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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받는 사람들의 철학(맑스) 본문
핍박받는 사람들의 철학(맑스)
知識 ,知慧 ,生活/배움-문학,철학사
Marx, Karl Heinrich, 1818.5.5~1883.3.14
* 핍박받는 사람들의 철학(맑스)
근대에 와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새로운 산업이 발달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경제 변혁인 산업혁명이 발생하고 그 시대에 새로운 생산력을 기반으로 주도세력으로 부르주아계급이 등장한다.(*부르주아:원래의 뜻은 ‘시민’이다. 도시를 기반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자본가가 시민이다.) 전통적인 지배 세력인 귀족을 몰아낸다. 이와 함께 프롤레타리아가 등장한다. 원래는 농민이었으나 도시로 와서 노동자계급(근대적 의미의)이 되고 둘은 서로 양립한다. 예전 귀족과 평민의 관계는 신분관계(세습,의무,강제성)였으나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는 계급관계(계약)이다.
생산수단에 의해서 (토지.건물,기계-궁극적으로는 자본) 계급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생산양식은 한 시대에 생산을 하는 방식(거대한 개념)이다. 자본주의사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것은 잉여 가치이다. 노동자가 일을 해서 생산결과에 맞추어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액을 지급함으로써 이익을 많이 얻는 것. 이는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자본이 된다. 일반적인 돈은 소비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자본은 확대재생산에 투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계약을 맺어서 일을 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착취하는 것이다. 자본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 어떤 이는 브르주아가 되고 노동자는 평생 노동을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이다. 사회주의사상은 예전부터 있었으나 과거의 사회주의 사상은 너무 공상적,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았고 맑스 자신은 과학적인 사회주의라고 함. 진짜 사회주의가 되려면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경제학의 대가로 정치경제학은 자본주의 경제학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맑스의 사유에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은 ‘소외’이다. 소외는 낯설게 되는 것으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부르주아계급을 귀족계급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듯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단결해서 브르조아 계급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래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20세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막시즘은 관료화가 되면서 (막스베버는 ‘관료제가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계급을 타파하자고 하고선 관료들이 신흥귀족이 되는 것이다. 원래와는 다르게 별질 되어 무너지고 만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의 힘이 막강해졌는데 그 분기점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도래이다. 이전에 자본의 횡포를 막는 것은 국가 장치였으나 이를 무너뜨리고 완벽하게 시장논리와 자본경제가 지배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엔 기존의 자본가들이 유리해진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대중들이다.
마르크스 [Marx, Karl Heinrich, 1818.5.5~1883.3.14]
라인주(州) 트리어 출생.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18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18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1847년 P.J.프루동(1809∼18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1850~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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