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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k. male vocal. 75 bpm.piano. cello. lyrical. lively.
- y.c.s.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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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니의 삶
사라진 인천의 극장들 / 김현관아무리 인터넷을 뒤져 봐도 사라져 버린 인천의 극장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 복합 영화관이 생기면서 불과 10년도 안돼 인천에 있던 그 많은 영화관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겨우 애관극장만이 살아 남아 홀로 고군 분투하고 있다. 혹시 또 다른 극장이 있는지는 모른다. 난 극장에 대해 연구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인천에 어떤 극장이 있었는지 정도는 스스로 알고 있어야 될 것 같아서 기억력이 없어지기 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난 인천 사람이 아니다. 중학 2 년때인 1971년 봄 방학 즈음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서울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인천의 영화관람료가 서울보다 엄청 싸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자체도 서..
고모 이야기사랑하는 마음이 깊으면 이별의 아픔도 그만큼 깊어진다. 아버지와 고모의 사랑은 너무 깊었나 보다. 오누이의 애틋하고 살가운 사랑을 시기한 듯, 하늘은 이 두 분에게 평생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살게 하였다. 수만 리 타향에서 전해오는 고모의 편지는 가족을 그리는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와 아버지의 가슴을 애타게 했다. 이따금 오는 국제전화를 받는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고모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두 분의 그리움의 떨림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10여 년 전 아버지의 부음을 듣던 고모님의 흐느낌 속에서 마지막 떨림을 보았다.수십 년 미국 생활에서 온전한 자리매김을 하며 늘 따뜻한 모습을 우리 가족에게 알려주시더니 얼마 전 느닷없는 황혼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게 되셨..
빨간 자전거 정말이지 그 빨간 자전거는 그해 겨울 내가 절실하게 원하던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자나 깨나 눈앞에 삼삼하게 돌아다니던 빨간 자전거!. 수원 큰 외삼촌댁에 다녀오고부터 그렇듯 졸라대고 칭얼거려도, 자전거는 위험하다는 말씀으로 초지일관하시는 어머니는 요지부동 그 자체였다. 6학년 겨울방학이 끝 날 무렵 어머니께서 수원 큰 외삼촌댁에 볼일이 있으시다며 함께 가자고 하여 따라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대문 옆에 버려지듯 놓여있던 빨간 흥아 자전거는 어린 내 눈에 보기에도 약간 큰 듯했지만, 그런대로 타고 놀만하여 당시 세류동 쪽에 사시던 큰 외삼촌댁 근처를 신나게 타고 돌아다녔다. 자전거의 소유욕에 불을 지핀 것은 돌아오는 길에 스치듯 지나가며 말씀하신 큰 외숙모의 " 현관이가 가져가서 타면 되겠다"..
나의 성장기 (출생부터 국민학교 시절까지) 수원시 우만동 동문 밖!"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의 4 대문 중 하나인 창룡문(동문의 정식 명칭이다.) 밖을 나서면 조그만 네모난 과수원이 자리 잡고. “ㄴ"자형의 폭 좁은 도로가 주변으로 한가로이 몇 집이 대충 놓여있는 형상의 마을이 있다. ⼄⾣년 9월 22일 새벽과 아침 사이에 그 한가로운 마을의 가장 허름한 집에서 김 씨 성을 가진 화춘이라는 분과 또 다른 본관의 김 씨 성을 가진 길자라는 분의 장남인 내가 태어난 곳! 그곳이 우만동 삼백 십팔 번지 나의 출생지이다. 나의 생가는 변형된 모습이기는 하지만 허름한 형상으로 아직도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4살까지 그곳에서 살던 나는 멀리 연무대와 화홍문 울 바라보며 동문을 나의 놀이터로 삼아 오르내..
기수형 이야기 오늘은 참으로 낙천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형 이야기를 좀 써야겠다! 항상 미국에서 살기를 원하더니 결국 " 필라델피아 "로 날아가서 살고 있는 형은 삶 자체가 참으로 낙천적이다. 그 를 처음 만나게 된 곳은 지금은 헐려 버린 " 숭의 아파트 " 에서였다. 이십여 년 전 어느 날인가 동석형과 함께 들렸던 그 집에서는 잔치 끝이었는지 화투판으로 손님들이 흥청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손님치레를 하던 형은 인사 간 내게 성의 없이 악수 한 번 하고는, 모여있던 일행들 속으로 다시금 돌아가 버렸다. 한참을 형들 노는 모양을 보며 이따금씩 돌아오는 술을 홀짝이며 앉아 있는 중에 뜬금없이 " 돈 있음 내놓으라"는 말에 당혹해하다가 있는 돈을 돌려주니, " 참 이름이 뭐라 했지? " 하던 첫인상이 별..
선 희 이 야 기친구와의 등산 약속으로 타고 가던 새벽 버스 안에서의 일이다. 전날 과음으로 속이 쓰리고 머리도 지끈거리길래 추운 날씨에도 창문을 열어젖히며 '이러려면 무엇하러 등산을 가나?'라고 자문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버스가 멈추고 아주머니 한 분이 느릿느릿 올라타더니, 내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아주머니의 물건들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까만 비닐봉지와 포개 든 체크무늬 랜드로버 쇼핑백이 보였다. 길거리에서 가끔 보던 백이었는데, 그날은 어찌 된 일인지 그 백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한 친구의 까르르 웃는 하얀 얼굴이 시야에 떠올랐다.그 친구의 이름은 지선희. 이십 대 초반 성가대 시절에 만난 친구였다. 웃을 때 볼에 패인 우물 같은 보조개가 귀여운 동갑내기 그녀는, 집이 같은 방면..