 도로라고 알려진 새로운 학교를 창립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BC. 323)은 아테네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런 와중에 마케도니아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은 협력자로 고발당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건하지 못한 글들을 썼다는 죄로

고소 당했다. 그는 어머니의 출생지였던 에우보에아에 있는 칼시스의 마을로 은퇴했다가, 여기서 곧 병이 들어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BC. 322) 그는 슬하에 피티아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같은 이름의 딸 피티아스와 그녀가 죽은 후 헤르필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니코마코스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